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사색"(Reflections on the Psalms) C.S. Lewis 저 이 종 태 옮김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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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여러 시인들이 저마다 다른 시대에 쓴 글입니다.다윗 왕 시대부터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쓰여 졌고 노래를 부르기 위한 시며 교리서와 설교가 아니므로 성경을
문학으로서 읽어야 한다.성경은 여러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에 맞게 읽어야 한다.
다른 서정시 처럼 일정한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 파격과 과장이 들어 있는 논리적 연관성
보다는 정서적 연관성을 갖는 시입니다.시편의 주된 형식적 특징은 평행법(parallelism)
이다.즉 같은 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히브리 문학의 형식으로 주님도 그 전통에
젖어 있었고 즐겨 사용 하십니다."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 7:7)시2:4 시37:6 ---
@시편이 말하는 심판 ( 시9편. 67:4. 35:23. 50편 143:2 시 7편 --- )
"심판의 날 " "진노의 날" "두려운 날" 죽음의 시간과 심판의 날에 우리를 구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심판을 기대하고 기쁜 소식으로 여기고 시인은 심판을 고대합니다.
@저주에 대하여 (시109. 69:22 -23 .시139. 시 23 --- )
최대의 저주는 시편 109편 이며 137:9 에 바벨론 사람의 아기를 잡아다 돌바닥에 메어
치는 사람 복있다 라는 유대인들의 분노는 야성적인 꾸밈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편 저자는 무지한 처벌,학살과 폭력은 오늘날 교묘한 현대 우리들 내면에도 유사하게
일어나는 야만인의 후예입니다.유대교 내면에는 강력한 교정책이 존재합니다.
레위기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 원수를 갚지말며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합니다(출 23:4--5. 잠24:17 잠 25:21 --)
생각하면 분노가 없다는 것은 전연 관심이 없는 것이고 특히 의분이 있다는 것은 좋은
증상입니다.복수심을 품는 것은 죄가 되지만 유대인들이 이교도 보다 더 저주의 말을
내 뱉음은 선과 악의 문제에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시편 시인들이 퍼붓는 최악의
악담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가까운 이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죽음 (시89:47 39:6 49:10 88:12 ---)
구약성경에서 내세에 대한 믿음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시편 번역에서 "영혼"이란
""생명"이라는 의미이며 지옥(음부.sheol)은 단순히 "죽은 이들의 땅"이란 뜻대로 모든
죽은 자들이 처한 상태를 가르치는 말입니다.그리스인의 하데스(hades)개념은 현대인
들에게 친숙한 실례로 천국도 지옥도 아닌 無(nothing)세계입니다.
자기 백성을 인도하고 계시하셨던 하나님께서 왜 내세에 관하여 가르쳐 주시지 않았을까?
이는 내세에 관한복을 빨리 믿게되면 하나님에 관한 욕구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 갈급한
영혼이 믿음의 보상인 천국,지옥 때문에 해를 끼칩니다.역사적으로 중세기 면죄부 판매 사건.
또는 오늘날 평신도들은 천국,지옥에 관하여 무지하며 중세기 처럼 이런 것들로 현혹하는
무리나 지도자들 때문이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시84:10. 9:2 .43:4. 57:8 63:1
유대교 회당은 회합과 율법책을 낭독하고 성전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가장 중요한
예배의 장소입니다. 지금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교회든 들판이든 모든 장소가 성전이 됩니다.
시인은 그의 현존을 향한 간절함,사모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9:2)수금으로 찬양(43:4) 소고,수금,비파로 노래합니다(81:1--2)손뼉치며 하나님을
외치고 하나님을 외치고(47:1)춤추고 찬양하였습니다(150:3)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몰랐던 영혼을 구속하가 위한 대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를 통해
어떤 죽음 속으로(baptized into his death)들어 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꿀보다 더 단 (시편 19. 119. 86. 138. 142 --- )
시편중 가장 훌륭한 시이자 서정시인 시편 19편에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감정을 이보다
더 잘 말해주지 못합니다. 유대인의 이웃 민족은 최악의 이교도였고 그들을 보고 자신의
율법의 "아름다움" 과 "달콤함"을 돋보이게 했다.앗시리아의 침략으로 그들도 이교도의
의식을 따르고 싶은 유혹이 있었으나 이교도 예배에 매음,남색,아기 불살라 몰록(Moloch)
에 제사등 진리가 결여된 그들을 보고 자신의 율법은 아름답고 꿀보다 단것이였습니다.
@묵인 (139:21--22.26:4 41:7 52:4 10& 102:8 31:6 50:18 141:4--6 139:21--22 --)
시인은 악을 저지르는 일뿐 아니라 다른 죄악에 대하여 엄중한 태도를 취합니다.가능한
악한 사람과 교제를 피하려는 것은 자기 의가 아니라 신중함을 위한 태도 일 뿐입니다.
