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림李嘉林의 정읍井邑 시편들
정읍기행井邑紀行
개구리들이 육자배기로 울어제키는
논길을 가면 떠올라라 대창에 찔려
곤두박힌 어떤 장정의 피 묻은 잠
약삭빠른 비료가 무더기로 밀어닥쳐
그 꿀벌 떼 잉잉대던 자운영 논을 뒤엎고
남은 건 한 가마니의 빈 겨
한 가마니의 설움뿐
두엄자리 오줌에 재려 태어난
일찍이 뒈져야 마땅한 낟알로서 버려진 머슴으로서
들말같이 살아온 흉터의
사내가 낫을 들어 내리찍은 그림자
제길할, 제길할, 제길할
푸짐한 달덩이도 뜨면 무엇하나
홀로 골방에 가서 죽을거나
옛 방앗간의 전깃불 아래
한 사발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논길을 가면 부끄러워라 서울에서 팔린
젊은 늑대의 발톱, 빛나는 이빨
고부古阜에 머무르며
알 수 없는 부자유不自由의 밤 속에서
휩쓰는 낫에 베어지는 풀잎들이 있다
바가지로 바가지로 설움의 물을 퍼올리며
끝끝내 잠자지 않는 노여움의 뿌리가
무식하게 곡괭이를 들고 무식하게
도끼를 들고 일어나 위협하는 바람을
이마와 어깨로써 막아내고 있다 아아
하나뿐인 참사랑도 허물어지고 험상궂은
능욕당한 흉터만 남아있다 모시 적삼의
누이여 우리나라의 눈물이여
황토黃土에 내리는 비
동풍이 목놓아 소리치는 날
빈 창자를 쓰리게 하는 소주 마시며
호남선에 매달려 간다 차창 밖 바라보면
달려와 마중하는 누우런 안개
호롱불의 얼굴들은 왜 떠오르지 않는가
언젠나 버려져 있는 고향 땅
단 한번 무쇠낫이 빛났을 때에도
모든 목숨들은 언문諺文으로 울었을 뿐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아우성처럼 내리는 비
캄캄한 들녘 어디선가
녹두장군의 발짝 소리 들려온다
하늘에게 직소直訴하듯 치켜든
말없이 젖어 있는 풀들의 머리
어떤 안부安否
⸺다시는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사람에게(보들레르)
전라도 정읍 산성리의
우리 외할머니네 집 굴뚝 밑에
묻어 놓았던 옥색 구슬은
순수하게 빛나며 아직 있을까.
얄미운 개가 매장된 시체를 파헤치듯
우악스런 발톱으로
꺼내버렸으면 어떡허나
그 굴뚝 근처에서
금순이들과 모여 저녁마다
꿩의 깃털을 등에 꽂고
나는 숨바꼭질을 하며 즐거웠다
어릴 적, 그때 술래가 되어 숨은 뒤안의
귓속말 주고받는 내외같이
정정하게 서 있던 은행나무는
지금쯤 목관木棺이라도 지을 만큼 자라서
무성한 그늘로 지붕을 덮었겠지만
무척이나 높아 보이던
한쌍 까치의 둥우리는 남아 있을까
손 안 닿는 정상頂上의 가지 새에
오늘도 태연히 그냥 있을까
바람개비처럼 사계四季의 바퀴는 돌아
삐걱삐걱 굴러서 가나
위안도 없고 물소리 하나 없는
소란스런 시장 속을 흘러가며
가끔 짤막한 탄식이 터져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메마른 뇌수에 파인 생명의 샘처럼
생각 속에서만 간직되어 있는
내 소년의 동정童貞이여
시방
저 전라도 정읍 산성리의
우리 외할머니네 집
왕골과 갈대풀 냄새가 나는
그 굴뚝 밑으로 찾아가면,
겹눈이 기묘한 메밀잠자리며
날카로운 밤새의 웃음소리 들리고
보릿대 타는 연기 속에
별과 정령精靈과 그 무슨 꿈의 벌레들이 보일까
이삼만李三晩의 겨울
마침내 세 번째 벼루가 바닥났다
남몰래 쏟아놓은
무명베 자락에 적셔진 아전衙前의 울음
시퍼런 가슴 속에는
호남평야보다 너른 고요를 데불고
남의 집 채마밭에 물이나 주며 지나온
이 뼈시린 부복俯伏,
천하다는 심녀沈女의 비碑나 써주며
하늘에 뿌리박기 시작한
야윈 풍란 두어 촉 벗삼아
늘 얼어서 지내는 나날
시커멓게 엉기는 슬픔의 응어리가
마른 붓끝에
피가 되어 묻어나온다
냉수 마시는
절식切食의 외로움
그 무구無垢한 폐허 위에
벼 베어진 자리인 듯
한점 그루터기만 남는다
1993년 제5회 정지용문학상
석류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 주소서
* 이가림(본명 이계진李癸陳 1943~2015) 시인은 만주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井邑. 두 살 이후부터 전주에서 살면서
전주중앙국민학교, 전주서중학교, 전주고등학교를 다녔다.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프랑스 유학 가서 루앙대 불문학
박사 학위. 인하대 불문과 교수 역임. 부모님은 정읍 출신이다. 아버지는 정읍 고부 출신이고, 어머니는 정읍 옹동면
산성리에 학자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 후손 이용남 씨. 어머니는 권혁례 씨.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돌의 언어」 가작 입선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빙하기」 당선
1973년 첫시집 빙하기(민음사)
1981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작과 비평사)
1989 시집 슬픈 반도(예전사)
1995 시집 순간의 거울(창작과 비평사)
1998 산문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시와 시학사)
2000 시집 내마음의 협궤열차(시와 시학사)
2000 에세이집 미술과 문학의 만남(월간미술사)
2011 활판 시선집 지금, 언제나 지금(시월)
2011 시집 바람개비별(시학)
2018 유고시집 잊혀질 권리(시학)
그외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꿈꿀 권리,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 등.
(작품 교열: 강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