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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량어모자(莫良於眸子)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뜻으로, 눈동자는 능히 그 악함을 감추지 못하며,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도 밝고, 마음이 바르지 아니하면 눈동자가 흐릿하다는 말이다. 즉 그 사람의 말과 눈동자는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莫 : 없을 막(艹/7)
良 : 어질 량(艮/1)
於 : 어조사 어(方/4)
眸 : 눈동자 모(目/6)
子 : 아들 자(子/0)
출전 :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 15
孟子 離婁上 15
孟子曰(맹자왈) :
存乎人者(존호인자)
莫良於眸子(막량어모자)
眸子不能掩其惡(모자불능엄기악)
맹자 말하기를(孟子曰) 사람에게(乎人) 존재하는(存) 것(者)으로 눈동자(眸子) 보다(於) 선량함(良)이 없다(莫) 눈동자(眸子)는 그 악(其惡)을 숨김(掩)이 불가능하다(不能).
胸中正(흉중정)
則眸子瞭焉(즉모자료언)
胸中不正(흉중부정)
則眸子眊焉(즉모자모언)
가슴 속(胸中)이 바르(正)면(則) 눈동자(眸子)가 밝(瞭)다(焉) 가슴속(胸中)이 바르지 않으면(不正) 즉(則) 눈동자(眸子)가 흐리(眊)다(焉).
聽其言也(청기언야)
觀其眸子(관기모자)
人焉廋哉(인언수재)
그 말(其言)을 듣(聽)고(也) 그 눈동자(其眸子)를 보(觀)면 사람(人)이 어찌(焉) 숨기(廋)겠는가(哉)
맹자 말하기를,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 눈동자보다 더 선량한 것이 없다. 눈동자는 악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 역시 밝다.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그 눈동자를 본다면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눈동자는 마음의 거울이다
맹자가 줄곧 주장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관련이 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눈동자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맹자가 믿고 있다. 자신의 악함이 마음속에 있다면 자신의 눈에 드러나므로 당당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눈을 가늘게 뜨거나 시선을 회피하는 대신 마음 속에 악을 없애고 의로움을 쌓아 다른 사람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 볼 수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거리낌 없이 볼 수도 있는 상태로 갈 수 있도록 수양하는 것을 바로 호연지기를 기르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호연지기는 의로움을 하나하나 모아 가득 차면 생긴다고 맹자가 말했다.
의로움이 모여 생겨난 것으로 의로움이 갑자기 엄습했을 때 그것을 취한 것이 아니다(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 맹자직역 31 공손추상 -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눈동자를 들여 보아도 숨길 것이 없어 떳떳한 그런 기운이 천지간에 가득 찰 때 그런 기운을 호연지기라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눈동자를 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대체로 눈동자부터 바뀐다. 또 화가 나면 눈동자에 분노가 서리고 기쁜 일이 생기면 눈동자에 화색이 돈다. 거짓을 말할 때는 상대방을 똑바로 보기 어려우며 확신에 차지 않은 말을 하는 경우 상대방을 강하게 주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눈은 내면의 거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눈동자를 함부로 쳐다보기 어렵다. 만약 다른 사람의 눈동자를 함부로 쳐다보다간 온갖 오해를 받기도 한다. 각종 시험에서 면접을 볼 때 그동안은 대면 면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대면 면접이 사적인 감정이 작용한다고 하여 비대면 면접을 권장하고 확대하는 추세에도 있다. 과연 그 비대면 면접은 옳은 것일까?
일찍이 맹자는 사람에게 보존되어 있는 것 중에서 눈동자만큼 좋은 것은 없다(孟子曰 存乎人者 莫良於眸子)고 하면서 눈동자는 그의 모든 기운을 대변하며 그의 모든 것을 알게 한다고 했다.
