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라노아의 한 마을. 옹기종기 모여있는 지금의 유럽과 같은 색색깔깔의 집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듯 해보였고 그 사이사이에 큰 길과 작은 골목길들은 사람들과 아이들로 차있었다. 하지만 이런 유쾌한 곳 일수록 외로운 사람이 많은 법.
마을의 밖에있는 숲에 가까이 있는 꽃이 드리워진 곳이 있었는데, 그 끝에는 벼랑이 있어서 아이들은 잘 찾아오지 않고 어른들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두렵지도 않은지 벼랑끝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었다. 순간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꽃잎이 날아오자, 그는 고개를 돌려 잠시 그 장관을 쳐다보았다.
그는 잘 빗겨진 앞머리가 있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을 잘아는 듯한 깊은 붉은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오른쪽 눈은 어떻게 되었는지 검은색의 가죽 조각으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까전 바람으로 인해 그 가죽 아래를 살짝은 엿볼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눈이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다 큰 청년이 아니라 갓 어린티를 벗어난 소년 같았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눈썹과 입술에다가 차가워 보이지만 볼수록 더 외로운 듯한 눈빛. 거기에다가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키도 크면서 몸도 잘 단련된 듯하니, 딱 여자가 좋아할 형이였다. 그의 또다른 특징은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하얀색의 긴소매 셔츠와 검은색의 긴 바지를 입고 검은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 그렇지만 더 특이한 것은 왼쪽 손등, 손바닥과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붕대가 있다는 것.
그는 꽃바람이 멈추자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보니 그는 순간 신이 다시 원망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에게는 저 하늘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그가 닿고 싶은 하늘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저 맑은 하늘을 다시 한번만 안아볼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텐데.... 그가 눈을 감고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고 있었을때 높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하는 거야 리안! 한참 찾았잖아!"
"이란."
뒤에서 다가오는 소녀의 이름은 이란, 그녀는 어께에 막 닿는 맑은 하늘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크고 반짝이는 은빛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성숙해 보인다고 하면 성숙해 보이지만 또 어린티가 나기도 했다. 올해로 16살이 된 그녀의 키는 리안의 어께를 살짝 넘어갔기 때문에 언젠가는 뛰어넘겠다는 말도 안돼는 이야기를 이란은 하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리안이 무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열심히 해보세요' 라고 하곤 했다.
이란은 벼랑에 앉아있는 리안에게 다가가기에는 조금 어려운지 조금은 주춤했지만 결국 그녀는 리안과 약 2미터가 되는 거리에 앉아 어느새 고개를 돌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란이 항상 그의 등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일단 강하다는 것. 왜 그렇게 느끼는지는 자신도 몰랐지만 그런 아우라가 그의 등에는 존재하였다. 하지만 그를 어릴때부터 봐와서 그럴까- 조금은 아슬아슬 해보였다.
어릴때의 그는 마치 그림자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 겨울의 모래사장에 목석을 찔러 넣은 것같았다. 아마 왜 이게 아슬아슬 해보일까 하고 물어본다면 나는 겨울의 바람이 너무 매서워서라고 할것이다. 인생이라는 바람 앞에서 그는 막 쓰러질 것같은 목석. 리안은 절대로 단단한 돌이 아니였다. 그렇지만 넖고 크다는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바람이 다시 한번 지나가 리안과 아란의 사이를 가르자, 그와 동시에 새 한마리가 푸른 하늘을 가로질렀다. 리안은 순간 망설였다. 그는 하늘에 살짝이지만 검은 점을 만들어준 새에게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그래도 굴하지 않는 하늘을 미워해야할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 후자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번 정한일은 끝까지 가야한다. 그러므로 그도 영원히 저 하늘에게 웃어주지 않을거다. 아름다운 모습의 괴물같으니라고. 리안은 쯧 한 소리를 내고 그런 모습의 그를 보고 아란은 말했다.
"왜 그래? 마음에 안 드는거라도 있어?"
"그런건 아니고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곳까지?"
"엄마가 밥먹으라고 불러. 오늘 맛있는 거라고!"
이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리안도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들은 꽃들을 지나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항상 즐거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아주머니들이 수다떨고, 여행자들이 길을 멈추고, 악사들이 앉아 연주하는 음악에 춤을 추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리안의 마음도 점점 더 놓이기 시작했다. 뭐, 식당 로베르레 앞에 당도하기 전에는 말이었다.
"야! 반쪽!"
식당 문옆 벽에 기대있는 몇몇 사내들 중 남색 머리카락과 비열한 흑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자가 소리쳤다. 반쪽. 그것은 분명히 리안을 겨냥한 말이었지만 리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리안이 괴씸했는지 그 사내는 바닥에 있던 한 돌을 주워 리안에게 던졌지만, 그것을 한 손으로 잡아내는 리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놀랍지 않다는 듯, 그는 또 비꼬기 시작했다.
"차라리 백플립을 하지 그랬어? 그럼 더 멋있었을 텐데."
"무슨 용건 입니까 한슨?"
"용건이라니? 나는 매번 그저 네가 이 마을에서 꺼져줘야 하는 이유를 대고 있을 뿐이잖아?"
그 순간 리안의 표정의 변화를 볼수 있었던 사람은 이란이었다. 그가 기분이 나빠질때 살짝 올라가는 눈썹을, 다른 누군가가 알아챌수 있을까? 그렇게 리안이 아무말도 없이 무표정으로 서있자 옆에 있던 이란이 튀어나왔다.
