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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덕지적(鄕原德之賊)
향원(鄕原)은 덕(德의 적(賊)이다는 뜻으로, 향원(鄕原)은 진정한 덕을 닦기보다는 세상의 칭찬에나 신경쓰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인을 베풀기보다는 인을 이야기해서 자신이 어찌 이익보려는 인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鄕 : 시골 향(⻏/10)
原 : 근원 원(厂/8)
德 : 덕 덕(彳/12)
之 : 갈 지(丿/3)
賊 : 도둑 적(貝/6)
출전 :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 제17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 37 -1
13. 사이비 향원(鄕原)
子曰: 鄕原, 德之賊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향원(鄕原)은 덕(德)의 적(賊)이다."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기 때문에, 번역을 하면 오히려 뜻이 손상되어 그대로 직역하였다. 역시 위선자들에 대한 공자의 혐오감이 여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주(古註/古注)에 향원의 뜻을 너무 애매하게 풀어서 그 개념을 잘못 잡는 사람들이 많다. '향(鄕)'을 '향(向)'이라고 풀어 타인의 뜻을 쫓아 해바라기처럼 향하기만 하는 인간의 뜻으로 해석하였고, '원(原)'은 '관대하다, 용서한다'는 식으로 풀었다.
그리고 신주(新註)는 '향(鄕)'을 비속(鄙俗)의 뜻이라고 하였고, '원(原)'은 '원(愿)'의 뜻으로 풀어 겉으로는 근후하고 정직한 듯이 보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우원하다. 보이는 그대로 왜 해석 못하는가?
향(鄕)이란 문자 그대로 '동네' 즉 어떠한 커뮤니티를 단위로 삼든지간에 인간공동체를 의미한다. '원(原)'이란 글자는 본래 상형자로서 갑골문에는 나오지 않으나 금문에는 보인다. 바위 밑으로 샘이 흐르는 모습이며 물의 근원, 즉 수원(水源)을 의미한다. 원시(原始), 원본(原本), 원인(原因), 근원(根源) 등의 용례가 지시하는 바대로이다.
어느 동네를 가든지, 그 동네에서 자기가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자기만이 주류이며, 자기가 다 통솔하며, 자기의 뿌리가 제일 깊으며, 자기가 예의범절을 가장 잘 알며, 모든 전통을 독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꼭 있는 것이다.
대부분 이들이야말로 그 동네의 상층부를 차지하며 변화를 거부하며 지배적 에토스를 고수하려고 하며 가장 점잖은 체는 혼자 다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덕(德)의 적(賊)이라고 외치는 공자! 이 공자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유교가 오히려 이제는 향원들의 유교가 되어버린 마당에 공자의 이러한 메시지가 진정으로 이해될 길이 있을까?
그런데 이 '향원'이라는 말은 '맹자'라는 서물을 통하여 더 유명해졌다. '진심하' 장구 제37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 장에 대한 주석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맹자가 향원에 관하여 해설한 것은 다음과 같다.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건덕지가 없이 완벽하게 보인다. 찌르려 해도 찌를 틈이 없어 보인다.
同乎流俗, 合乎汚世.
흐르는 세속에 너무도 잘 동화되고, 오염된 세상과 너무도 잘 야합한다.
居之似忠信, 行之似廉 潔, 衆皆悅之.
평상시에 사는 모습을 보면 충직하고 신험이 있는 듯이 보이며, 행동을 보아도 청렴하고 결백하게 보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기뻐 따른다.
自以爲是, 而不可與入堯舜之道.
자기 스스로 자기가 옳다고만 생각하지만 이런 자들은 도무지 요순의 도(道)에 더불어 들어갈 길이 없다.
故曰德之賊也.
그래서 공자께서 '덕의 적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무도 아이러니칼하고 적확한 지적이다. 이러한 '맹자'의 기술은 양화편과 동일한 자료를 토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양화편의 공자 말씀이 선행했기에 '맹자'의 기술이 가능했다고 보기보다는, 동시대의 패러다임 속에서 '맹자' 기술의 원본에 해당되는 것이 '양화편'으로 편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맹자' 텍스트의 권위를 높이고 그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양화편의 편자들의 의식 속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텍스트의 문제는 어찌 되었든 이 로기온은 직전제자의 전송으로부터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논어를 읽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제발 앞으로 판검사가 되고, 고급공무원이 되고, 정치인이 되고, 대기업의 지도자가 되고, 유능한 문화인이 되어도 우리 사회의 '향원(鄕原)'이 되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 37 -1
孔子曰; 過我門而不入我室, 我不憾焉者, 其惟鄉原乎. 鄉原, 德之賊也.
공자가 말하셨다. 나의 문앞을 지나며 내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내가 서운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향원뿐이다. 향원은 덕의 적이다.