맹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동자는 그 사람의 악(惡)을 절대로 은폐하지 못한다(眸子不能掩其惡). 가슴속이 바르면(胸中正) 눈동자가 밝고(則眸子瞭焉), 가슴 속이 바르지 못하면(胸中不正) 눈동자가 흐리다(則眸子眊焉)고 했다. (맹자 이루 상)
위에서 양(良)은 좋은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사람의 장기 중에서 사람을 알기에 가장 좋은 것이란 의미이다. 모자(眸子)는 눈동자를 말하며, 료(瞭)는 밝음을, 모(眊)는 무엇인가가 가려 밝지 못한 모양을 뜻한다. 따라서 마음이 선하고 정직하면 눈동자가 밝고, 거짓이 있거나 분노가 차면 그것이 구름이 해를 가리듯 눈동자를 가려 밝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聽其言也), 그 사람의 눈동자를 관찰하면(觀其眸子) 사람들이 자신을 숨길 수 없다(人焉廋哉)고 했다. (맹자 이루 상) 즉 그 사람의 말과 눈동자는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맹자의 이 말은 틀린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세계적인 얼굴 연구자인 대니얼 맥닐 역시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배어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 얼굴을 진정으로 잘 살펴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진실과 음모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사람의 거짓말을 분별해내지 못한다. 알아도 증명할 길이 묘연하다'고 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을 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국가에서 그분보다 사랑이나 미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없으리.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면 마음을 훤히 알 수 있는 것을"이라고 헤이스팅스는 리처드 3세를 두고서 말한다. 이것은 문학상에 나오는 가장 순진한 대사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헤이스팅스가 그 말을 하고 나서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리처드 왕이 그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속임수는 하나의 집착처럼 셰익스피어를 사로잡았다. 속임수는 '오셀로', '리어왕'을 낳았고, '리처드 3세'에 깊이 배어 들었으며, '햄릿'을 단단히 지탱했고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낭만적 희극속에서 춤을 추었다. (대니얼 맥닐 저, 안정희 역, '얼굴' 385 쪽)
사람들은 많은 경우 눈맞춤으로 그의 거짓말을 찾아낼 수 있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은 묘연하다. 인간 세상에는 욕망의 그늘에 속임수가 춤을 추고 사람들은 그 속임수를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에 속임수와 속임수를 밝히기 위한 추적은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흥미를 유발한다.
눈동자를 보고 그의 거짓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심증적인 일이지 과학적인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나 사이코패스(Psychopath)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양심을 속이고 거짓을 말한다면 상대방을 똑바로 주시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맹자는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눈동자에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대면 면접은 그 사람을 얼마나 편견 없이 평가할 수 있을까? 공자가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 했듯이, 셰익스피어가 '신은 너의 내면을 보지만 사람은 너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겉을 보고 말한다'고 했듯이 사람이 외모와 얼굴, 눈동자에 풍기는 모습은 상당 부분 그의 내면을 알려주는 소중한 정보가 아닐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눈동자와 얼굴을 보고 평가하는 사람 자체가 얼마나 밝고 맑은 눈을 가졌는가일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의 눈은 일말의 편견과 아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린 맹자의 위의 말, 막량어모자(莫良於眸子) 즉 '눈동자는 마음의 거울이다'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린 이 말을 '마음을 늘 밝고 맑게 가지려 노력하여야 한다'는 자기 수양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마음이 바르고 맑지 못하거나 사악하면 그 모든 것은 눈동자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자도 사람의 기심(欺心: 거짓된 마음)은 얼굴로 드러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기의 마음에 거짓이 깃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길인 듯하다.
그런데 요즈음 많은 정치인들이 눈 하나 까닥 않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를 어찌하랴. 국민이 그것을 간파할 줄 알아야 그래도 좀 더 나은 지도자를 뽑을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맹자의 막량어모자(莫良於眸子), '눈동자는 마음의 거울이다'란 말을 믿는다.
눈을 바로 뜨고 제대로 보라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 눈을 보면 그 사람 마음이 드러난다는 의미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있을 땐 눈빛이 흔들리거나 시선을 피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눈동자가 왼쪽을 향할 때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고, 오른쪽을 향할 때는 미래를 상상하는 중이라는 이론도 있다. 행동으로 보이는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눈을 통해 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본인 의사를 표현할 때 말보다는 비언어적인 방법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고 한다. 연인들이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고 서로 눈만 보고 있어도 마냥 행복한 것이 이런 연유에서다.
요즘도 여러 분야에서 많이 차용되는 이론이지만 이 말의 원작자는 맹자다. '맹자 이루상'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 가운데 눈동자를 살펴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存乎人者 莫良於眸子). 눈동자는 그 사람이 지닌 악한 마음을 가리지 못한다.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 눈동자를 관찰하면 사람이 어떻게 자기 마음을 숨기겠는가?"
