책소개
한 ‘사랑 수집가’의 내적 풍경
여자 안의 여자가 써 내려간 다시없을 말들
한 여자의 몸에 세상의 모든 사랑이 깃들어 있다.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에 이어 『독한 연애』로 사랑의 서사를 차곡차곡 ‘수집’해 온 김윤이 시인이 그러하다. 두 번째 시집 『독한 연애』 이후로 4년 만에 선보이는 세 번째 시집 『다시없을 말』에는 그가 오랜 시간 그러모아 온 사랑의 형상과 그 형상에 비낀 한 여자의 실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4년 만에 첫 시집을 상재하고, 그로부터 또 4년 뒤에 두 번째 시집을 선보였던 시인은 우연찮게도 다시 4년이 지난 2019년 세 번째 시집을 내놓는다.
“사분사분하게 말을 풀어 가”(박형준)면서도 결코 숨기거나 위장하지 않는 그녀 특유의 “고집, 그녀만의 특별한 안간힘”(『독한 연애』 소개문)이 이번 시집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무수한 사랑에 얼룩진 드라마틱한 선율을 현시하려는 몸부림에서”(해설, 「샤먼의 고고학, 사랑의 천수관세음」) 비롯되었다. 온몸으로 앓아 낸 사랑, 그 사랑이 낳았기에 농밀하고 그윽한 언어. 그저 그런 중얼거림이 아니다. 여자 안에 ‘존재’하는 여자가 꺼내어 보이는 속살 같은 말들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영원까지 “다시없을” 것이다.
저자 : 김윤이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 및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독한 연애』가 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사랑의 블랙홀
다시없을 말―H에게
사랑의 묘
오전의 버스
내 여자
파국
꽃만두 치읓
영통
밥풀
여자, 유리디체
바닷가, 무인 잡화상
옛사랑이
통하다
키싱구라미
도마뱀
배꼽
이빨의 규칙
2부
레테와 므네모시네
과거 외전(外傳)
사랑의 아랑후에스
42
증강현실
이유는 없다
풍경에서 헤매다
페퍼라이트
경,
설어
침칠
우유 따르는 여자와 큐피드
발견
바다에 쓰다
한낮의 여인
루틴
3부
파리지옥
망
점심밥(點心?)
중반
수박 트럭을 돌아 나오며
껌
희(姬)
사랑받지 못한 잠자리
나를 지불하다
장한 일
허스토리―장미나무 붉은 묵주
이(齒)
경(經) 읽는 방
피 빠는 여자
물이 눈으로 변할 때 사랑의 위험한 이쪽이 탄생한다
아버지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4부
여자는 촉촉하니 살아 있다
공용 코인워시 24 빨래터
나의 처녀막
아가씨들
돌고래
메이커 티
혼종
코기토(cogito)―미라 산모
한(傷寒)
파랑을 건너다
페티시(fetish)
사이프러스식 사랑
새 폴더
해설 | 이찬(문학평론가)
샤먼의 고고학, 사랑의 천수관세음
출판사 서평
행간에서 울려 나는 ‘여자’의 목소리
시인은 어쩌다 ‘사랑 수집가’로 나선 것일까. 처음부터 사랑을 수집하려는 심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사랑으로 인한 자기 상처를 싸안기 위해 타인의 사랑을 들여다보면서 시작된 일이었으리라. 하나둘,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사랑의 씨앗들이 제 몸을 터트리며 이야기를 꺼냈을 테고, 그 시간 가운데 시인의 곪고 삭은 상처에는 새살이 돋았을 테다. 사랑으로 사랑을 치유하는 방식인 셈. 이처럼 『다시없을 말』에는 상처가 새살로 아무는 과정에서의 화학 작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긴 무덤 혹은 방인가요. 어둠이 달라붙어 흑단 머리칼이 됩니다. 엉킨 다리가 풀리고 당신이 몸을 떼자, 헌칠한 그림자가 바짝 뒤쫓아요. 원(遠)에서 근(近)으로 나타나는가 싶더니 근에서 원으로 크게 변합니다. 그림자가 덥석 손잡습니다. 제 외로움을 잡아당기네요. 오르페 뒤 유리디체만큼 절 닮은 사람도 없어 보이는군요. 당신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니 방은 신화의 형상을 갖춰 갑니다. 왠지 당신은 오르페처럼 장난질하는 운명을 벗어날 거라고도 생각해요. 젖 물리는 여자처럼 날 따뜻이 품으리라고도 생각하죠. 무엇이 우리 명(命)을 다하게 하나요. 둥근 해가 몸을 뚫고 들어옵니다. 뜨거워요. 꽃이 찢어지고 잎이 돋고. 어련히 알아서 하실 테지만, 혹여 뒤돌아보진 마세요.