鄉原, 德之賊也는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향원은 진정한 덕을 닦기보다는 세상의 칭찬에나 신경쓰는 그런 학자연하는 사람을 말한다. 인을 베풀기보다는 인을 이야기해서 자신이 어찌 이익보려는 인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시골 학자들이다.
이들이 덕의 적인 이유는 이들은 적당한 존경을 받고 있고 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진정한 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속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존중받을수록 세상은 인과 멀어지게 된다. 요즘 학자들 99퍼센트 향원들 아닐까 싶기도 하다.
향원덕지적(鄕原德之賊)
향원은 덕의 도적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남을 대하는 사람이 있다. 남이야 무슨 일을 하던,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오직 자기 일에만 관심 있는 사람도 있다. 더러는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약속을 지키는 사람에게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나 불평 없이 그저 넘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어떤 이는 착한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줏대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평가가 옳을까?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줏대가 없이 두루뭉술하여 남의 비위를 모두 맞추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착한 사람 혹은 인격자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마치 인격의 표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란 말은 무인격(無人格)의 표현이다.
동양의 성인 공자는 모든 사람을 좋아했을까?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했을까? 아니다. 공자도 싫어한 사람이 있다. 공자가 싫어한 사람 부류 중에 특히 향원(鄕原)이 있다. 공자는 향원(鄕原)을 덕(德)의 도적(盜賊)이라고까지 하며 배척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향원은 덕의 적이니라(子曰 鄕原 德之賊也 / 논어 양화편 13)."
공자가 말한 향원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이 없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 옳은 것도 그냥 지나치고 그른 것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다. 어찌 보면 그런 사람을 덕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바른 덕(德)이 아니어서 오히려 인간관계와 세상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덕(德)을 혼란하게 만들어 덕을 해치는 적이다. 따라서 향원은 덕(德)에 있어서 사이비(似而非)이므로 특히 경계하여야 한다고 했다.
향원은 사람들에게 정성스럽게 대하는 듯하나 위선이며, 더러운 풍속에 함께 하고 영합하여 세상에 아첨하므로, 스스로는 정성스러운 인격자처럼 행세하나 실제로는 덕이 없으면서 덕인의 행세를 하는 '덕을 훔친 자'라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향원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 미생고의 이야기가 있다. 공자는 "누가 미생고를 곧다고 하는가? 혹자가 식초를 빌렸거늘 그의 이웃에서 빌어다가 주었구나(子曰 孰謂微生高直고 或이 乞醯焉이어늘 乞諸 其鄕而與之여 / 논어 공야장 23)"라고 한탄했다.
어떤 사람이 집에 식초가 떨어져 이웃에 사는 미생고(微生高)라는 사람에게 식초를 빌리러 갔다. 그런데 미생고의 집에도 식초가 없었다. 그 미생고는 다시 이웃집에 가서 식초를 빌려와 그것을 빌려주었다. 사람들은 미생고의 그런 행위가 대단히 정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기 집에 없는 것을 이웃집에까지 가서 빌려다 주었으니 그 정성과 곧음이 크다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것은 정직도 정성도 아니라고 일축하였다. 자기 집에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정직이지, 이웃집에까지 가서 빌려다 주는 것은 남의 비위를 맞추고 미명(美名: 겉으로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허울 좋은 이름, 그것은 이기심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 생색을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 공자는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그를 덕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공이 공자에게 "향인이 모두 좋아하면 어떻습니까(子貢問曰 鄕人何如)?"하고 물었다. 이에 공자가 "가하지 않다(子曰 未可也)"고 대답했다. 다시 자공이 "향인이 모두 미워하면 어떻습니까(鄕人皆惡之 何如)?"하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가하지 않다. 향인의 선(善)한 자가 좋아하고 불선(不善)한 자가 미워하는 것만 못하다(不如鄕人之善者 好之 其不善者惡之니라)"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그가 선한 사람이 아니며, 싫어한다고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좋아해야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 좋아하는 자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적도 따르는 자가 있고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정치인이나 관료도 따르는 자가 있다. 대중의 지지를 많이 받는다고 그가 바른 정치인이 아니요, 오로지 의리가 있는 사람의 올바른 판단에 의한 지지를 받는 사람이 올바른 정치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 국민 90% 이상의 지지까지 얻었지만, 그는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세계를 전쟁을 수렁으로 밀어 넣은 악인이었다. 현재 국민의 80% 이상의 지지를 받는 푸틴은 잔혹한 전쟁광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못된 지도자를 다수의 대중이 지지하게 되면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셋째, 공자는 향원은 교언영색(巧言令色) 하는 자라고 했다. 공자는 "말을 교묘하게 하며 안색을 좋게 하여 공손을 지나치게 함을 좌구명이 부끄러워 하니 나 역시 부끄러워 하노라. 원망을 숨기고 그 사람과 벗함을 좌구명이 부끄러워 하니 나 또한 부끄러워 하노라(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논어 공야장 24)."
