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회에서 섬길 때 제 자신의 신학과 신앙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익명으로 한 사람에게 여러 질문을 받았는데요. 마지막 질문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을 믿습니까?”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저는 자괴감을 받았습니다.
같은 신앙 공동체에서 설교하는 목회자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받는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제가 목회자로 바른 복음을 전하는지 의문을 가진 것이었는데요.
사도 바울도 이런 사도성에 의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부터 5절, 성경을 같이 고찰해 보겠습니다.
1절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된 것을 밝힙니다. 자신이 사도 되고 섬기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초반부터 할까요?
사도 바울 같은 대사도도 그 사도성에 대해 의심을 많이 받고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특별히 자신의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도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주님을 섬기지만 모든 사람에게 다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속에도 이단이 있고, 세상적 세계관을 가진 자도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기보다 전통과 편견 속에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에게 자신의 사도성이 어디에서 온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이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견디어 내고, 끝까지 바르게 예배하고 사역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1절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예전에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율법에 빠져 율법주의자로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핍박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 다메석에서 주님을 만난 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섬길 때, 세상에서 일할 때, 여러분의 가정을 세울 때 중요한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말과 필요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입니다. 마구 직통 계시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 둡니다. 사람들은 그런 신사도 설교자, 목회자를 따릅니다. 그런 거짓 사도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단, 사이비, 신사도 운동자들은 부흥하고, 성공합니다.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을 따르는 맹목적 신도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핍박과 박해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가운데, 주어진 사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명확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이 있었기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2절과 3절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절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된 바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바로, 모든 형제와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구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은 핍박과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관심은 바로 자기가 섬길 지체들이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는 어떤 지역이었나요?
사도행전 9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다메섹도상에서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인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 제1차 선교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A.D. 47년이며 이때 현재 터키지역인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그리고 루스드라 지역을 지나면서 넓은 의미의 갈라디아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초창기 개척한 그 교회에 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더 잘 다른 복음이 아니라 진짜 복음으로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습니다.
4절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진짜 복음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를 기뻐하시느냐 하면요. 그 자유의지가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해질 때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유 해 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유 해질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 때 모든 영역에서 자유하고 평화롭고 감사한 것입니다.
재정학교 때 깊이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빚지는 것 하나님의 뜻 아닙니다! 고로, 빚지고 살면 채무자의 노예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고로 비참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짐을 받게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우리가 유혹과 시험 속에 빠져 산다면 쾌락을 맛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영적 축복을 받지 못 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자청하는 미련한 자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적은 이익을 누리게 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고 파멸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구입할 때 포인트 적립 혹 멤버쉽 헤택을 받게 하는데 거기에 과소비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포인트와 적은 할인을 위해서 많은 것을 소비하고 낭비할 수 있습니다. 사탄도 이렇게 작은 쾌락의 단맛으로 아주 큰 영적 환희를 누리지 못 하게 합니다.
복음은요. 나를 위한 것이지만 결코 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영광을 하나님에게만 영원히 돌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간구했습니다. 5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5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왜? 우리에게 명예가 필요합니까?
왜? 많은 돈이 필요합니까?
왜? 결혼과 취업, 그리고 창업이 필요합니까?
왜? 성적을 잘 받아야 합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주님이 명예를 포기하라면
돈을 포기하라면
결혼과 취업, 창업, 스펙을 포기하라면 포기할 수 있습니까?
원하는 것은 소원하고 간구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내려놓으라고 하면, 포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네, 바울처럼 주님을 만나고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만 영원히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 받은 도전 혹 은혜는 무엇인가요?
같이 눈을 감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