"너무해 한슨! 그런게 어디있어?"
"너무하다고? 너무한건 너야 이란. 어떻게 저 루치펠을 집안에 들일수 있지?"
루치펠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길래 한슨이 그 단어를 꺼냈을때 리안의 눈빛이 무감정에서 위협으로 변했고,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 한슨은 크게 웃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게 순수라면 또 몰라. 인간 반쪽이랑 루치펠 반쪽이라니!"
"한슨!"
"조용히 계세요 이란."
루치펠, 초인 루치펠의 아들와 딸들이자 하늘의 자손들. 그들은 청각, 시각과 후각, 그리고 육감이 뛰어난 소수 종족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개인마다 다르다. 루치펠은 육안으로 구별을 못할 만큼 인간이랑 닮았으며 또한 그들의 재능 때문에 주로 전쟁터에서 일하는 인간의 노예로 살아왔던 수치스러운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인간과 가정을 만드는 루치펠도 많았지만,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없진 않았다. 마치 여기의 한슨처럼 말이다.
"왜 그래 이란? 내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이잖아? 저놈 완전하지도 못한 주제에 감히 우리 마을에 눌러앉는 걸 보면 도저히 참지를 못하겠어. 이제 다 컸으니까 그만 좀 나가주지 그래?"
"리안! 들을 필요없어. 빨리 집에 가자!"
리안은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란을 쳐다보았다. 어리고 순수하고 이쁜 이란. 그런 이란에게는 이런 상황이 말도 안되게 답답할것이다. 그녀를 먼지 집에 보내는 것이 낳을까? 아니면 빨리 한슨을 처리하는 것이 빠를까? 왜인지 모르지만 리안은 항상 빠른 것이 좋았다. 빨리 끝나길, 빨리 도착하길, 빨리 돌아오길. 눈을 감고 리안은 결정을 내렸다. 그래 일단 이란을 돌려보내자. 그것이 바로 현명한 대안.
"이란. 먼저 돌아가도록 하세요. 나중에 따라갈테니."
"하지만 리안!"
"이란. 말 들으세요."
리안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이란은 물러났고 곧 어디론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쉰 리안은 한슨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음... 정확히 할말은 없다만 하고 싶은건 있지. 반쪽. 내가 오늘 조금 기분이 안좋아서 말이야, 조금만 맞아줘야겠어."
"......"
한슨은 과연 바보일까. 주먹을 꺼내보이는 그를 리안은 잠시동안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는 지금도 그가 약하고 여린 어린아이로 보인가 보다. 처음에 이 마을에 왔을때에도 마음에 안든다고 제일 많이 괴롭히던 사람이 한슨이었는데, 그때는 뭣도 모르고 맞았으니...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톰슨 아저씨한테 검술부터 궁술, 체술까지 전부 다 마스터해 아저씨를 뛰어넘어 버렸으니 그에게 한슨은 '누워서 떡먹기’ 라는 소리.
"이 자식이 감히 나를 무시해? 에잇!"
한슨이 리안에게 주먹을 휘두르자, 리안은 그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젖혀 그 주먹을 피했고 다음 오는 발차기를 한 손으로 잡았다. 한슨이 살짝 당황한 듯 보였을때 리안은 그 다리를 뒤로 밀었다. 그러자 아무렇게나 뒤로 굴러 벽에 부딪힌 그는 다시 일어나 리안을 공격했지만 모든 공격을 다 살짝살짝 피하는 리안이었다. 리안은 이제 끝을 내볼까 하고 한슨의 턱을 가격하고 그가 정신이 없을때를 틈타 그를 업듯이 한 팔을 잡아 공중에서 바닥으로 휙하고 내팽겨쳤다. 리안의 싸움 기술을 보고있던 사람들은 한편 대단하다 싶었고 그가 언제 저렇게 컸나 싶었다. 어떤 이들은 손벽까지 치고 있었고 한슨을 욕하기도 했다.
"이, 이 자식이!"
"거기까지!"
한슨이 일어나려고 돌바닥에 손을 짚은 순간 높고 가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고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검은색의 원피스를 입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여인이 서있었는데, 한슨은 그녀를 보고 뜨끔하였다.
"어, 어머니?"
“한슨! 네가 나이가 몇인데 리안을 괴롭히고 있니! 어제 뭐 하나 깨먹고 나서도 정신차리지 못한거보니 아직 철이 안든 모양이지? 일로와!”
“아아아아, 어, 어머니!”
이번 달에 생일을 맞은 23살 한슨씨, 싸움 한번 걸었다고 어머니에게 끌려가다. 그만큼 리안은 이 마을사람들에게 소중한걸까, 아니면 그냥 한슨이 특이한걸까.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락한건 사실이었다. 한슨의 어머니가 한슨을 끌고가 사라졌을때 이란이 리안의 곁에 와서 물었다.
“괜찮아? 이겼어?”
그 물음에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자신이 이겼다는 한 마디에 아까의 울적한 표정에서 함박웃음을 짓다니. 역시 그녀는 나이에 비해서 어린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리안은 어른스러운 그녀의 동생 이나와 톰슨 아저씨, 리리안 아주머니보다 이란이 훨씬 더 편했다. 그런데 어떨때는 어른스러운 행동도 하고… 하여간, 분명한것은 이란이 생각보다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그런 리안의 생각도 모르고 이란은 그의 손을 이끌면서 같이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