이 말은 공자가 좌구명이란 사람이 교언영색하는 자를 부끄러워 하는데 자기도 역시 부끄러워 하며 또 좌구명이 원망을 숨기고 그 사람과 벗함을 부끄러워 하는데 나 또한 부끄러워 한다는 말이다. 결국, 교언영색하는 자는 경계하여야 하며 그런 자와 어울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러한 공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향원은 결코 선비가 아니며 의로운 사람이나 선을 행하는 자도 아니다. 향원은 겉으로는 정성스러운 인격자처럼 행세하나 마음속에 이기심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며, 정직하지도 못한 사람이다. 그런 향원은 정의감과 용기가 부족하고 인격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 이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과잉 친절을 베푸는 자는 사기꾼이 많으며, 상사에 아부 잘하는 사람일수록 아랫 사람에게는 혹독한 경향이 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마치 세태를 초연한 인격처럼 드러내나 실제로는 사회 정의에 대한 인식이나 용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원리와 원칙을 어기는 사람을 눈감아 주는 것을 마치 도량이 넓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는 마음속에 무언가를 숨기거나 용기가 부족하거나 인격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공자의 말대로 인간관계의 원칙과 세상의 기강이 무너지고 결국 덕(德)이 무너지게 된다. 향원이 인격자 행세를 하나 알기가 어렵다. 향원을 지도자로 뽑는 일을 경계하여야 하나 그가 향원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세상은 참 오묘하고 혼란스럽다.
향원(鄕原)은 덕(德의 적(賊)이다
인격을 갖춘 君子와 정반대의 인물을 小人이라고 한다. 소인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우리는 그들을 멀리 할 수가 있다.
鄕原은 다르다. 향원이란 시골 사람 중에 근후한 자란 뜻인데 세속과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유독 지방 사람 사이에서 근후하다고 일컬어지는 존재를 말한다.
鄕은 鄙俗(비속)의 뜻이고 原은 삼갈 愿(원)과 같다. 陽貨 제13장에서 공자는 향원은 德이 있는 듯하지만 그 德은 진정한 德이 아니어서 참된 德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향원을 미워했다. 신조도 주견도 없는 似而非(사이비) 행동은 사람으로 하여금 眞僞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므로, 향원이야말로 德의 賊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 자로(子路)에서 공자는 '중도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을 얻어 같이 할 수 없다면 반드시 뜻이 큰 사람이나 절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뜻이 큰 사람은 나아가 取하려 하고 절조를 지키는 사람은 하지 않는 바가 있다'고 했다.
中道에 맞게 행동하는 선비가 없다고 해서 향원을 선택해서는 안 되며, 차라리 뜻이 큰 狂者(광자)나 節操(절조) 있는 견者(견자)와 함께 일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향원은 광자나 견자를 비난한다.
맹자 盡心(진심) 下에 보면 향원은 광자와 견자를 두고 '행하는 것이 어이 그리 쓸쓸하고 고독하단 말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바에는 이 세상 사람들과 살면서 사람 좋다고 인정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다고 했다.
하지만 공자는 '내 문전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르지 않아도 내가 유감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오직 향원이로다. 향원은 덕의 적이다'라 말했다고 맹자는 덧붙였다. 향원은 私만 알고 公을 모르며 통념에 순응할 뿐 진취를 모른다. 우리는 혹 향원의 실체를 못 알아보고 그를 후덕하다 여기지 않는가?
자기 성장 위해 향원(鄕原)을 분별하자
논어에는 "子曰 鄕原德之賊也(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향원이 덕의 가장 큰 도적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향원(鄕原)은 매사에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지 않고, 시속에 맞춰 두루뭉술하게 살면서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사람을 의미한다. 뚜렷한 가치관이 없고 삶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아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향원으로는 세상에 유행하는 정보를 빨리 습득해서는 짧고, 얕은 지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빠르게 설파하고 대단하다고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 공자께서 향원이 덕(德)의 가장 나쁜 적이라 말한 이유는 이들이 뚜렷한 철학이나 가치관이 없고, 논점을 회피하며 신기함과 사회적 약점만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강연이나 책, 방송을 통해 대중을 상대로 공포와 환상을 심어주며 자기의 얕은 지식을 자랑한다.
