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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극비란(枳棘非鸞)
탱자나무와 가시나무 덤불은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이 못 된다는 뜻으로, 인품이 고귀한 사람은 아무 곳이나 함부로 자리를 잡지 않는다는 말로, 지조와 덕이 있는 선비는 아무 벼슬이나 함부로 얻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枳 : 탱자 지(木/5)
棘 : 가시 극(木/8)
非 : 아닐 비(非/0)
鸞 : 난새 난(鳥/19)
출전 : 삼국연의(三國演義) 第2回
선거철이 지나면 작은 공적을 가지고도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부패한 권력 밑에는 권력을 쥐고 횡포를 일삼는 관리도 많아진다. 그런 경우는 권위주의 권력 시대에 더 심했으며 왕권 치하에서는 권력이 부패할수록 심했다. 구한 말 동학혁명이나 임오군란 등이 발생한 것도 그런 여유에서이며 자유당 시절에 부정부패가 심했던 것도 그런 여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시기일수록 뜻있는 사람, 지조 있는 선비, 꿈이 큰 사람은 그런 탁류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은둔의 길을 걷게 된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은둔하는 올곧은 선비들은 간웅들이 들끓는 난세에 그들과 몸과 마음을 섞지 않으려 했다.
우린 그런 지조 있는 선비들의 은둔을 두고 '탱자나무에는 봉황이 깃들지 못하는 법(枳棘叢中 非樓鸞鳳之所)이니 차라리 은둔하여 봉황의 깃털을 손상하지 않고 웅비의 기회를 찾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진나라 조정은 부패하여 십상시(十常侍)들이 황제를 농단하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틈을 타서 장각 일당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각지에서 호걸이 나타나 황건적의 토벌에 동참하였다. 유비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건달처럼 지내던 유비는 어느 날 관우와 장비를 만나 도원의 결의를 하고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가는 곳곳 승리하여 병사들이 늘어나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며 쪼잔한 이득을 구하지 않았기에 명성이 높아갔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 십상시들이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충언하는 충신들을 모함하여 죽이므로 황제의 눈과 마음을 흐리게 하여 백성의 생활이 궁핍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장수와 호걸들이 황건적 토벌에 나서 위태로운 나라에 공을 세웠음에도 십상시들은 자기들의 위세가 꺾일까 두려워 그들을 멀리하였다. 원망이 높아가자 십상시들은 호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황제에게 주청하여 일부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그것도 아주 형편없는 지방 벼슬이었다. 유비도 그중의 하나였다.
유비는 증산부(中山府)의 안희현(安喜縣) 현령이란 말직을 제수받아 그날로 부임하였다. 유비는 자기를 따르는 장병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라고 돌려보내고 관우와 장비 등 아주 가까운 사람 20명 남짓만 데리고 안희현으로 가서 업무를 보았다.
유비는 모든 일을 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조금도 사욕을 채우지 않았고,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려 주었기에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백성들이 감동하며 따랐다. 그때도 유비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 장비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잤으며 동고동락했다.
몇 달이 지나자 조정에서 전공으로 벼슬한 관리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는지를 살피기 위해 곳곳에 감찰사를 파견하였다. 유비가 있는 안희현에는 독우(督郵)라는 감찰사가 파견되었다. 유비는 모든 예를 다하여 독우를 영접했지만, 독우는 유비를 호령하면서 "유 현위, 그대는 어디 출신인고?"하면서 물었다. 유비는 "나는 한실(漢室)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으로 탁현(涿縣)에 살다가 이번 황건적의 난에 작은 전공을 이룬 탓으로 이 자리를 얻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독우는 "너는 황실을 사칭하고 거짓 전공을 부풀려 보고했으니 내가 너 같은 자들을 잡아내기 위해 왔다"며 호통을 쳤다. 유비는 독우가 왜 그러는지 몰라 쩔쩔매는데 아전이 "독우가 뇌물을 바라고 그런다"고 하자 유비는 "나는 백성들에게 추호도 거짓과 위법으로 수탈한 바가 없는데 무슨 재물이 있겠소"라며 정색을 했다.