눈빛을 보면 그 사람이 지닌 마음이 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눈동자를 관찰하고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사람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눈은 진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기 눈은 믿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을 순 없으며 눈앞에서 직접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맹신해서는 안된다. 진시황의 숨겨진 아버지라는 소문이 있는 여불위가 천하의 뛰어난 인물들 이야기를 모아서 편찬한 '여씨춘추'에 실린 고사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13년간 천하를 주유할 때 일이다. 그 와중에 공자는 수많은 위험에 처하기도 했는데,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포위돼 며칠을 쌀 한톨 구경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굶주림에 지쳐 잠깐 잠이 든 공자가 구수한 냄새에 눈을 떴는데, 수제자 안연이 쌀을 구해 와서 밥을 하고 있었다. 공자가 흐린 눈으로 보니 안연이 시루 속에 손을 넣어 밥을 집어 먹고 있었다.
공자는 안연이 배고픔을 못 이겨 몰래 밥을 훔쳐 먹는 결례를 저지른 것으로 오해를 하고 '그 밥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먼저 드리자'며 안연을 떠봤다. 그러자 안연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안됩니다. 아까 티끌 하나가 시루 속에 들어가 제가 티끌을 걷어낸 밥을 먹었습니다. 이미 부정을 탔으니 제사상에 올릴 수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안연은 공자가 가장 사랑한 수제자고 심지어 공자는 '안연이 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자는 순간적으로 본 한 장면 때문에 안연을 오해했다. 공자와 같은 성인도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돼 실수를 했던 것이다.
공자는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믿는 것은 오직 눈이지만 눈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의지할 것은 마음이지만 마음도 믿기에 부족하다. 부디 명심할진대 사람을 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이런 고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안목이 얼마나 보잘것 없고 신뢰할 수 없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분명히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내 귀로 들은 사실조차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분명히 본 것,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가진 관점만 갖고 세상을 본다면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마흔이 되며 '세상의 유혹에 미혹되지 않는다(四十而不惑)'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공자 역시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믿을 때 미혹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눈으로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말을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겉만 볼 것이 아니라 내면속 진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가장 중대한 선택을 한다. 보여주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더욱 정확히 보기 위해 눈을 똑바로 떠야 할 것이다.
눈동자는 자기의 악(惡)을 가리워 내지 못한다
명심보감엔 '심불부인 면무참색(心不負人 面無慙色)'이라고 '마음이 남에게 짐지우지 않았으면 (남을 저버리지 않았으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남을 저버린다'는 것은 누군가를 대할 때 표리와 대의명분이 한결같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의 얼굴에는 비록 행동으로는 아직 배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이미 배신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드러난다고 한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 (마음을 살필 수 있는 것으로는)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눈동자는 자기의 악(惡)을 가리워내지 못한다. 가슴 속의 마음이 바르면 눈동자는 밝고 가슴 속의 마음이 바르지 아니하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눈동자를 관찰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숨기겠는가?"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한 자는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검소한 자는 남의 것을 빼앗지 아니한다. 남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빼앗는 임금은 오직 (사람들이 자기에게) 순종하지 아니할까 두려워하니, 어떻게 공손함과 검소함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공손함과 검소함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공손한 사람은 자기의 양심을 잘 받들어 행하는 사람인데, 양심은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마음이므로 공손한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아니한다. 그리고 검소한 사람은 물질적인 욕구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므로 남의 것을 빼앗지 아니한다.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의 것을 빼앗는 임금은,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빼앗긴 백성들의 반발을 무마하여 자리를 유지하기에도 급급하므로 공손함과 검소함을 실천할 수가 없다.
백성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공손함과 검소함을 실천하는 것인데 그것은 양심을 따르는 것이므로, 양심을 회복하지 않고, 성급하게 부드러운 음성과 웃는 얼굴모양을 꾸미는 것만으로써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 눈동자를 살피면서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공순한 자는 다른 사람을 업신이 여기지 않으면서 검소한 자는 다른 사람 것을 뺏지 아니한다. 다른 사람을 업신이 여기면서 다른 사람 것을 뺏는 임금은 오직 순종하지 않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 눈동자보다 좋은 것은 없다하니 눈동자는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반짝반짝하고 가슴속이 바르지 못한 즉 눈동자가 흐리멍텅하니 눈이 마음을 표현한다고 한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우리들은 보통 그 사람이 거짓말 하는지 아닌지 눈을 보고 판단을 한다. 아이들도 눈동자를 보면 거짓말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지금 여러분도 눈동자를 보면 졸린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공부하러 오고 싶어 진짜로 온 건지 막걸리 먹으러 온 건지 알 수 있다.
