躁急症과 二律背反的인 삶.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별 바쁘지도 않으면서 서두르는
조급증 때문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서두는 가벼운 성질 바로 "빨리문화" 이다.
그 때문에 사회병리 현상도 눈만 뜨면 일어나고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 사고가 밤낮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한 박자 쉬면서 심호흡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건 내가 그렇기 때문에 유추을 하는 것입니다.
세칭 “코드가 맞다” 는 것은 같은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먼저 말이 통하고, 글이 통하고, 육신이 통할 때
진정한 우정과 연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딱풀처럼 금방 감쪽같이 붙었다가 금시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요즘 사람들의 사랑이 심호흡이 없는 졸갑증
때문에 생긴 병이 아닐까요?
무던하게 시나브로 천천히 붙어주던 옛날의 밀가루 풀 같은
사랑과 우정이 절실히 그리워진다면
내가 완전 구닥다리일까?
사고(思考)가 느리면 생각과 시야가 넓어질 것입니다.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지혜가 넓어지고
지혜가 있어야만 자기가 생각이 정리되고
그 생각이 느낌으로 변해 글이 되어 나옵니다.
남의 글이나 외우고, 퍼서 나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시(漢詩)를 삼백 수는 외워야 한 줄의
시를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시경에 삼백오수 있기 때문입니다.
휘발성이 강한 글이나 이슈가 있다면
그것을 현대에 접목시키는
지혜와 내공이 있어야
읽는 사람도,
듣는 이도.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혹여 작은 것이 있어 마음에 와 닿는다면
긴 숨 고르기를 하고 그것을 생각에 담아보세요.
백거이가 도림 선사에게 말했습니다.
“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악한 일 하지 말고 선한 일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스님, 그 말은 세 살 먹은 아이도 할 수 있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지만
여든 된 어른도 실천하기 힘든 것입니다.”
어제 마산 포교당 정법사에서 듣고 배운 말인데
“법당 보살”이란 말이 있습니다.
법당 안에서는 법문을 잘 듣고 기도도 잘하는데,
법당 문을 나서자마자 자기 신발이 없다고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험악한 말이 나옴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즉 법당 안에서는 보살이고 문을 나서면 “아니올시다.”
가 되어버리는 경우를 말하지만 어쩌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자주 법당(좋은 글)을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가끔 법당
밖에서도 실수로 보살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乘)과 배움(知)은 행(踐)한다는 뜻이지
입으로만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육조단경-
을미년 오월(양) 스무사흘 아침 취람 여포
첫댓글 늘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