다음날도 독우는 아전을 묶어 놓고 취조를 하며 '유비가 백성을 수탈했다고 고발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장비가 울적한 마음에 술이나 한잔하려고 말을 타려는데 50명이 넘는 노인들이 문 앞에서 통곡하고 있어 사연을 물은 즉 노인들이 "독우가 현의 아전을 핍박하여 유비 장군을 해치려 하기에 독우를 찾아가 말하려 했으나 문지기에게 매만 맞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장비는 눈을 부릅뜨고 말에서 내려 막아서는 문지기를 모두 제치고 관아 후당으로 들어가 정청에 높이 앉아 아전을 포승에 묶어 취조하고 있는 독우에게 "백성의 고혈을 짜는 이 도적놈아,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맛좀 봐라"하고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독우의 머리채를 잡고 관아 밖으로 끌고 나와 말뚝에 묶고는 버들가지를 꺾어 사정없이 때렸다. 이에 유비가 달려가 말렸으나 장비는 "형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 못된 도적놈은 때려 죽여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계속 매질을 하였다.
독우는 유비에게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였고 유비는 장비의 손을 잡고 말리는데 관우가 백성들 사이에서 비집고 나와 유비의 손을 잡으며 "형님께서는 큰 공을 세우고도 말직인 현위 한자리를 얻었으니 독우가 업신여겨 모욕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엔 '탱자나무에는 원래 봉황이 깃들지 못하는 법(枳棘叢中 非樓鸞鳳之所)'이니 이참에 독우를 죽이고 고향으로 돌아가 더 큰 꿈을 꾸는 게 나을 듯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유비는 인수(印綬)를 꺼내 독우의 목에 걸어 주며 "너는 백성을 핍박한 죄가 너무 커 죽어 마다하나 내가 너에게 인수를 돌려주고 네 목숨을 살려주고 여기를 떠나려 한다"하고는 곧바로 짐을 챙겨 수하들을 데리고 대주로 가서 대주 태수 유희에게 몸을 의탁했다. 독우가 유비의 탈출 소식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비를 체포하려 했으나 대주 태수 유희는 황실의 종친인지라 유비 일행을 집안에 안전하게 숨겨주었다.
위의 유비에 얽힌 이야기에 나오는 '탱자나무에는 원래 봉황이 깃들지 못하는 법(枳棘叢中 非樓鸞鳳之所)'란 말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자. 枳(기)는 탱자나무이고 棘(극)은 가시나무이다. 叢(총)은 총총히 모여 있는 모습이니 탱자나무 가시가 수북한 곳 즉 아주 몹쓸 것들만 무성한 곳, 매우 부패하여 사람이 살 곳이 아님을 의미한다. 란(鸞)은 봉황의 한가지 영조(靈鳥)를 뜻하는 것으로 란봉(鸞鳳)은 신령스러운 봉황 즉 신령스러움을 지닌 사람인 유비를 의미한다.
이 말은 부패한 자들이 들끓는 그곳은 봉황과 같은 신령스러운 덕망을 지닌 유비가 머물 곳이 아니니 그곳을 떠나 뒷날의 꿈을 개척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말은 뒷날 고귀한 뜻을 지닌 사람, 인품이 고귀한 사람은 아무 곳이나 함부로 자리를 잡지 않는다는 말로 전해졌다. 이를테면 지조와 덕이 있는 선비는 아무 벼슬이나 함부로 얻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된다.
세상엔 '썩은 고기엔 파리가 많이 꼬인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진리이다. 세상이 부패할수록 그 부패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무리가 넘쳐난다. 그런 나라엔 능력의 유무를 떠나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부패는 악순환되어 나라는 망하게 된다.
부패가 심한 곳엔 정의로운 사람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올곧은 실력자는 결코 아무 자리나 탐하지 않으며 십상시들이 그랬던 것처럼 간신들은 뜻있는 선비를 모함하여 배척하기 때문이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에 줄 서는 교수나 학자 등이 많은 것을 보면서 야릇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지금도 '탱자나무에는 봉황이 깃들지 못하는 법(枳棘叢中 非樓鸞鳳之所)'이란 말을 한 번쯤 새겨볼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봉황이 깃들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도 상당 부분 국민의 몫인 것 같다.
