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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멘델스존은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자랐고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활약했으나 26세 때인 1835년 이후 3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의 주된 활동 무대이자 대가로서의 명성을 굳힌 곳이 라이프치히입니다.
바흐가 활동하던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지척인 곳에 시장 광장이 있습니다. 노점들이 들어서서 사람들로 붐빕니다. 이 광장을 면해 동편으로 선 고색 창연한 건물이 舊 시청입니다.
이 건물은 1556년에 세워진 것으로 르네상스식 스타일로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시청 청사라는 것이 자랑입니다. 2차 대전의 戰禍를 용케 견뎌내고 구시가지를 대표하며 서 있습니다. 지금은 市史 박물관이 되어 상업 도시로서,예술의 중심지로서 라이프치히의 榮華가 이 안에 일목요연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멘델스존 기념실이 기다립니다. 이 방은 멜델스존이 라이프치히에서 명성을 날릴 때 市에서 작업실로 제공했던 방입니다. 라이프치히 시가 멘델스존에게 바치는 예우는 예나 이제나인 것 같습니다. 영어로 녹음된 안내 장치가 설명을 해 줍니다. 피아노와 가구들이 놓인 실내는 멘델스존의 생전 그대로라고 합니다.
벽에 걸린 멘델스존의 유명한 초상화는 베를린의 화가 에드바르트 마그누스가 1846년에 그린 것입니다. 나무에 가죽을 입힌 옷 궤짝이 하나, 그가 독일 각지와 영국 등지로 여행을 할 때 다니던 것이라고 합니다.
멘델스존 기념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얼굴에 폭넓은 지식을 갖춘 높은 교양인으로서 당시 독일 음악계의 리더였던 멘델스존의 커다란 면모가 좁은 방 안에 가득 찹니다. 멘델스존이 여기 살 때 매일 일정 시간 작곡을 했고 바로 이 방에서 낳은 명작이 바로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입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차이코프스키의 것과 함께 '4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힙니다. 베토벤 것이 아담이라면 멘델스존의 것은 이브라고 평해지기도 하지요. 아름다운 여성의 곡선미 같은 선율로 시작되는 이 곡은 優美한 멜로디, 풍요한 하모니로 초기 낭만파 특유의 건강한 情操가 향기로운 음악입니다. 이런 걸작이 시청 건물의 한 부속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35세 때인 1844년 9월 완성되어 게반트하우스에서 이듬해 3월 초연되었습니다.
게반트하우스는 그 관현악단이 세계 最古의 민간 연주 단체로 유명합니다. 1743년 처음 창립될 때에는 몇 사람이 모여 연주를 하다가 차차 인원이 늘고 평판이 나게 되자 市에서 당시의 織物會館(게반트하우스)을 연주회장으로 제공했고, 그래서 악단 이름이 건물 이름을 따서 붙여졌습니다.
게반트하우스 건물은 1781년에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1789년 모차르트가 연주회를 이 곳에서 가졌고 1801년에는 베토벤이 제1교향곡을 자신의 지휘로 여기서 연주했습니다.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와 인연을 맺은 것은 1835년(26세) 바로 이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면서부터입니다.
밤의 게반트하우스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음으로서 게반트하우스는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가 연주가를 양성하기 위해 1843년 독일 최초의 음악학원을 라이프치히에 세우게 되자 라이프치히는 단연 독일 제일의 음악 도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라이프치히에서 구시청 건물이 구시가지의 중심이라면 2차 대전 후 새로 일으킨 신시가지의 중심지는 아우구스트 광장입니다. 널따란 광장 주위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자리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북쪽에 있는 것은 옛 극장 터에 1960년 새로 지은 오페라 극장입니다. 재건의 개관식 때는 라이프치히가 낳은 음악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가 공연되었습니다.
이 광장 남쪽에 新 게반트하우스가 있습니다. 3층짜리의 현대식 시멘트 건물인데 2차 대전 후에 새로 세워진 것입니다. 여기를 근거지로 한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은 지금도 세계 굴지의 악단으로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역대 지휘자 중에는 브루노 발터, 푸르트벵글러 등 쟁쟁한 이름들이 끼여 있습니다.
라이프치히 지도
게반트하우스에서 멘델스존의 작품은 바이올린 협주곡말고도 교향곡 제3번이 1842년 초연되었습니다. 또 멘델스존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을 작곡가가 죽은 후 발굴하여 자신의 지휘로 초연하였습니다. 뒷날 <G선상의 아리라>로 불리게 되는 바흐의 관현악 조곡 제3번도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연주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흐와 멘델스존 끊을 수 없는 인연인것 같습니다. 오늘날 바흐가 우리에게 살아 있는 것은 바로 멘델스존 덕택입니다. 바흐의 작품은 그가 죽고 난 뒤 거의 잊혀있었고, 그의 <마태 수난곡>을 이 곡이 초연된 지 꼭 100년 만인 1829년 20세의 멘델스존이 재발견하여 베를린에서 지휘함으로써 바흐는 재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바흐의 마지막 무대가 라이프치히였고 멘델스존의 마지막 무대 역시 라이프치히입니다.