맹자도 향원에 대하여 강력히 경계한다. 그는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요소가 없이 완벽하게 보인다. 찌르려 해도 찌를 틈이 없어 보인다. 흐르는 세속에 너무도 잘 동화되고, 오염된 세상과 너무도 잘 야합한다. 평상시에 사는 모습을 보면 충직하고 신험이 있는 듯이 보이며, 행동을 보아도 청렴하고 결백하게 보인다. 모든 사람이 그를 기뻐 따른다. 자신도 스스로를 옳다고만 생각하지만 이런 자들은 도무지 요·순의 도(道)에 더불어 들어갈 길이 없다. 그래서 공자께서 '덕의 도적(賊)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럼 지금 우리 사회에 혼란을 주고 있는 도적(鄕原)들에 대해 돌아보자. 가깝게는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제시된 '4차 산업혁명'의 유행에 올라탔던 이들이 있다. 다보스포럼 이후 몇 개월 만에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책을 출판하고, 산업혁명의 전문가가 되어 전국 강연을 다닌다.
향원(鄕原)들은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게 될 것이며, 디지털기술로 인해 기존 직업이 없어지게 된다면서 사회적 공포와 기대감을 동시에 제시했었다. 정부 부처에 이를 대응하는 조직이 생겨나고,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맡게 된다.
반면 4차 산업혁명은 선언적 의미일 뿐이며, 차라리 인더스트리 4.0이나 디지털산업혁명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경제 발전에 진정 도움이 될만한 창의적 철학과 가이드를 제시했던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의 유행어와 수많은 향원들에 의해 묻혀버린다.
우리 앞에 그들이 당장 올 것처럼 자랑하던 4차 산업혁명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당시 전문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당시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던 향원들의 지금 모습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이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딱지는 떼고 지금쯤이면 아마 AI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AI분야에 책과 강연과 방송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제 일반 대중들도 향원(鄕原)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 향원들의 지식이 수백 개의 최고위 과정이나 조찬 강의, 방송 강연, SNS 동영상, 책으로 출판되었을 때 말이다. 향원들의 강의는 들을 때는 신기하지만 실천할 수는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信, 超, new, neo라는 접두어들을 붙여가며 무언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생각이나 자기 철학이 없다 보니 들을 때뿐 실천할 수가 없다. 강연이나 책을 읽고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다"라고 느꼈다면 향원의 강의였고, 그들의 책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향원들은 휘발성 지식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나 AI를 주제로 대중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가 훌륭한 융복합 전문가인지 아니면 휘발성 지식을 제공하는 향원(鄕原)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진정한 전문가들의 강의나 지식은 그들이 주장하는 생각과 말, 그들의 책 속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다양한 분야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독자들이나 청중들은 강의와 책 속에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갖게 된다.
또한 진정한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미래에 대해 교차검증을 제시한다. 교차검증은 단지 지금 시장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신기한 사례들만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생명 윤리적 가치, 역사 인문학적 근거, 철학적 알고리즘, 물리학적인 메커니즘 등을 결합하여 제시한다. 자연관, 생명관, 인생관, 사회관, 세계관, 우주관 속에서 서로의 맥락을 비교함으로써 자기 이론과 예측의 실수를 줄이는 정화과정을 밟아간다.
이제 향원(鄕原)과 진정한 미래 전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TV에 자주 보는 강사들의 강의에서 신기함과 스킬을 넘어 새로운 가치관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반도체 전문가보다는 반도체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는 이들과 가까이해야 한다.
금리나 투자전문가보다는 화폐금융 이후에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갈 새로운 자본주의를 논하고 예측하는 전문가와 가까이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 성찰이며 자기 성장이고, 자기다움의 혁신이며 향원(鄕原) 즉, 사이비(似而非)를 분별하는 지혜다.
향원(鄕原)
鄕 : 시골 향(邑/10)
原 : 근원 원(厂/8)
위선을 일삼는 자를 공자와 맹자는 향원(鄕原)이라 했다. ‘맹자’의 '盡心 下(진심 하)'에 나오는 대화다.
孔子曰, 過我門而不入我室, 我不憾焉者, 其惟鄕原乎! 鄕原, 德之賊也. 曰何如斯可謂之鄕原矣? 曰: 何以是嘐嘐也? 言不顧行, 行不顧言, 則曰, 古之人, 古之人. 行何爲踽踽凉凉? 生斯世也, 爲斯世也, 善斯可矣 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
만장이 스승인 맹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내 집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내가 섭섭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바로 향원이다! 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자를 향원이라 할 수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그런 자는 '어찌하여 이처럼 뜻이 높은가? 말은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말만 하면 옛 사람은, 옛 사람은 하고 운운하니. 또 저 고집 센 자들은 어찌하여 홀로 가면서 쓸쓸해하는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에 맞게 살 일이고, 남들이 좋다고 하면 그것으로 된다'라고 말한다. 이런 자는 속내를 숨긴 채 세상에 아첨하니, 그래서 향원이다."