비서난봉지소(非棲鸞鳳之所)
난새와 봉새가 살곳이 못 된다는 뜻으로, 영웅호걸이 있을 곳이 못 된다는 말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고, 황건적(黃巾賊)의 토벌에 나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도 십상시(十常侍)들의 농간으로 벼슬 한자리 받지 못했다가 겨우 안희현(安喜縣) 현위(縣尉)를 제수 받았다. 유비(劉備)등 삼형제는 안희현에 도착하여 같은 탁자에서 식사하며(食則同桌),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자면서(寢則同床)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안희현에 도착한지 넉 달도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 조서를 내렸다. "군공을 세우고 관리가 된 자 중에서 공적이 잘못된 자를 걸러내라(凡有軍功為長吏者當沙汰)." 이는 십상시(환관) 무리들이 유비와 같은 정직한 사람이나 자신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는 사람을 숙청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독우(督郵; 태수의 명에 따라 관리를 감독하는 자)가 안희현에 왔다. 유비는 성곽을 나가 독우를 맞이하고 예를 다해 인사를 했으나 독우는 거만을 떨며 트집만 잡았다.
현리(縣吏)가 말했다. "독우가 위엄을 부리는 것은 뇌물을 바라고 하는 짓이 아니면 달리 이유가 없습니다(督郵入威, 無非要賄賂耳).”
유비가 하소연했다. "나는 백성과 같이하면서 추호도 백성의 것을 손대지 않았는데 무슨 재물이 있어서 그에게 준단 말인가(我與民秋毫無犯, 那得財物與他)?"
독우는 역관에서 현리(縣吏)들을 불러 닦달하면서 유비의 허물을 실토하라고 했다. 유비는 직접 가서 해명하려고 했으나 문지기에 제지만 당했다.
이때 장비가 술을 몇 사발 먹고 역관 앞을 지나다가 백성들이 통곡하는 것을 보고 물으니 노인들이 대답했다. "독우가 현리들에게 억지로 핍박하여 유공(劉公; 유비)을 해치려 하기에 우리들이 와서 모두 애써 죄가 없음을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지기가 들여보내지 않고 도리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쫓아냅니다."
장비가 대노하여 역관으로 달려 들어가 독우를 잡아채 현청 앞으로 끌고 와 매질을 해댔다. 유비가 현청 안에 있다가 밖이 소란해 이유를 물으니 장비가 독우를 끌고 와 매질을 한다고 했다. 유비가 나와 장비를 꾸짖어 매질을 멈추게 했다.
관우가 옆으로 돌아 나와 말했다. "형님이 큰 공을 많이 세우고 겨우 현위자리 하나 얻었는데, 지금 도리어 독우에게 모욕을 당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탱자나무와 가시나무 덤불은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이 못됩니다. 독우를 죽은 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달리 원대한 계책을 도모하는 좋을까 합니다(兄長建許多大功, 僅得縣尉, 今反被督郵侮辱. 吾思枳棘叢中, 非棲鸞鳳之所. 不如殺督郵, 棄官歸鄉, 別圖遠大之計)."
유비는 관인을 독우의 목에 걸고 꾸짖고서 그곳을 떠났다.
오늘날은 예전에 비해 많이 밝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패한 관리는 도처에 있다. 부패가 번지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사회다. 특히 권력을 빙자한 부패는 척결돼야 할 제일 중요한 과제다. 관우가 말한 난새와 봉새는 이상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이상이 짓밟히는 곳에 무슨 내일이 있겠는가.
목이 말라도 도둑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
목이 말라도 도둑 샘물은 마시지 않고 몸이 더워도 나쁜 나무 그늘에는 쉬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심하게 목이 말랐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면 어떤 것이든 먹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 같지만, 의리와 지조 정의의 문제로 들어가면 복잡해진다.
김삿갓과 깊은 정을 나눈 함흥 기생 가련은 결코 김삿갓을 떠나보내기 싫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래서 함흥 부윤 홍치준(洪致俊)에게 가서 김삿갓을 사또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침 사또 홍치준은 자녀를 가르칠 훈장을 찾고 있던 즈음이라 매우 설레었다. 그래서 김삿갓을 보자고 하였다. 사또의 부탁은 그렇다 치고 가련의 간곡한 부탁이었기에 김삿갓은 사또를 만나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만나고 가련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련의 곁을 아예 떠나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가련과 눈물로 이별하였다. 그리고 사또 홍치준을 찾아간 것이었다.
