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富山)이 부산(釜山)으로 변한 부산에서 대마도를 간다.
동래는 옛날의 장산국萇山國이었고, 그 동래부 부산면이 개편된 것은 1914년이다. 부산이라는 이름이 기록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 초였다. “동평현 남 쪽 부산포富山浦에 있다”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고,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부산포라는 이름이 나 오는데, 당시의 ‘부’ 자는 지금의 ‘가 마 부釜’가 아니고 ‘넉넉할 부富’를 써서 부산富山이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뀐 것은 대체로 15세기경으로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 아래가 바로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으며 북쪽으로 현까지의 거리는 21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부산을 두고 “서민이 살기 좋은 고장이며, 사람들이 억세고 거칠다”라고 말한다. 부산이 오늘날 나라 안에서 제2의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876년 조선이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하고, 1925년 경상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민이 몰려와 부산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남에 따라,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고, 지금은 부산광역시로 불리고 있다.
1590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조선의 선조 임금은 김성일과 황윤길 등 조선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보내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선조는 일본의 국내 상황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지를 물었다. 서인인 황윤길은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동인인 김성일은 “신은 그와 같은 정황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동시에 일본에 다녀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처럼 서로 달랐다. 다시 선조가 “도요 토미의 관상은 어떠하던가”하고 묻자, 황윤길은 “그 눈빛이 밝게 빛나 담략과 지혜가 있는 듯 보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김성일은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전을 나오자 이조판서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이 황윤길과 많이 다른데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라고 묻자, 김성일은 “내 어찌 왜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현혹되므로 이를 풀어보려는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실록의 사관은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아뢰어서 인심이 요동쳤으나 사리에 어그러진다. 김성일은 황윤길 등이 그쪽에 도착해서 겁을 집어먹고 체통을 잃은 것을 통 분하게 여겼기 때문에 말끝마다 이처럼 서로 어긋났다. 그때에 조헌이 힘써 일본과 화의를 반대하면서 왜적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임금이 황윤길의 말은 실세한 서인이 인심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이라고 여겨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감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결국 1592년 4월 13일 오전 8시에 왜군 선발대 1만 8,700명이 대마도를 출발 하여 5시 무렵 부산포에 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은 전함 3척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어서 대적할 길이 없자 성안으로 들어와 주민들 을 안심시키고 군사와 백성을 모아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밀려든 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정발을 비롯한 무수한 백성들이 전사 하고 말았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부산 편에서
그런 역사를 지닌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린다.
네 시 반에 출발하여 부산과 대마도를 돌아보고 내일 돌아올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또 어떤 풍경들과 사람,
그리고 역사를 마주하고 돌아올 것인지,
2024년 9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