향원은 본디 시골에서 인정을 살펴 그에 영합하면서 마치 군자인 듯이 행동하는 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맹자는 이 향원을 속내를 숨기고 세상에 아첨하는 자라 했다.
이런 향원이 오늘날에는 시골이나 도시 어디에나 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그동안 어디에 다들 숨어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는 시민들에게 허리를 연신 굽실거리며 표를 구걸한다.
속내는 사사로운 이익에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대의와 국가를 위한 이익, 공공의 선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으로 비치도록 소리소리 지르며 그럴듯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중은 그런 자들을 선거에서 곧잘 뽑아준다.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 37 -1
萬章問曰: 孔子在陳曰; 盍歸乎來. 吾黨之士狂簡, 進取, 不忘其初. 孔子在陳, 何思魯之狂士.
제자 만장이 물었다. "공자께서 진나라에 머물면서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나의 고향의 선비들은 미친 듯 기세높고 허술하지만 도를 향해 나아가 취하려 하고 그 초심을 잊지 않고 있네'라고 말하셨습니다. 공자께서 왜 진나라에 머물면서 노나라의 미친 듯 기세 높은 선비들을 생각했습니까?"
孟子曰: 孔子不得中道而與之, 必也狂獧乎. 狂者進取, 獧者有所不爲也. 孔子豈不欲中道哉. 不可必得, 故思其次也.
맹자가 말하였다. "공자님은 도에 적중한 사람을 얻어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경우 반드시 택하는 사람이 기세 높고 지조가 굳은 사람이다. 미친 듯 기세 높은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도를 취하려 하고 고집 세고 지조 굳은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어찌 도에 적중한 사람을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그런 사람을 반드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차선을 생각하신 것이다."
敢問何如斯可謂狂矣.
만장이 말했다. "감히 묻겠습니다. 어떠하면 그것을 미친 듯 기세 높다 말할 수 있습니까?"
曰: 如琴張 曾皙 牧皮者, 孔子之所謂狂矣.
맹자 말하였다. "금장, 증석, 목피 같으면 공자님이 기세 높다 말하실 것이다."
何以謂之狂也.
어째서 그런 사람을 미친 듯 기개높다고 말합니까?
曰: 其志嘐嘐然, 曰, 古之人, 古之人. 夷考其行而不掩焉者也.
맹자 말하였다. "그 뜻이 높은 듯해서 말마다 옛사람, 옛사람 하지만 그 행동을 살펴보면 말만 앞서고 행동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기개만 높다고 한다.
狂者又不可得, 欲得不屑不潔之士而與之, 是獧也, 是又其次也.
또 미친 듯 기개높은 사람을 얻을 수 없다면 더러움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그런 선비를 얻어 그들과 함께 하려 하셨는데 이들이 고집세고 지조굳은 자들이다. 이 사람들이 그 다음이다.
孔子曰; 過我門而不入我室, 我不憾焉者, 其惟鄉原乎. 鄉原, 德之賊也.
공자가 말하셨다. 나의 문앞을 지나며 내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내가 서운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향원뿐이다. 향원은 덕의 적이다.
鄉原, 德之賊也는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향원은 진정한 덕을 닦기보다는 세상의 칭찬에나 신경쓰는 그런 학자연하는 사람을 말한다. 인을 베풀기보다는 인을 이야기해서 자신이 어찌 이익보려는 인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시골 학자들이다.
이들이 덕의 적인 이유는 이들은 적당한 존경을 받고 있고 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진정한 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속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존중받을수록 세상은 인과 멀어지게 된다. 요즘 학자들 99퍼센트 향원들 아닐까 싶기도 하다.