사또 홍치준은 김삿갓을 보자마자 김삿갓의 박학다식(博學多識)에 놀랐다. 홍치준에게는 아들이 다섯이나 있었다. 그런 홍치준이 방랑걸인 김삿갓과 만나 시문과 정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은근히 욕심이 더해졌다. 자기 아이들의 훈장으로 들어 앉히는 것만 아니라 자기의 정치 고문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래서 김삿갓이 아이의 훈장으로 자기 집에 눌러 앉아 주면 후한 수고비는 물론 나중에 관리 자리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이 그런 것을 받아들일 인물이 아니었다.
김삿갓은 홍치준의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극구 사양하였다. 그뿐 아니었다. 사또가 자기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공사의 분별도 모르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런 일에 김삿갓이 혹 할 사람이 아니었다. 김삿갓은 사또와 밤이 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시문(詩文)과 사세(時勢)를 논하다가 늦은 시각에 헤어지고 자리를 틀었다.
그러나 김삿갓의 마음은 이미 사또를 떠나 있었다. 도무지 잠이 깊이 들지 않았다. 이미 새벽이 되면 떠나기로 작정한 몸이었다. 김삿갓은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났다. 닭이 울기 직전이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떠날 채비를 차렸다. 옆에 아무도 없었다.
사또는 김삿갓이 그렇게 새벽에 말없이 훌쩍 떠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자기 방으로 건너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관아도 조용했다. 김삿갓은 마음을 가다듬고 지필묵을 꺼내 시 한 수를 써 내려갔다.
渴不飮盜泉水(갈불음도천수)
熱不息惡木陰(열불식오목음)
목이 말라도 도둑 샘물은 마시지 않고, 몸이 더워도 나쁜 나무 그늘에는 쉬지 않는다.
김삿갓은 이 시를 잘 펼쳐 방안에 두고 방문을 열고 줄행랑을 쳤다. 겨울 새벽바람은 온몸을 에일 듯이 차가웠다. 그러나 마음만은 홀가분하였다. 구속되지 않고 떠나는 자유, 그것은 방랑객만 아는 삶의 진리이며 인생의 멋이었다. 김삿갓은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홍원(洪原)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눈바람은 온몸을 때리고 있었다.
김삿갓의 위 시를 읽다 보면 유비가 말한 '기극비란(枳棘非鸞)' 즉 '탱자나무에는 봉황이 깃들지 못하는 법이다'는 고사가 떠오른다.
중국 고대의 강력한 통일 국가였던 한나라 말기 조정은 부패하여 십상시(十常侍)들이 황제를 농단하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틈을 타서 장각 일당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각지에서 호걸이 나타나 황건적의 토벌에 동참하였다.
유비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건달처럼 지내던 유비는 어느 날 관우와 장비를 만나 도원의 결의를 하고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가는 곳곳 승리하여 병사들이 늘어나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며 쪼잔한 이득을 구하지 않았기에 명성이 높아갔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 십상시들이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충언하는 충신들을 모함하여 죽이므로 황제의 눈과 마음을 흐리게 하여 백성의 생활이 궁핍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장수와 호걸들이 황건적 토벌에 나서 위태로운 나라에 공을 세웠음에도 십상시들은 자기들의 위세가 꺾일까 두려워 그들을 멀리하였다. 원망이 높아가자 십상시들은 호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황제에게 주청하여 일부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그것도 아주 형편없는 지방 벼슬이었다.
유비도 그중의 하나였다. 유비는 증산부(中山府)의 안희현(安喜縣) 현령이란 말직을 제수받아 그날로 부임하였다. 유비는 자기를 따르는 장병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라고 돌려보내고 관우와 장비 등 아주 가까운 사람 20명 남짓만 데리고 안희현으로 가서 업무를 보았다.
유비는 모든 일을 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조금도 사욕을 채우지 않았고,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려 주었기에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백성들이 감동하며 따랐다. 그때도 유비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 장비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잤으며 동고동락했다.