멘델스존의 부인, 세실
게반트하우스의 건물은 달라졌지만 그 앞에 서니 멘델스존의 불변성이 오히려 실감납니다.
멘델스존은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라이프치히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살던 집은 골트슈미트 슈트라세 12번지. 그 집을 찾아가 보니 그 자리에는 가정집 아닌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초등학교 건물입니다. 건물 한쪽 끝 벽에 멘델스존이 죽은 집자리가 여기라는 銘板을 걸어 놓았습니다.
멘델스존의 천재를 현장으로 확인하자면 바이마르를 찾아가 볼 일입니다. 바이마르는 라이프치히에서 서남쪽,자동차로 달려 1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괴테와 실러가 정주하여 독일 문예의 황금기를 이룬 곳으로 유명합니다. 바이마르의 프라우엔플란 광장 가에는 괴테가 1782년 이후 50년 동안 계속 살다 죽은 집이 남아 있습니다. 기념관이 되어 있는 이 커다란 저택의 응접실 이름이 '유노의 방'입니다. 이 방에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습니다.
유노의 방
1821년 10월 7일 12세의 소년 멘델스존이 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같은 12세의 소녀 클라라(뒷날의 슈만의 아내)와 함께 72세의 老 괴테 앞에 천재를 피로하러 온 것입니다. 멘델스존은 즉흥 연주를 한 곡 하고 나서 베토벤 자필의 읽기 어려운 악보를 내보이자 막힘없이 이를 연주해 냈습니다.
이튿날은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4중주곡을 바이마르 궁정 악단 단원들과 함께 소개했습니다. 경탄한 괴테는 "테크닉 면에서는 음악의 신동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이 소년이 즉흥 연주나 初見으로 해 낸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피아노가 지금도 그 증거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입맛 상쾌한 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죽은 멘델스존은 베를린의 예루잘렘 묘지에 가족들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묘지
[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
촉촉이 적셔오는 윤기! 품위있는 낭만적 정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그의 전 작품 중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선율의 지극한 아름다움과 화려한 기교의 매력은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서도 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아담'이라고 하고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협주곡을 '이브'라고 평하듯이 남성적인 베토벤의 작품에 비해 멘델스존의 작품은 여성적인 느낌으로 닥아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남성적인 열정이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린 시절의 멘델스존
멘델스존의 이름 펠릭스(Felix)는 행운아라는 뜻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괴테와도 친분이 있었던 당대의 철학자였고, 그의 아버지는 함부르크를 비롯한 북독일 금융가를 주물렀던 대은행가였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여러나라 말을 구사하며 문학을 연구하던 교양있는 여성이었기에 멘델스존은 그야말로 환경면에서 최고의 행운아였던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아름답고 화사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멘델스존은 <바이올린협주곡 E단조>를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도 다비드를 위해 작곡했습니다. 다비드는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고있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악장이었습니다. 이 곡의 작곡에 착수한 것은 29세 때인 1838년이지만 완성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844년 9월 16일에 이루어졌습니다.
멘델스존이 그린 수채화,스위스 루체른 풍경
작곡 시간이 빠른 그에게 6년의 기간은 오래 걸린 셈입니다. 멘델스존이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할 때는 달콤한 신혼의 시절이었고, 또한 라이프치히 음악원 창설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버밍검 음악제와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지휘자로 있어서 차분하게 작곡에 전념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반트하우스에서 있었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건강이 악화되면서 2년 뒤 1847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20세기에 들어와 나치 집권시절에는 유대계 작곡가라는 이유 때문에 이 곡은 '누구의'라는 말을 없고 단지 <바이올린협주곡 E단조>라는 이름으로만 연주되었다고 합니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 동상
이 곡은 3개의 악장을 연속해서 연주토록 한 점과 작곡가 스스로 카덴자를 넣어 로맨틱한 정서가 중단되지 않고 이어지도록 한 점들이 당시로서는 대단히 특이한 시도로 주의를 모았습니다.
이 곡은 우미한 선율, 풍성한 하모니, 정결하기 짝이 없는 감성, 낭만적인 서정미가 가득차 있어 초기 낭만파 특유의 감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고결하고 격조있는 조형미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닥아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쓴이 : 블라디고(용두열 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