▶️ 鄕(시골 향)은 ❶회의문자로 郷(향), 鄊(향)은 통자(通字), 乡(향)은 간자(簡字), 鄉(향)은 동자(同字)이다. 지금의 자형(字形)은 마을(邑; 읍)과 마을이 서로 마주하여 길이 통(通)하다의 뜻, 마을, (白+匕)의 옛 모양은 음식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이며, 본디 식사(食事)를 한다는 뜻으로는 따로 饗(향)을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鄕자는 '시골'이나 '고향'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鄕자는 매우 복잡한 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鄕자를 보면 식기를 두고 양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을 초대해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는 뜻이다. 금문에서는 심지어 음식을 건네주는 모습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鄕자는 이렇게 사람을 초대해 '잔치를 한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지만, 후에 정감이 넘치는 마을이란 뜻이 파생되면서 '고향'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소전에서는 鄕자에 食(밥 식)자를 더한 饗(잔치할 향)자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鄕(향)은 (1)고대(古代) 중국이나 신라(新羅), 고려(高麗)의 부곡(部曲)의 하나 (2)중국의 주대(周代)에 있었던 행정(行政) 상(上)의 한 구역(區域). 곧 1만 2천 500호가 있는 땅을 이름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시골, 마을 ②고향(故鄕), 태어난 곳 ③곳, 장소(場所), 지구(地區) ④행정(行政) 구역(區域)의 이름 ⑤접대(接待) ⑥향음주례(鄕飮酒禮)의 준말 ⑦메아리, 울림, 음향(音響) ⑧추세(趨勢), 경향(傾向) ⑨만약(萬若) ⑩장차(將次), 막 ⑪지난번 ⑫대접하다 ⑬향하다 ⑭치우치다, 편애하다 ⑮누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을 촌(村)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서울 경(京)이다. 용례로는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나 시름을 향수(鄕愁), 고향이나 시골의 마을을 향리(鄕里), 태어난 곳 또는 시골을 향토(鄕土), 고향에서 온 소식이나 편지를 향신(鄕信), 시골에 사는 백성을 향민(鄕民), 같은 고향 사람을 향인(鄕人), 시골의 마을을 향촌(鄕村), 시골의 선비나 유지를 향사(鄕士), 자기가 났거나 사는 시골의 마을 또는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향당(鄕黨), 시골에서 온 손님을 향객(鄕客), 시골의 구석진 곳을 향곡(鄕曲), 고향의 관문 곧 고향의 지경을 향관(鄕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을 고향(故鄕), 제 고장이 아닌 다른 고장을 타향(他鄕),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을 귀향(歸鄕), 시조의 고향을 관향(貫鄕), 나그네로 가 있는 타향을 객향(客鄕), 고향이나 향리에 있음을 재향(在鄕), 같은 고향을 동향(同鄕), 고향을 떠나감을 출향(出鄕), 자기 집이 있는 고향을 가향(家鄕), 고향을 그리고 생각함을 망향(望鄕), 서울에서 시골로 거처를 옮기거나 이사함을 낙향(落鄕), 고향을 그리며 생각함을 사향(思鄕), 고향을 그리며 생각함을 회향(懷鄕), 자기가 사는 고장을 본향(本鄕), 사람이 상상해 낸 이상적이며 완전한 곳을 이르는 말을 이상향(理想鄕),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읍양하는 절차를 지키어 술을 마시고 잔치하던 행사를 일컫는 말을 향음주례(鄕飮酒禮), 타향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나 여행 중의 몸을 일컫는 말을 이향이객(異鄕異客), 조국이나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지방을 일컫는 말을 만리타향(萬里他鄕), 어떤 고장에 가면 그곳의 풍속을 따르고 지킴을 일컫는 말을 입향순속(入鄕循俗),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온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옴을 이르는 말을 금의환향(錦衣還鄕) 등에 쓰인다.
▶️ 原(언덕 원/근원 원)은 ❶회의문자로 厡(원)이 본자(本字)이다. 민엄호(厂; 굴바위, 언덕)部와 泉(천; 물의 근원)의 합자(合字)이다. 계곡의 맑은 물이 흘러 나오는 수원(水原)의 뜻으로 나중에 들판의 뜻으로 쓰이게 되자 수원의 뜻으로는 源(원)이란 글자가 따로 만들어졌다. ❷상형문자로 原자는 '근원'이나 '근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原자는 厂(기슭 엄)자와 泉(샘 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泉자는 돌 틈 사이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모습을 한자화한 것이다. 여기에 厂자가 결합한 原자는 물길이 시작되는 곳을 뜻했다. 그러나 지금의 原자는 물길의 시작점이 아닌 '근본'이나 '사물의 시초'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후에 水(물 수)자를 더한 源(근원 원)자를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만 실제 쓰임에서는 原자와 源자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原(원)은 (1)어떠한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본디 처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언덕 ②근원(根源), 근본(根本) ③저승 ④들, 벌판 ⑤문체(文體)의 한 가지 ⑥원래 ⑦거듭, 재차 ⑧근본(根本)을 추구하다 ⑨캐묻다, 찾다 ⑩의거(依據)하다, 기초(基礎)를 두다 ⑪기인(起因)하다 ⑫용서하다, 놓아 주다 ⑬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정성스럽다 ⑭거듭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언덕 구(丘), 언덕 판(坂), 언덕 구(坵), 언덕 파(坡), 언덕 강(堈), 언덕 안(岸), 언덕 강(崗), 언덕 애(崖), 언덕 구(邱), 언덕 판(阪), 언덕 릉(陵), 언덕 고(皐), 언덕 부(阜)이다. 