몇 달이 지나자 조정에서 전공으로 벼슬한 관리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는지를 살피기 위해 곳곳에 감찰사를 파견하였다. 유비가 있는 안희현에는 독우(督郵)라는 감찰사가 파견되었다. 유비는 모든 예를 다하여 독우를 영접했지만, 독우는 유비를 호령하면서 "유 현위, 그대는 어디 출신인고?"하면서 물었다. 유비는 "나는 한실(漢室)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으로 탁현(涿縣)에 살다가 이번 황건적의 난에 작은 전공을 이룬 탓으로 이 자리를 얻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독우는 "너는 황실을 사칭하고 거짓 전공을 부풀려 보고했으니 내가 너 같은 자들을 잡아내기 위해 왔다"며 호통을 쳤다. 유비는 독우가 왜 그러는지 몰라 쩔쩔매는데 아전이 '독우가 뇌물을 바라고 그런다'고 하자 유비는 "나는 백성들에게 추호도 거짓과 위법으로 수탈한 바가 없는데 무슨 재물이 있겠소"라며 정색을 했다.
다음날도 독우는 아전을 묶어 놓고 취조를 하며 '유비가 백성을 수탈했다고 고발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장비가 울적한 마음에 술이나 한잔하려고 말을 타려는데 50명이 넘는 노인들이 문 앞에서 통곡하고 있어 사연을 물은 즉 노인들이 '독우가 현의 아전을 핍박하여 유비 장군을 해치려 하기에 독우를 찾아가 말하려 했으나 문지기에게 매만 맞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장비는 눈을 부릅뜨고 말에서 내려 막아서는 문지기를 모두 제치고 관아 후당으로 들어가 정청에 높이 앉아 아전을 포승에 묶어 취조하고 있는 독우에게 "백성의 고혈을 짜는 이 도적놈아,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맛좀 봐라" 하고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독우의 머리채를 잡고 관아 밖으로 끌고 나와 말뚝에 묶고는 버들가지를 꺾어 사정없이 때렸다.
이에 유비가 달려가 말렸으나 장비는 "형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 못된 도적놈은 때려 죽여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계속 매질을 하였다.
독우는 유비에게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였고 유비는 장비의 손을 잡고 말리는데 관우가 백성들 사이에서 비집고 나와 유비의 손을 잡으며 "형님께서는 큰 공을 세우고도 말직인 현위 한자리를 얻었으니 독우가 업신여겨 모욕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엔 '탱자나무에는 원래 봉황이 깃들지 못하는 법(枳棘叢中 非樓鸞鳳之所)'이니 이참에 독우를 죽이고 고향으로 돌아가 더 큰 꿈을 꾸는 게 나을 듯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유비는 인수(印綬)를 꺼내 독우의 목에 걸어 주며 "너는 백성을 핍박한 죄가 너무 커 죽어 마다하나 내가 너에게 인수를 돌려주고 네 목숨을 살려주고 여기를 떠나려 한다"하고는 곧바로 짐을 챙겨 수하들을 데리고 대주로 가서 대주 태수 유희에게 몸을 의탁했다.
독우가 유비의 탈출 소식을 조정에 보고하여 유비를 체포하려 했으나 대주 태수 유희는 황실의 종친인지라 유비 일행을 집안에 안전하게 숨겨주었다.
세상엔 '썩은 고기엔 파리가 많이 꼬인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진리이다. 세상이 부패할수록 그 부패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무리가 넘쳐난다. 그런 나라엔 능력의 유무를 떠나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부패는 악순환되어 나라는 망하게 된다.
부패가 심한 곳엔 정의로운 사람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올곧은 실력자는 결코 아무 자리나 탐하지 않는다. 우리의 조선 말기는 부패가 만연하였으며 매관매직이 일상이 되었다. 그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가장 큰 원흉이었다.