선한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피하며 그들과 같이 진수성찬을 먹지않기 위하여
교제를 피한다는 시편기자의 말은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맥락입니다.묵인에 대한 경고와 긴밀한 연관성을 시인은 혀로 짓는 죄,수군 거림,남을 비방
하고 해하는 말들을 나열합니다.우물가 여인과 대화 나누고 간음 현장에 잡힌 여인을 구하고
세리와 함께 식사한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보기 입니다.사회적 불명예나 오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관심하셨던 그리스도의 태도를 볻밨아야 합니다.
@자연 (시편 36. 104:2 29:3--5 164:4 65:6 136 시 19----- )
이교도들의 창조 이야기는 종교의 핵심을 차지하지 못하나 "누가 이세상을 만들었나?."
유대교--기독교적 창조 신학은 완벽하고,시간 초월,전지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놀라운 교리이며 만드신 존재와 만들어진 존재는 별개의 존재이며 자연을 통해 신성을
벗겨 냅니다.유대인은 대다수 땅을 의존하는 농부의 나라며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다스려지고,순종하는 존재였습니다.시편 19편에서 샅샅이 파고들며 정화 시켜주는 태양을
율법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쓰여졌습니다(36편 동일) 자연의 견실성과 항구성을 즐거워
하며 노래합니다.특히 시편136편에서 창조의 이야기와 출애굽 이야기르 넘어가 두가지
모두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이요 승리였다고 노래합니다.
@찬양에 대한 한마디 (119:164 50:2330:9 88:10--15 ----)
하나님은 입법자로써 찬양을 명하셨고 유대인은 제사를 명령 받았습니다.예배를 받으시는
중에 자신의 현존을 나타내시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예배할 때
계시되었습니다.유대교에서 제사의 핵심은 소와 양을 드리는 데에 있는것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데에 있습니다.드리는 예배의 중심적 행위는 우리가 도리어
받는 쪽이란 사실입니다.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요리문답에서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두번째 의미
그리스도인이 시편을 읽을 때 저자의 본래 의도에 따라 충실하게 읽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숨겨진 의미,성육신,수난,부활,승천,구속과 같은 기독교 핵심 진리들과 관련된
"allegorical"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이런식의 해석 방법에 현대인은 불신을 갖고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책이든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그러한 방식을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누가24:25--27.사도8:27--38 마가12:10 사조행전2:27 시편 16:10 ----)
우리에게 성경은 "거룩한 책" "영감으로 된 책" 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말씀(The oracles
of God)"입니다.주님의 가르침은 논리 정연하고 똑떨어지게 체계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
지지 않았습니다.그분은 책을 쓰지 않았고 대부분 전해온 말씀이며 그 말씀도 질문에 답이며
정황도 결정된 것입니다.그분은 설교하시지 강의하지 않았고 역설과 격언과 과장과 비유와
Irony 심지어 재치있는 표현도 사용하십니다.그분 가르침이 지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학과"
처럼 정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규정되지 않는 누구보다도
알쏭달쏭한 분이며 우리 방식대로 시도하는 것은 마치 햇살을 병 속에 담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 성경 해석에 간단하며 강력한 원칙을 주셨습니다.모세 오경으로 부터 시작하여 나오는
구약 성경에 자신에 관한 모든 기록을 설명해 주셨습니다.(눅24:25--27)엠마오로 돌아가는
두제자에게 왜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않느냐?
@시편에서 두번째 의미들 (막12:35-37 시편 110 사도행전 8:27--38 시132---)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 (막12:35-37)." 로 부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은 시편 110편 그 "내 주"
즉 메시아 이신 그리스도라는 해석은 당시 누구에게나 받아들여 졌습니다.시편에서 두 주님을
만납니다 고난 당하는 인물이고(시13 시28 시55 시102) 한분은 정복하고 해방시켜 주는
왕입니다(2. 72) 그 당시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을 의인화 했고 반면 왕은 다윗의 계승자로써
장차 오실 메시아였습니다.주님은 이둘 모두를 자기와 동일시 하였습니다.우리가 알레고리적
해석에 확신을 가져도 되는 것은 첫째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르는 그 "주"는 예수 그리스도며
둘째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에서(시110:4) 그는 족보나 부모가 없으며 불쑥 나타나 "천지의 주재
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름으로 축복하고 사라집니다.아브라람보다 우월한 존재며 아론
으로 부터 시작된 유대 제사장 이전부터 "특별한 제사장직"으로 신비의(numinous)인물 입니다.
그는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왕인 그리스도와 닮았고 멜기세댁은 참으로 주님을 가리킵니다.
--- 끝 ---
2022. 6. 18 金 鍾 漢
첫댓글 성경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