용례로는 어떤 일의 근본이 되는 까닭을 원인(原因), 많은 경우에 적용되는 근본 법칙을 원칙(原則), 사물이 근거하여 성립하는 근본 법칙을 원리(原理), 제조하거나 가공하는 데 바탕인 재료가 되는 거리를 원료(原料),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을 청구한 사람을 원고(原告), 상품을 완성시킬 때까지 소비한 재화나 용역을 단위에 따라 계산한 가격을 원가(原價), 유정에서 퍼낸 그대로 정제하지 않은 석유를 원유(原油), 처음이나 시초로 본디대로 여서 진화 또는 발전하지 않음을 원시(原始), 본디대로의 상태 또는 이전의 모양을 원상(原狀), 제작물의 근본이 되는 거푸집 또는 본보기를 원형(原型), 변하기 전의 본디의 모양을 원형(原形), 물의 흐름의 근원이나 사물이 일어나는 근원을 원류(原流), 직물의 원료가 되는 실을 원사(原絲), 근본이 되는 이론 또는 그것을 기술한 것을 원론(原論), 회의에 부친 최초의 의안을 원안(原案), 본디의 저작 또는 제작을 원작(原作), 글자의 본디의 음을 원음(原音), 상당히 높은 높이를 가지면서 비교적 연속된 넓은 벌판을 가진 지역을 고원(高原), 풀이 난 들을 초원(草原), 시작되는 처음을 시원(始原), 평탄한 들판 평야를 평원(平原), 눈이 뒤덮여 있는 벌판을 설원(雪原), 넓은 들의 가운데를 중원(中原), 무서운 기세로 불이 타 가는 벌판을 요원(燎原), 실수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방법을 일컫는 말을 원불실수(原不失手), 중원의 사슴이라는 뜻으로 천자의 자리 또는 천자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중원지록(中原之鹿), 작은 불씨가 퍼지면 넓은 들은 태운다는 뜻으로 작은 일이라도 처음에 그르치면 나중에 큰 일이 됨을 이르는 말을 성화요원(星火燎原),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벌판의 불길이라는 뜻으로 미처 막을 사이 없이 퍼지는 세력을 이르는 말을 요원지화(爎原之火), 일의 결말을 짓는 데 가장 가까운 원인을 일컫는 말을 결국원인(結局原因) 등에 쓰인다.
▶️ 德(큰 덕/덕 덕)은 ❶형성문자로 悳(덕)의 본자(本字), 徳(덕), 惪(덕)은 통자(通字), 㥀(덕), 恴(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悳(덕)으로 이루어졌다. 悳(덕)은 바로 보다, 옳게 보는 일이고, 두인변(彳)部는 행동을 나타내고, 心(심)은 정신적인 사항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德(덕)은 행실이 바른 일, 남이 보나 스스로 생각하나 바람직한 상태에 잘 부합하고 있는 일을 뜻한다. 본디 글자는 悳(덕)이었는데 나중에 德(덕)이 대신 쓰여졌다. ❷회의문자로 德자는 '은덕'이나 '선행'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德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直(곧을 직)자,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금문에 나온 德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德자는 사람의 '행실이 바르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直자는 곧게 바라보는 눈빛을 그린 것이고 心자는 '곧은 마음가짐'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길을 뜻하는 彳자가 있으니 德자는 '곧은 마음으로 길을 걷는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우리의 '삶'이나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니 德자는 곧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德(덕)은 (1)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이나 품성(品性) (2)도덕적(道德的) 이상(理想) 또는 법칙(法則)에 좇아 확실히 의지(意志)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人格的) 능력(能力). 의무적(義務的) 선(善) 행위를 선택(選擇), 실행(實行)하는 습관(習慣). 윤리학(倫理學) 상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임 (3)덕분 (4)어떤 유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原因) (5)공덕(功德) 등의 뜻으로 ①크다 ②(덕으로)여기다 ③(덕을)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④고맙게 생각하다 ⑤오르다, 타다 ⑥덕(德), 도덕(道德) ⑦은덕(恩德) ⑧복(福), 행복(幸福) ⑨은혜(恩惠) ⑩선행(善行) ⑪행위(行爲),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⑫능력(能力), 작용(作用) ⑬가르침 ⑭어진 이, 현자(賢者) ⑮정의(正義) ⑯목성(木星: 별의 이름) ⑰주역(周易) 건괘(乾卦)의 상,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태(太)이다. 