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으니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성탄을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0,1-11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의 잊혀진 작은 성체 조각들
오늘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어떻게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는지의 그 방법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성당에도 많은 어르신이 교통수단이 없어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을 일일이 찾아서 모셔 오지 못하는 것이 저에게는 마음의 큰 부담이 됩니다. 지금도 그 방법은 계속 생각하고 있지만, 그분들을 직접 찾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저의 논문지도 교수였던 조르지오 마짠티는 본당 신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태리는 한 번 본당을 맡으면 굉장히 오래 있기에 신자들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압니다. 따라서 누가 미사에 안 나오면 그분은 끝까지 찾아가셨습니다. 한 번은 지붕 위에서 작업하시는 분과 이야기하기 위해 당신도 지붕 위로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성당에 나오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양이 내가 사랑하는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당에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의 얼굴을 아직 모릅니다. 그래도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들 한 사람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밥상을 엎으면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는 선물에 감사해야 부모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그분의 살과 피로 주시는 성체를 영하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제가 유학할 때 어떤 신부님이 바닥에 떨어진 성체를 구둣발로 쓱싹쓱싹 지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바로 그 땅에 떨어진 성혈 한 방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김창옥 강사가 요즘 알츠하이머 증상이 있어서 강의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본인 생각으로는 아버지에게 매일 가정 폭력에 시달린 어머니를 구하지 않고 외면했던 어린 시절의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부모에게 완벽히 감사하지 못할 때 자녀에게 그 영향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만큼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녀도 그 정도로 세심하게 사랑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아주 작은 것까지 감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언제나 부모를 기쁘게 해 주려는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나에게 해 준 모든 조각도 다 감사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에게 준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부모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한 조각, 떨어지는 가루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작은 영혼들이 그분의 성체의 한 조각임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한 만큼 보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주는 선물인 성체와 성혈의 조각들을 사랑하지 못하면 주인의 마음에 무감각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저는 백포도주보다 붉은 포도주를 미사에 사용합니다. 한 방울도 씻겨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노력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랑으로 성장하기를 청해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계속 반복되면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변화를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변하는 일은 없다고 단정 짓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직장 동료 중에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착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딴생각을 품고 힘들게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고, 사랑을 실천하자고 매일 마음 먹으면서도 점점 미워하는 자기 모습에 우울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싫은 이유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불안과 미숙함을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성하고 성찰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면 먼저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는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그 자체에 큰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변화된 나와 다르게 보이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이야기를 하십니다. 양 백 마리중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게 되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내가 싫어하는 사람 한 명이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은 정말로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즉, 그 수는 늘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자기 무리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잘 되었다. 그런 사람은 없어져야 해.”
이것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내가 변하고, 너가 변하고, 우리가 모두 변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얼마나 잘 맞는가 보다 다른 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이다(톨스토이).
사진설명: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