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어! 중요하나 신중해야 한다>
성경의 원어에 대한 설명을 문법적으로 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문법적으로만 풀어나가다보면, 때로는 논리적 모순이나 신학적 모순에 부딪힐 수 있다.
그래서 문법적, 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성경에 대한 해석을 조심스럽게 시도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성경 해석은 주님 오실 그날까지 성경에 최대한 가까운 해석이지 우리의 해석이 절대적이라고만 단정하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의 실례를 들자면, ‘그리고’라는 접속사에 대한 문법적 해석이다.
출애굽기는 70인 성경의 제목과 달리 히브리어 맛소라 성경으로 보면,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만을 가지고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연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큰 차원에서 보자면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는 모세오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서까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하지만 모세 오경이 보편적 입장이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 모두 맨 첫 구절 앞에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그런데 신명기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없다. ‘이것들’이라는 지시대명사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도 맨 첫 구절 앞에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그 이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그리고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에서도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계속 나온다.
역대상에 가서야 ‘아담’이라는 명사가 맨 앞에 나온다. 그리고 또 다시 역대하에 가면 ‘그리고’라는 접솎사가 나온다.
에스라서에도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느헤미야서에서는 ‘느헤미야의 말들’이 맨 앞에 나온다.
에스더서에서는 다시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욥기서에서는 ‘한 남자’라는 명사가 맨 앞에 나온다.
시편에 가면, 1장부터 150까지 하나의 시편으로 묶여있으면서도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각 장 각절 맨 앞에 나오지 않는다.
잠언서나 전도서, 아가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애가서에도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나오지 않는다.
에스겔서에 가서야 다시 ‘그리고’라는 접속사 다시 나온다.
다니엘서에는 ‘3년째 되는 해에’라는 전치사구가 맨 앞에 나온다.
호세아서와 요엘서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맨 앞에 나온다.
아모스서에는 ‘아모스의 말들’이 맨 앞에 나온다.
오바댜서에는 ‘오바댜서의 이상(비전/묵상)’이 맨 앞에 나온다.
그러다가 요나서에 가면 다시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맨 앞에 나온다.
하지만 다시 미가서에 가면, ‘여호와의 말씀’이 맨 앞에 나온다.
나훔서에는 ‘니느웨에 관한 신탁’이 맨 앞에 나온다.
하박국서에는 ‘그 신탁’이 맨 앞에 나온다.
스바냐서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맨 앞에 나온다.
학개서에는 ‘2년째 되는 해에’라는 전치사구가 맨 앞에 나온다.
스가랴에서는 ‘그 여덟째 달이 되는 때에’라는 전치사구가 맨 앞에 나온다.
말라기서에는 ‘여호와의 말씀의 신탁’이 맨 앞에 나온다.
보다시피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히브리어 성경들 맨 앞에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만으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서까지를 다 묶을 수 없다.
문학적 내용의 흐름상으로 볼 때,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모세오경으로 보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리고’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본다면,
창세기부터 여호수아까지 이어서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그리고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도 하나의 연속적인 것으로 묶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신명기에는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없기에 연결점이 중간에 끊어져야 하는 논리적 모순에 봉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법적 접근을 통해서 성경을 보려고 하는 시도는 분명히 가져야 하지만 ‘문법적 해석’에만 얽매여서 성경의 원어를 해석하려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경을 원어로 읽는다는 것은
단지 원어에 대한 사전적, 문법적 개념만을 풀어내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고대근동의 배경까지 총동원하여 마치 성경의 의미를 나만 더 특출나게 아는 것처럼 하려는 시도가 과연 성경에 집중하게 하는 해석학적 시도일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일차적으로 성경 66권은 그 자체에서 자증하는 내용으로써, 문학적 차원에서 문맥의 흐름을 신중히 살펴보는 것이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참고로,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히브리어 문학적 특성상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내용의 지속적이고 빠르게 전개되는 연결성’을 반영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마치 ‘의미없이 형식상으로 표현’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