용례로는 덕이 높고 인망이 있음을 덕망(德望),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을 덕행(德行), 덕행과 선행을 덕선(德善), 좋은 평판을 덕용(德容),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귀는 벗을 덕우(德友), 덕행으로써 교화함을 덕화(德化), 덕이 두터움을 덕후(德厚), 덕의를 갖춘 본성을 덕성(德性), 덕으로 다스림을 덕치(德治), 잘 되라고 비는 말을 덕담(德談), 남에게 미치는 은덕의 혜택을 덕택(德澤),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덕량(德量), 도리에 닿은 착한 말을 덕음(德音),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도덕(道德), 아름다운 덕성을 미덕(美德), 여러 사람을 위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한 힘을 공덕(功德), 집안을 망치는 못된 언동을 망덕(忘德), 사람이 갖춘 덕 또는 사귀어 서로 도움을 받는 복을 인덕(人德), 아름다운 덕행을 휴덕(休德), 이랬다저랬다 변하기를 잘하는 성질이나 태도를 변덕(變德), 착하고 바른 덕행을 선덕(善德), 항상 덕을 가지고 세상일을 행하면 자연스럽게 이름도 서게 됨을 이르는 말을 덕건명립(德建名立), 덕행이 높고 인망이 두터움을 일컫는 말을 덕륭망존(德隆望尊),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사람이 살아가는 데 덕이 뿌리가 되고 재물은 사소한 부분이라는 말을 덕본재말(德本財末),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 따르게 하므로 결코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德不孤),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좋은 행실은 서로 권장하라는 말을 덕업상권(德業相勸), 덕망이 높아 세상 사람의 사표가 된다는 말을 덕위인표(德爲人表),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필유린(德必有隣)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賊(도둑 적)은 ❶회의문자로 贼(적)은 간자(簡字), 戝(적)은 동자(同字)이다. 무기(武器)(戎)를 들고 재물(貝)을 훔치는 무리라는 데서 도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賊자는 '도둑'이나 '역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賊자는 貝(조개 패)자와 戎(병기 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戎자는 갑옷과 창을 함께 그린 것으로 모든 병기를 망라하는 글자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賊자를 보면 貝자와 戈(창 과)자, 人(사람 인)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재물 앞에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무력으로 재물을 강탈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賊자는 무기로 위협하며 재물을 강탈하는 '도둑'이나 '역적'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賊(적)은 ①도둑 ②도둑질 ③역적(逆賊) ④벌레의 이름(마디를 갉아먹는 해충) ⑤사악(邪惡)한 ⑥나쁜 ⑦도둑질하다 ⑧해(害)치다 ⑨학대(虐待)하다 ⑩그르치다 ⑪죽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도적 구(寇), 도둑 도(盜)이다. 용례로는 해치려는 마음 또는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마음을 적심(賊心), 도적을 경계함 또는 도적이 일어날 기미가 보임을 적경(賊警), 도둑에게 재난을 당함을 적난(賊難), 도둑을 벌하는 법률을 적률(賊律), 도둑에게 당하는 변을 적변(賊變), 도둑의 괴수를 적수(賊首), 도둑질하는 버릇을 적습(賊習), 임금이나 부모에게 거역하는 불충이나 불효한 사람을 적자(賊子), 도적이 떼를 지어 모여 있는 곳을 적둔(賊屯), 도둑으로 생기는 근심을 적환(賊患), 도둑에게서 받은 피해를 적해(賊害), 바다를 다니며 배를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는 도둑을 해적(海賊),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도둑을 마적(馬賊), 산 속에 살며 지나가는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도적을 산적(山賊),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으며 행패를 부리고 돌아 다니는 무리를 화적(火賊), 밖으로부터 자기를 해롭게 하는 도적을 외적(外賊), 무장을 하고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도둑을 비적(匪賊), 강한 도적을 강적(强賊), 흉악한 도둑을 흉적(凶賊), 큰 도둑을 거적(巨賊), 과거에 급제하려고 옳지 못한 짓을 꾀하던 사람을 과적(科賊), 주로 집권자에게 반대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도둑을 난적(亂賊), 어떤 나라나 사회 안에 있는 도둑이나 역적을 내적(內賊), 자질구레한 물건을 훔치는 도둑을 서적(鼠賊),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 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를 이르는 말을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나가고 난 후에야 문을 잠근다는 뜻으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을 적출관문(賊出關門), 역적은 백발이 되도록 오래 살 수 없다는 말을 적무백수(賊無白首),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 또는 불충한 무리를 일컫는 말을 난신적자(亂臣賊子), 간사한 신하와 불효한 자식을 일컫는 말을 간신적자(奸臣賊子), 문을 열고 도둑을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스스로 화를 불러들임을 이르는 말을 개문납적(開門納賊), 남의 시문을 표절하여 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슬갑도적(膝甲盜賊), 남의 글이나 저술을 베껴 마치 제가 지은 것처럼 써먹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문필도적(文筆盜賊),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으며 행패를 부리고 돌아 다니는 무리를 일컫는 말을 명화도적(明火盜賊)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