해 지고 별 돋아도 당신 끝내 보이질 않네요. 유리디체 비명만 들려요. 피골이 상접한 나목도 제 속엔 이파리의 진동이 사는 것을,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을 쟁이고 뿌리로 뻗치느라 도통 저인지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순명하는 사랑은 없다면서 시계 침은 저같이 여지없이 고꾸라집니다. 남근과 여근은 운명에 갇힙니다. 아무려나, 끝난 날 뒤돌아보지 마세요. 사랑은 떠났고 방은 신화의 형상을 감춰 갑니다. 그러할 제, 나목은 뿌리로부터 빨아올려 일제히 꽃이 찢어지고 잎이 돋고,
불타오른 생각은 육탈이 다 되도록 뜨거운 법이지요.
―「여자, 유리디체」 전문
곡진한 사연으로 점철된 행간에는 ‘여성’의 자의식이 묻어난다. “지상에 발 못 붙인 무상 거주자; 성씨 없이 출몰하는 유령 작가; 이직을 밥 먹듯 하는 프리랜서”(「혼종」)라는 정체 모를 정체성 가운데 단연코 부정할 수 없는 오롯한 정체성은 바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다. “붉고 두툼한 입술 모양이 벌어”질 때 “몸의 내밀한 곳이 열리면서 움찔 느꼈던 첫 감촉의 도발”(「키싱구라미」)이라든지, “밤새 여자들은 촉촉(觸觸)할 테니, 마음껏 적셔 보시라”(「여자는 촉촉하니 살아 있다」)는 포고라든지, 여성으로서 내지르는 시인의 발성은 유독 카랑하다. 시인은 “무수한 여성들의 삶의 굴곡선들, 그 희로애락의 만상들”(해설, 「샤먼의 고고학, 사랑의 천수관세음」)을 꺼내 보이며 여자 안의 여자, 그 내밀한 존재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극히 일순간이었지만, 솨, 이, 우, 아--- 솨아아아--- 바다 모음들 오갔네
내뜻한 전설이 있어 배꼽이라 불렸네
격정을 품은 배꼽소라 아무렴, 암컷의 내력이었어
스스럼없이 내놓고 바닷소리 담는 배꼽이 일테면 여자 족보였어
평소는 엎디어 있는 오목한 배꼽구멍
껍데기 주둥인 뭔가를 들이고만 싶어서
심하게 부풀어 반구 이뤘어 귀 기울여 들어 봐,
애잔한 울음이 배어들 거야
암초에 파도가 덮쳐 오네 물살의 투명한 살갗 아래로
비쳐 오는 자갯빛 배꼽 솨아아아--- 지금 리듬이 좋아
달빛 쬐던 똬리가 엉덩이쯤 해 한껏 들리는 곡선이란
깊어진 협곡은 바다로 뻗어 나가
고, 헐거운 속내란 게 월경 때 같다
통증이 오지만 한없이 열리고 느슨해지잖아
보랏빛 봉오리 꽉 차고 자궁은 곧 샘솟는다지
솨아아아아--- 눈꺼풀이 태곳적 리듬에 살포시 감긴다
파동 헤치고 배꼽층계 곬 허물어지고 차오른다
금분 모래 켜켜로 부서져 내린다
부드럽게 비비다 괜스레 져 주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면 곶에 부딪쳐 성난 파도도
구멍으로 밀려들어 외로 꼬고 누울 거야
바다의 길목들이 반짝대며 열릴 거야
태내 있을 때처럼 물결에서 태어나는, 배꼽
당신이 매만지던 거기엔 바닷소리 여직도 반향되어 울리지
지금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배꼽을 다소곳 움켜쥔 채 있어
어쩌자고 자는 여자를 깨우고만 싶어서
―「배꼽」 전문
“키높이 사랑”을 꿈꾸는 시인의 “새 폴더”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일’들에 대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내 뜻과 달리) 그렇게 되었다. 또는 그렇게 되기를 내가 바랐기에 (내 뜻대로) 그렇게 되었다. 되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스러운 일이라면 전자의 반응을 보이겠으나, 뿌듯하리만큼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후자의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정반대다. 