다산(茶山)은 "마음가짐이 순정(純正)한 자는 그 눈동자가 차분하고 살아 있어 흑백이 분명하나, 물욕에 사로잡힌 자는 덜렁대어 차분하지 못하고, 정신이 내면에서 자리 잡아 지키지 못하며, 바라보는 것에 청정(淸淨)한 의사가 없다. 요모(療眊)의 의미는 말 밖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눈이 밝고 어두운 것만 가지고서 구별한다면, 이루와 공수가 복자하 좌구명보다 나을 것이다. 선유가 모습을 가지고 말한 것은, 배우는 이로 하여금 말 밖에서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고 하셨다.
다산은 "마음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밝고 마음속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리다"고 한 말에 있어서, 밝고 흐리다는 모습을 가지고 말한 것이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들에게 말 그 자체보다 말 밖에 그 뜻이 있음을 찾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 눈동자 말고 얼굴빛은 어떨까? 얼굴에 나타나는 부끄러운 빛의 원인이 남을 저버린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 아닐까. 약속과 책임과 믿음 그런 모든 것들이 알게 모르게 얼굴빛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약속을 잊고 있다든가, 책임을 까먹고 있다 보면 그 영향 돌고 돌아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그것이 얼굴색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나 말, 생각이 있으면 얼굴을 바로 들 수가 없다. 스스로 죄책감에 얼굴도 붉어지고, 굳어지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남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가짐은 참 좋은 것 같다. 작은 고마움도 잊지 말고 부모 친지의 은혜도 늘 생각하고 맡은바 제각각 열심히 애쓰시는 분들의 노고도 생각해가면서 살아야겠다.
그런데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눈동자처럼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보통은 얼굴빛이 변한다. 톨스토이가 '양심은 다 속여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을 보고, 사람을 보고 부끄러울 일이 없는 삶으로, 늘 밝고 당당한 얼굴빛을 갖고 살아야겠다.
발자크(Honoré de Balzac)가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듯이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도 한다. 오늘은 제 얼굴을 보면서 반구저기(反求諸己: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해봐야 하겠다.
공손함과 검소함을 가진 눈동자를 생각해 본다. 정현(鄭玄)은 "'格'은 '올 래(來)' 자와 같고 '物'은 '일 사(事)' 자와 같다고 하여 지식이 선에 깊으면 선한 일이 따라오게 되고, 그 지식이 악에 깊으면 악한 일이 따라오게 된다.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일이 따라오게 된다"고 하였다.
대저 공부란 참되게 알고 실천함을 귀하게 여긴다. 논어에 말하지 않았던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서이다'라고. 또 '말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다. 우리가 이를 하나도 절실하게 체득 관찰하지 못하고 한갓 인의(仁義)를 말하며 앉아 있다가, 만약 하루 아침에 말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행동이 말과 다르게 되면 세상을 속여 명예를 도둑질함이 어떠하겠는가? -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나의 마음의 눈동자가 나침반의 바늘처럼 사안에 따라 바르기 위해 흔들리더라도 늘 바른 선택을 하도록 맹자와 톨스토이, 발자크, 정현 그리고 사미헌 장복추의 말을 들어 반구저기(反求諸己: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해 본다.