오늘날도 한국 사회에는 올곧은 정치인들보다 자기 이익과 권력만 바라보는 정치꾼이 넘쳐나는 것 같다. 정의롭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려면 올곧은 정치인이 많아야 한다. 올곧은 정치인은 결코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김삿갓의 시 '목이 말라도 도둑 샘물은 마시지 않고, 몸이 더워도 나쁜 나무 그늘에는 쉬지 않는다(渴不飮盜泉水 熱不息惡木陰)' 이 말은 오늘날 정치인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가 새겼으면 하는 말이다.
▶️ 枳(지)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只(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枳(지)는 탱자나무, 가지에서 전(轉)하여 막다, 저지하다의 뜻이 있다. 나무로 만든 악기를 지어(枳敔), 벼슬길이 막힘을 지색(枳塞), 어린 탱자를 썰어서 말린 약재를 지실(枳實), 썰어 말린 탱자를 기각(枳殼), 금강산의 다른 이름을 지달산(枳怛山),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뜻으로 사람은 사는 곳의 환경에 따라 착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남귤북지(南橘北枳) 등에 쓰인다.
▶️ 棘(멧대추나무 극)은 회의문자로 가시가 둘이 나란히 있는 것으로 가시가 많음의 뜻이다. 그래서 棘(극)은 물고기 따위의 지느러미를 이루고 있는 단단하고 마디가 없으며 끝이 날카로운 기조(鰭條). 가시 모양으로 ①가시 ②가시나무 ③창(槍: 무기의 하나) ④멧대추나무 ⑤공경(公卿)의 자리 ⑥야위다 ⑦위급(危急)하다 ⑧벌여놓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국자로 국이나 액체 따위를 뜨는 데 쓰는 기구를 극비(棘匕), 꼭꼭 찌름 또는 그러한 모양을 극극(棘棘), 가시나무를 극목(棘木), 부모의 상을 당한 어린아이를 극아(棘兒),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게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어 둠을 극치(棘置), 가시로 살을 에는 듯 한 찬바람을 극침(棘針), 나무의 가시로 고난의 길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형극(荊棘),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있는 집의 담이나 울타리에 가시 나무를 밖으로 둘러치는 일을 가극(加棘), 가난한 사람이 옷이 없어서 밖에 나가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천극(栫棘), 죄인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을 보내고 달아나지 못하게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어 둠을 도극(島棘), 죄인을 귀양 보내서 달아나지 못하게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침을 찬극(竄棘), 귀양간 사람이 있는 집의 담이나 울타리에 가시나무를 둘러 치는 일을 천극(荐棘), 매우 무성하게 자란 가시를 몽극(蒙棘), 가시를 헤치며 벤다는 뜻으로 고생스럽게 살아 감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을 피형전극(披荊翦棘), 구리 낙타가 가시덤불 속에 묻혀 있다는 뜻으로 궁전이나 후원이 황폐함을 형용하는 말을 형극동타(荊棘銅駝) 등에 쓰인다.
▶️ 非(아닐 비, 비방할 비)는 ❶상형문자로 새의 좌우로 벌린 날개 모양으로, 나중에 배반하다, ~은 아니다 따위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非자는 '아니다'나 '그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非자를 보면 새의 양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非자의 본래 의미는 '날다'였다. 하지만 후에 새의 날개가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에서 '등지다'라는 뜻이 파생되면서 지금은 '배반하다'나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飛(날 비)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非(비)는 (1)잘못, 그름 (2)한자로 된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잘못, 아님, 그름 따위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그르다 ③나쁘다, 옳지 않다 ④등지다, 배반하다 ⑤어긋나다 ⑥벌(罰)하다 ⑦나무라다, 꾸짖다 ⑧비방(誹謗)하다 ⑨헐뜯다 ⑩아닌가, 아니한가 ⑪없다 ⑫원망(怨望)하다 ⑬숨다 ⑭거짓 ⑮허물, 잘못 ⑯사악(邪惡)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비난(非難), 옳은 이치에 어그러짐을 비리(非理),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부정의 뜻을 가진 문맥 속에서 다만 또는 오직의 뜻을 나타냄을 비단(非但),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목숨을 비명(非命), 보통이 아니고 아주 뛰어남을 비범(非凡), 법이나 도리에 어긋남을 비법(非法), 번을 설 차례가 아님을 비번(非番), 사람답지 아니한 사람을 비인(非人), 