부정하고 싶은 결과 앞에서도 후자의 반응을 보인다. 이 역설적인 반응은 결코 체념이거나 냉소일 수 없다. 도리어 그 무엇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생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시인이 제 실존의 역사를 되돌려 보면서, 제가 가진 정념의 끝을 다해 과거의 특정 장면들과 끊임없이 마주치려는 까닭을 “한 번도 입을 닫지 않은 시간의 아가리”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한 번도 입을 닫지 않은”에 담긴 개방성과 불확정성의 뉘앙스가 암시하는 것처럼, 그것은 과거의 특정 장면들에 집요하게 달라붙는 어떤 원한(ressentiment)의 감정들을 토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매듭들에서 좀 더 괜찮게 살 수 있었을 방향과 선택지를 찾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에 가깝다.
―해설, 「샤먼의 고고학, 사랑의 천수관세음」 부분
시인의 몸부림은 또다시 사랑으로 귀결된다. 이찬 평론가의 말처럼 “시인은 저 자신과 타인들, 그리고 세상 전체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만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 까닭”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꿈꾼다. “자신을 훨씬 넘는 키높이 사랑”을. “세상 변해도 변경에서 자리 지키는” “못난 사랑”(「사이프러스식 사랑」)을. “쇄 불다 잦아드는” “숲 바람”(「새 폴더」)처럼, 바람결에 잠깐 깃들었다 떠나가는 한 마리 새처럼 영원하지 못한 사랑일지언정 시인은 끈질기게 써 나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랑에 대해.
나직이 속삭여 보았다 나의 새야, 두려워 말고 어서어서 날아가
고개 숙여 앉았어도 훨 훨 훨
너 있을 숲으로 활개 치는 나의 두 팔
난 진즉 알고 있었던 거다
내 사랑이 힘내서 땅 짚고 써 나가야 하는 일
-제공(교보문고)
첫댓글 축하합니다!!
^^ 감사합니다... 기온차가 크니 감기 조심하시구요!
축하해요~
네, 잊지않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번째 시집 축하합니다아~~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제자리걸음은 아닌지.. 반성도 해보며 스스로 대견도 해보며.. 복잡한 심경이에요. ^^ 부러 남겨주시는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축하 드립니다
^^ 인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시와 시월 함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랑 수집가, 여자 안의 여자가 써 내려간 다시 없을 말들..........멋진 시집 축하드립니다 대박나세요
대박... 조금이라도, 진정한 사랑만 받았음 합니다. 직접 연락 남겨주시고 부러 또 남겨주시는, 격려와 말씀 감사......
여자여서 쓸 수 있는 '시'가 있어서 축복입니다.
윤이 시인님,
또 다른 기대를 하며 축하드립니다.
여자도 남자도 다 아우른 속사람의 시도 나오길...
옳은 말씀이세요. 축복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르는 지점이 부족했다고도 생각하고요. ^^ 세심한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