▶️ 莫(없을 막, 저물 모, 덮을 멱)은 ❶회의문자로 暮(모)와 동자(同字)이다. 삼림(森林) 혹은 초원(草原)에 해가 지는 모양을 나타내고 해질녘의 뜻이다. 나중에 음(音) 빌어 없다, 말다의 뜻(無, 毋)으로 전용(專用)되고 해질녘의 뜻으로는 暮(모)자를 만들었다. ❷회의문자로 莫자는 '없다'나 '저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莫자는 茻(잡풀 우거질 망)자와 日(해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莫자를 보면 풀숲 사이로 해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날이 저물었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해서에서는 아래에 있던 艹(풀 초)자가 大(큰 대)자로 바뀌게 되어 지금의 莫자가 되었다. 그러니 莫자에 쓰인 大자는 艹자가 잘못 바뀐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莫자는 이렇게 날이 저물은 것을 표현한 글자지만 지금은 주로 '없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해가 사라졌다는 뜻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여기에 다시 日자를 더한 暮(저물 모)자가 '저물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莫(막, 모, 멱)은 ①없다 ②말다, ~하지 말라 ③불가하다 ④꾀하다(=謨) ⑤편안하다, 안정되다 ⑥조용하다 ⑦드넓다 ⑧아득하다 ⑨막(=膜) ⑩장막(帳幕)(=幕) 그리고 ⓐ저물다(모) ⓑ날이 어둡다(모) ⓒ나물(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따위. 이것을 양념하여 무친 음식)(모) 그리고 ⓓ덮다(멱) ⓔ봉하다(열지 못하게 꼭 붙이거나 싸서 막다)(멱)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몹시 크거나 많음을 막대(莫大), 힘이 더 할 수 없이 셈을 막강(莫强), 매우 중요함을 막중(莫重), ~만 같은 것이 없음을 막여(莫如), 또는 막약(莫若), 벗으로서 뜻이 맞아 허물없이 친함을 막역(莫逆), 매우 심함이나 더할 나위 없음을 막심(莫甚), 매우 심함을 막급(莫及), 가장 좋음을 막상(莫上), 아닌게 아니라를 막비(莫非), 깊은 밤이나 이슥한 밤을 막야(莫夜), 몹시 엄함을 막엄(莫嚴), 말을 그만둠이나 하던 일을 그만둠을 막설(莫說), 더할 수 없이 매우 강함을 막강(莫強), 황폐하여 쓸쓸함을 삭막(索莫), 고요하고 쓸쓸함을 적막(適莫),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막무가내(莫無可奈), 마음이 맞아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는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친밀한 벗을 일컫는 말을 막역지우(莫逆之友), 어느 것이 위고 아래인지 분간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막상막하(莫上莫下),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막가내하(莫可奈何), 막역한 벗의 사이를 일컫는 말을 막역지간(莫逆之間), 동서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막지동서(莫知東西), 자식을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음을 일컫는 말을 막여교자(莫如敎子), 어느 누구도 감히 어찌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막감수하(莫敢誰何), 모든 것이 다 운수에 달려 있음을 이르는 말을 막비명야(莫非命也), 인적이 없어 적막하도록 깊고 높은 산을 일컫는 말을 막막궁산(莫莫窮山), 두려워서 할 말을 감히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막감개구(莫敢開口), 더할 수 없이 매우 강한 나라를 일컫는 말을 막강지국(莫強之國),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막불감동(莫不感動), 아주 허물없는 사귐을 일컫는 말을 막역지교(莫逆之交),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중요한 곳을 이르는 말을 막중지지(莫重之地), 피할 곳 없는 도적을 쫓지 말라는 뜻으로 궁지에 몰린 적을 모질게 다루면 해를 입기 쉬우니 지나치게 다그치지 말라는 말을 궁구막추(窮寇莫追),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가는 사람은 붙잡지 말라는 말을 거자막추(去者莫追), 남의 활을 당겨 쏘지 말라는 뜻으로 무익한 일은 하지 말라는 말 또는 자기가 닦은 것을 지켜 딴 데 마음 쓰지 말 것을 이르는 말을 타궁막만(他弓莫輓),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 일이 그릇된 뒤에는 후회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비유한 말을 서제막급(噬臍莫及), 아무리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음이나 일이 잘못된 뒤라 아무리 뉘우쳐도 어찌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후회막급(後悔莫及) 등에 쓰인다.
