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학자 이항로 선생과 나비 천사 문복희 교수의 의미를 새기며] 정병경.
ㅡ예술의 혼을 찾아ㅡ
녹음 짙은 하절기에 접어들어 산천이 온통 푸른 빛으로 물들어있다. 물의 정원 양평길은 교통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간다. 자존심 강한 구국 인사가 잠들어있는 양평 고을을 향해 달린다. 200여년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선생은 양평이 배출한 인물이다. 조선 후기 유학자로서 남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순종8년(1808) 초시 합격 이후부터 시험에 응시하지 않는다. 뇌물과 왕의 외척 정치 간섭 등이 이유이다. 왕이 누차 관직에 임명하지만 단연코 사양한다.
75세 되는 해 고종은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임명한다. 재직 2년 만에 화서 선생은 세상과 하직한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벼슬을 싫어한 그는 달갑지 않은 관직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것이다. 새삼 천자문의 묵비사염墨悲絲染과 논어의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되새겨본다.
성리학자 화서 선생은 양평 노문리에서 태어나 후학을 양성하며 노후를 보낸다. 옛것은 살리고 새 문화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창한다. 퇴계 이황보다 율곡 이이의 기氣 주장론을 펼친 화서 선생이다. 만물이 기氣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항일 의병을 주도한 최익현崔益鉉과 홍재학洪在學,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등이 화서의 가르침을 받은 후학들이다. 화서 선생은 관직에 등용되는 면암 최익현에게 당부한다. "부단히 학문을 연마하되 가볍게 논박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마땅히 상소할 일이 있음에도 입을 꼭 다물고 국록이나 타먹는 일을 하지 말라." 면암 역시 스승의 뜻과 같은 생각이다.
면암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즈음 '도끼상소'를 올린 예가 있다. 백성이 도탄에 빠질 지경이니 대원군에게 경복궁 중수를 중단하라며 감히 상소문을 올린다. 화서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기 위해 제자들은 스승에 대한 후광을 이어받는다.
화서의 6대조까지는 경기도 고양에서 지낸다. 병자호란 이후 서종면 정배리로 이주하게 된다. 둘째 조부에게는 자녀가 없어 부친 우록헌이 대를 이어받는다. 독학으로 주자학에 대가가 된 화서 두뇌는 천재 수준이다. 화서를 추종하는 후학들이 찬탄을 금치 못한다. 도서 벽지까지 찾아와 제자가 된 학자들이 450여명에 이른다. 제자들이 배출한 후학은 수천 명에 달할 만큼 화서의 정신세계와 의지를 이어받게 된다.
화서기념관에는 그의 친필이 담긴 5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있다. 벽계마을의 풍경이 담긴 '벽원아집도'와 '화서집' 등 많은 저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후대가 잘 이어가고 있다. 화서 선생의 '고달사' 시 한 수 옮긴다.
石泉三十年석천삼십년
바위 샘 솟는 삼십년 세월에
幾來此山曲기래차산곡
이 산 골짜기 몇 번 왔던가
疊疊千古懷첩첩천고회
첩첩이 오랜 세월 돌이켜보지만
讀書常不足독서상부족
책 읽는 게 항상 부족하네.
화서 선생은 자신이 책읽기가 부족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후학을 길러내며 함께 공부가 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기본으로 항상 책을 가까이 한 인물이다.
2000년도에 건축한 벽계강당은 200여년의 고택과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를 수평 구조로 지어진 게 특징이다. 벽계라는 명칭은 벽계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부친 우록헌友鹿軒 이회장李晦章이 생존시 건축한 생가터는 하늘에 닿아있다. 고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5호로 지정되어있다.
동쪽 느티나무 아래 축대를 쌓아 제자들을 길러낸 강학의 터에는 화서의 기운이 서려있다. 제월대霽月臺는 "비 갠 하늘의 티 한 점 없는 달빛"이란 의미를 지녔다. 표지석의 시를 읽어본다. "작은 구름이라도 보내어/ 맑은 빛에 얼룩지우지 마라/ 지극히 맑고 지극히 밝은 이/ 태양과 짝하리라."
제월대에서의 풍광을 시로 읊으며 자연과 자신에 대한 의지를 담는다.
조선시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인물이 있다. 가천대 문복희 교수는 33년간 수천 명의 후학을 배출한 인물이다. 남다른 성품을 지녀 존경의 대상이다. 상대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한다. 재직 중 석ㆍ박사 30여명을 배출한 명인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업적을 이어받아 교단에서 석ㆍ박사를 배출 중이다. 시집과 문집ㆍ논문 등 18권을 펴낼 만큼 학식이 풍부하다.
이항로 선생과 문복희 교수는 유사한 성격으로서 포용력을 갖춘 리더이다. 서종면 노문리 627번지 소재 낙천대에서 명인들의 비명碑銘을 눈여겨본다. 화서 선생과 제자들의 명언을 새긴 비석이 세월을 이어가고 있다. 용문사 입구에 가면 화서를 기리는 비석을 만나게 된다.
30년 세월을 인내한 노문리 백목련 거목 옆에 문복희 교수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장삼현 교수의 배려로 이루어진 것이다. 후대로 이어지면서 전설로 남을 시비이다. 음각으로 새긴 백목련 한 소절 읽는다.
그대는/ 40대 여인의 잔잔한 눈웃음/ 차마 말하지 못한/ 시린 바람 모아서/ 처절한/ 가슴 속에서/ 차갑게 핀 지등紙燈이다. (하략)
명달리와 노문리 계곡에 문복희의 향취를 품은 백목련 싯귀가 메아리진다. 세상이 혼탁한 시기에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백의민족 정신을 담았다. 인재를 품을 줄 아는 두 명인으로부터 지혜와 겸손과 정직을 배운다.
2024.06.13.
첫댓글 화서기념관과 이항로 생가에 다녀오셨네요.
'낙천대'에 위치한 <백목련 시비> 사진도 함께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허 정병경 선생님, 변함없는 마음에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