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를 비행(非行), 불편함 또는 거북함을 비편(非便), 결정하지 아니함을 비결(非決), 사람으로서의 따뜻한 정이 없음을 비정(非情),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을 이비(理非), 간사하고 나쁨을 간비(姦非), 아닌게 아니라를 막비(莫非), 그릇된 것을 뉘우침을 회비(悔非),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선비(先非), 교묘한 말과 수단으로 잘못을 얼버무리는 일을 식비(飾非), 음란하고 바르지 아니함을 음비(淫非),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님이란 뜻으로 한둘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비일비재(非一非再),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중간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을 비승비속(非僧非俗), 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상태를 일컫는 말을 비몽사몽(非夢似夢),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라는 말을 비례물시(非禮勿視), 모든 법의 실상은 있지도 없지도 아니함으로 유와 무의 중도를 일컫는 말을 비유비공(非有非空) 또는 비유비무(非有非無), 일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운수가 글러서 성공 못함을 탄식하는 말을 비전지죄(非戰之罪), 뜻밖의 재앙이나 사고 따위로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을 일컫는 말을 비명횡사(非命橫死),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도리를 일컫는 말을 비궁지절(非躬之節), 고기가 아니면 배가 부르지 않다는 뜻으로 나이가 든 노인의 쇠약해진 몸의 상태를 이르는 말을 비육불포(非肉不飽), 책잡아 나쁘게 말하여 공격함을 일컫는 말을 비난공격(非難攻擊), 비단옷을 입어야 따뜻하다는 뜻으로 노인의 쇠약해진 때를 이르는 말을 비백불난(非帛不煖),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늘 그러함을 일컫는 말을 비금비석(非今非昔),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을 일컫는 말을 비난지사(非難之事), 예가 아니면 행동으로 옮기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을 비례물동(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을 비례물언(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아야 한다는 말을 비례물청(非禮勿聽), 얼핏 보기에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 듯이 보이나 실제로는 예에 어긋나는 예의를 이르는 말을 비례지례(非禮之禮), 들어서 말할 거리가 못됨을 일컫는 말을 비소가론(非所可論), 아무런 까닭도 없이 하는 책망을 일컫는 말을 비정지책(非情之責),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이르는 말을 비조즉석(非朝卽夕), 꼭 그것이라야만 될 것이라는 말을 비차막가(非此莫可), 제 분수에 넘치는 직책을 일컫는 말을 비분지직(非分之職), 아직 일에 숙달하지 못한 직공을 일컫는 말을 비숙련공(非熟練工), 제때가 아닌 때에 먹는 것을 금한 계율을 일컫는 말을 비시식계(非時食戒), 용이 때를 만나면 못을 벗어나 하늘로 오르듯이 영웅도 때를 만나면 세상에 나와 큰 뜻을 편다는 뜻으로 비범한 인물이나 장차 대성할 사람을 이르는 말을 비지중물(非池中物), 사물을 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이를 행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말을 비지지간(非知之艱) 등에 쓰인다.
▶️ 鸞(난새 난)은 형성문자로 鵉(란)은 통자(通字), 鸾(란)은 간자(簡字), 鸞(난)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새 조(鳥; 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련, 란)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鸞(난)은 ①난새(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②방울 ③지붕의 무게를 버티도록 기둥 위에 설치한 구조,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상상의 신령스러운 새인 난새와 봉황으로 덕이 높은 군자나 부부의 인연을 이르는 말을 난봉(鸞鳳),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황과 비슷하다는 상상의 새를 난조(鸞鳥), 남을 높이어 그 아내가 사는 집을 이르는 말을 난가(鸞家), 대궐을 달리 이르는 말을 난궐(鸞闕), 화려하게 꾸민 누대를 난대(鸞臺), 난새의 무늬가 있는 옷을 늘여뜨렸다는 뜻으로 후비의 의용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을 난렴(鸞襝), 난새를 타고 하늘에 오른다는 뜻으로 후비의 죽음을 이르는 말을 난어(鸞馭), 임금이 탄 수레를 난거(鸞車), 춤을 추는 난새 또는 난새처럼 추는 춤을 무란(舞鸞), 빛깔이 붉은 난새를 적란(赤鸞)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