▶️ 良(어질 량/양)은 ❶상형문자로 곡류 중에서 특히 좋은 것만을 골라 내기 위한 기구의 상형으로 좋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良자는 '어질다'나 '좋다', '훌륭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良자는 艮(그칠 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아무 관계가 없다. 良자의 갑골문을 보면 지붕이 있는 복도인 회랑(回廊)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회랑은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를 말한다. 갑골문에는 이렇게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와 중심부가 표현되어 있었다. 그래서 良자의 본래 의미는 '회랑'이었다. 그러나 후에 良자가 '좋다'나 '아름답다', '어질다'와 같은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廊(복도 랑)자가 '회랑'이나 '복도'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良(량/양)은 ①어질다 ②좋다 ③훌륭하다 ④아름답다 ⑤착하다 ⑥곧다 ⑦길(吉)하다 ⑧잠깐 ⑨잠시(暫時) ⑩진실(眞實)로 ⑪참으로 ⑫남편(男便)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질 인(仁)이다. 용례로는 선악을 판단하는 뛰어난 식견과 훌륭한 판단력을 양식(良識),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르고 착한 마음을 양심(良心), 내용이 좋고 유익한 책을 양서(良書), 성적이나 성질이나 품질 따위가 주로 질적인 면에서 대단히 좋음을 양호(良好), 사람으로서의 좋은 바탕 또는 물품 따위의 좋은 질을 양질(良質), 어질고 착한 성질로 어떤 병이 낫기 쉬운 상태 또는 그 성질을 양성(良性), 좋은 약을 양약(良藥), 어진 재상을 양상(良相),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양신(良臣), 좋은 버릇을 양습(良習), 질이 좋은 화폐로 실제의 값이나 조건이 법정 값이나 조건과 차이가 적은 화폐를 양화(良貨), 사람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지능이나 타고난 지혜를 양지(良知), 선량한 백성을 양민(良民), 착한 사람이나 선량한 백성을 양인(良人), 좋은 때라는 뜻의 양시(良時), 나쁜 점을 고쳐 좋게 함을 개량(改良), 행실이나 성질 따위가 나쁨을 불량(不良), 뛰어나게 좋음을 우량(優良), 착하고 어짐을 선량(善良), 아름답고 착함을 가량(佳良), 뛰어난 인물을 뽑음 또는 선출된 인물을 선량(選良), 순진하고 선량함을 순량(純良), 어진 이와 착한 이 또는 어질고 착함을 현량(賢良),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을 양약고구(良藥苦口),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은 훌륭한 임금을 가려 섬김을 이르는 말을 양금택목(良禽擇木), 지아비에게는 좋은 아내이면서 자녀에게는 현명한 어머니를 두고 이르는 말을 양처현모(良妻賢母), 훌륭한 장인은 애쓴다는 뜻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가슴 속에는 고심이 많다는 말을 양공고심(良工苦心), 좋은 옥과 아름다운 금이라는 뜻으로 아주 좋은 문장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양옥미금(良玉美金),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도 알고 배우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사물을 알고 행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을 양지양능(良知良能),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으로 봄 경치를 이르는 말을 양신미경(良辰美景), 아름답고 좋은 풍속을 일컫는 말을 미풍양속(美風良俗), 어진 어머니이면서 또한 착한 아내를 일컫는 말을 현모양처(賢母良妻), 순수한 금과 좋은 옥이라는 뜻으로 인격이나 문장이 아름답고 깨끗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정금양옥(精金良玉),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도 아직 양심은 남아 있음 곧 바르게 인도할 여지가 있음을 뜻하는 말을 상유양심(尙有良心), 남자는 재능을 닦고 어진 것을 본받아야 함을 이르는 말을 남효재량(男效才良) 등에 쓰인다.
▶️ 於(어조사 어, 탄식할 오)는 ❶상형문자로 扵(어)의 본자(本字), 于(어)는 간자(簡字)이고, 烏(까마귀 오)의 옛 글자의 약자이다. 까마귀의 모양을 본떠, 음을 빌어 감탄사, 관계, 비교를 나타내는 어조사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於자는 '~에'나 '~에서'와 같은 어조사로 쓰이는 글자이다. 於자는 方(모 방)자와 仒(구결자 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仒자는 한문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 용도로 쓰이는 글자로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게다가 於자는 方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於자의 금문을 보면 烏(까마귀 오)자에 仒자가 결합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於자는 본래 까마귀가 내는 소리에 빗대어 '아아'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는 얼마 쓰이지 않은 채 지금은 다양한 '어조사'로만 쓰이고 있다. 烏자는 해서에서부터 方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於(어)는 (1)한문 투의 문장에서 장소를 표시하는 말이 얹히어에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조사(~에, ~에서) ②기대다, 의지하다 ③따르다 ④가다 ⑤있다, 존재하다 그리고 ⓐ탄식하다(오) ⓑ아아(감탄사)(오) ⓒ까마귀(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까마귀 오(烏)이다. 용례로는 이제야 또는 여기에 있어라는 어시호(於是乎), 마음속 또는 주로 ∼에 꼴로 쓰이는 어심(於心), 벌써나 어느새는 어언(於焉), 가운데가 되는 정도라는 어중(於中), 바둑판에서 배꼽점을 중심으로 한 부분을 어복(於腹), 거의 중간쯤 되는 데를 일컫는 말을 어중간(於中間), 부인이 예장할 때 머리에 얹는 다리로 만든 커다란 머리를 일컫는 말을 어유미(於由味),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뜻으로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말하기에 따라 사뭇 달라짐을 일컫는 말을 어이아이(於異阿異),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어쨌든을 일컫는 말을 어차어피(於此於彼),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는 동안에를 일컫는 말을 어사지간(於斯之間), 썩 흡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량족의(於良足矣), 자기 분수에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분족의(於分足矣), 온갖 일을 일컫는 말을 어천만사(於千萬事), 그때를 한창으로 함을 이르는 말을 어사위성(於斯爲盛), 그것으로 만족함을 일컫는 말을 어사족의(於斯足矣),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느덧을 일컫는 말을 어언지간(於焉之間), 푸른 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하는 말을 청출어람(靑出於藍),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라는 뜻으로 약한 자가 강한 자들 사이에 끼여 괴로움을 받음을 이르는 말을 간어제초(間於齊楚), 가마솥 속에서 논다는 뜻으로 생명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어부중(游於釜中),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러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람은 최고의 선에 도달하여 그 상태를 유지함을 이상으로 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지어지선(止於至善), 즐거움은 언제나 걱정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을 낙생어우(樂生於憂), 뭍에서 배를 민다는 뜻으로 고집으로 무리하게 밀고 나가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추주어륙(推舟於陸), 혀가 칼보다 날카롭다는 뜻으로 논봉의 날카로움을 이르는 말을 설망어검(舌芒於劍), 백성은 신의가 있을 때에 안정된다는 뜻으로 백성은 신의에 의해서만 잘 다스려진다는 말을 민보어신(民保於信), 먼저 곽외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말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선시어외(先始於隗), 스스로 목매어 도랑에 익사한다는 뜻으로 개죽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경어구독(經於溝瀆) 등에 쓰인다.
▶️ 眸(눈동자 모)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눈 목(目=罒; 눈,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牟(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眸(모)는 ①눈동자 ②눈(감각 기관) ③자세히 보다 ④침범(侵犯)하다 ⑤무릅쓰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눈동자 정(睛), 눈동자 동(瞳)이다. 용례로는 눈동자를 이르는 말을 모자(眸子), 눈동자를 이르는 말을 정모(睛眸), 한눈에 바라봄 또는 한 번 봄을 일모(一眸), 밝은 눈동자나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로 미인을 형용하는 말을 명모(明眸), 술에 취한 눈을 취모(醉眸), 맑은 눈동자와 흰 이라는 뜻으로 미인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명모호치(明眸皓齒) 등에 쓰인다.
▶️ 子(아들 자)는 ❶상형문자로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子자는 '아들'이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子자는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양팔과 머리만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子자가 '아이'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남자아이'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자식'이나 '사람', '당신'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子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아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子(자)는 (1)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2)신문(新聞), 잡지(雜誌) 따위 간행물(刊行物)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記者)가 자칭(自稱)할 때 쓰는 말 (3)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4)자방(子方) (5)자시(子時) (6)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7)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8)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9)공자(孔子)의 높임말 (10)성도(聖道)를 전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11)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①아들 ②자식(子息) ③첫째 지지(地支) ④남자(男子) ⑤사람 ⑥당신(當身) ⑦경칭(敬稱) ⑧스승 ⑨열매 ⑩이자(利子) ⑪작위(爵位)의 이름 ⑫접미사(接尾辭) ⑬어조사(語助辭) ⑭번식하다 ⑮양자로 삼다 ⑯어리다 ⑰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 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일컫는 말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를 이르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