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저 한머루는 김희선의 독립투사 김학규장군 손녀 사칭의혹의 초창기부터 집요하게 사실확인에 매달려 왔습니다. 그건 저의 이름으로 글을 검색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김희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였지만 결정적 증거는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실증주의의 무덤이 아닌 과거와의 끝없는 대화라는 말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고 무언가 반드시 나타나리라고 믿었습니다. 드디어 오늘 월간조선의 보도로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여기 조선일보 보도와 백파자서전의 내용과 김희선자신의 해명을 비교해보시면 여러분도 김희선이 무엇을 거짓말하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백파자서전의 내용> 나는 지금으로부터 50년전(年前), 즉(卽) 1900년(年) 11월(月) 24일(日)에 한국(韓國) 서북부(西北部) 해안(海岸) 일평원지대(一平原地帶)인 어떠한 농촌(農村)에서 출생(出生)하였다. 내가 생장(生長)한 촌락(村落)-평안남도(平安南道) 평원군(平原郡) 서해면(西海面) 사산리(蛇山里)-는 비록 그 범위(範圍)가 크지는 못하나 아침에 산(山)으로 기어오르는 선명(鮮明)한 조양(朝陽)과 저녁에 해변(海邊) 지평선(地平線)으로 떨어지는 낙조(落照)가 심(甚)히 아름답게 보이는 미려(美麗)한 한 개(個)의 농촌(農村)이었다.
나는 당년(當年)으로 50세(歲)의 늙은 아버지와 35세의 젊으신 어머니 몸에서 태어났으며 4남(男) 2녀(女)의 동생(同生) 중(中)에서 4째 막내동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職業)은 의사(醫師)였고 가정(家庭) 형편(形便)은 중산계급(中産階級)에 속(屬) 하였다. 내가 5세(歲)가 되던 해에 불행(不幸)히도 아버지는 불쌍한 우리 6남매(男妹)를 남겨 놓고 사망(死亡)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집 호주(戶主)는 당년(當年) 20세(歲)밖에 안되는 나의 장형(長兄)으로 바뀌게 되었다. 가세(家勢)는 빈한(貧寒)하여졌다.
<김희선의 해명> 제 증조부는 평남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 100번지에 사는 의성 김씨 김순옥이다. 김순옥은 선우순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남 김성범과 차남 김학규를 두었다. 장남 김성범은 저의 조부이고, 차남 김학규는 저의 작은 조부로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내신 분이다.
제 증조모 선우순은 남편 김순옥이 일찍 사망하자 두 아들을 데리고 같은 동네 안동 김씨와 재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안동 김씨는 사망한 본처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고 있었다. 당시 제 조부인 김성범은 친부(親父)인 의성 김씨 호적에 이미 올려져 있었지만, 작은 조부인 김학규는 어려서 미처 의성 김씨 호적에 올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안동 김씨는 김학규를 안동 김씨의 넷째 아들로 호적에 올렸고, 이에 김성범과 김학규는 친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본관이 서로 다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의 보도> 하지만 1936년 발간된 ´의성김씨 태천공파´ 파보(派譜)와 1992년 제작된 ´의성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김성범(김희선 의원의 할아버지)의 아버지인 김순옥은 1897년 사망했다. 이때 김성범의 나이는 15세였고, 1900년생인 김학규 장군은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김학규 장군의 호적과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 장군은 ´의성김씨´ 김순옥이 사망한 지 3년 후에 ´안동 김씨´ 김기섭씨와 재가한 선우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와 관련, 김학규 장군의 큰 며느리인 전봉애씨는 "시아버님(김학규 장군)은 안동김씨"라며 "김 의원의 증조할머니인 선우순 할머니가, 희선이 할아버지인 김성범을 데리고 의사인 안동김씨 김기섭한테 시집가서 김학규 장군을 낳았다"고 말했다.
<한머루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습니다> 김성범은 1886년생이고 아버지인 의성김씨 김순옥이 1897년 죽자 선우순은 의사인 안동김씨 김기섭에게 재가합니다. 1900년에 김학규장군이 태어납니다. 여기서 김희선의 거짓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1897년 죽은 김순옥은 도저히 1900년 생 김학규장군의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즉, 김성범과 김학규장군은 남입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전봉애의 회고와 김희선의 해명에도 차이는 있습니다. 즉, 전봉애는 선우순이 김기섭에 시집가서 김학규를 낳았다고 하지만 김희선은 선우순이 김순옥에게서 김성범과 김학규를 낳고 3남 2녀가 있는 김기섭에게 재가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김학규장군은 자서전에서 아버지인 김기섭이 죽자 4남 2녀의 동생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김희선의 결정적인 거짓말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즉, 김희선의 말대로 김성범과 김학규를 낳고 3남 2녀 안동 김씨에게로 재가했다면 백파자서전에서는 5남 2녀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백파는 자서전에서 4남 2녀라고 했습니다. 선우순이 2남을 데리고 3남 2녀의 김기섭에 시집갔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김학규장군이 1900년생이고 1904년 경에 김기섭이 죽었으므로 재가 후 3남 2녀를 낳았다는 전봉애의 말도 문제가 있습니다. 1897년 김순옥이 죽고 바로 재가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그렇다 해도 7년 간 3남 2녀를 쏟아놓는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선우순은 이미 2남 2녀가 있는 김기섭에게 재가하여 김학규를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백파자서전의 4남 2녀 중 네째 막내라는 말과 일치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김성범과 김학규장군은 같은 어머니의 씨다른 형제라는 조선일보의 보도는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학규장군의 나머지 형제 2남 2녀를 감안하면 아직도 의문은 남습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있는가? 그러니 한마디로 분명한 것은 김희선의 할아버지 김성범과 김희선이 할아버지로 팔아 먹는 김학규장군은 씨가 다른 남(타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김희선이 독립투사 김학규장군의 손녀라고 하여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이익을 얻은 행위는 명백한 사기입니다.
첫댓글 인간 말종 족보도 속여가며 하긴 옛닐에도 돈번 상놈들이 상놈 면해 볼려고 족보를 샀다고 하드만 저년은 친일 면할려고 독립군 족보 도용하나?
김학규 장군의 남은 형제의 근황은? 김학규 장군은 왜 본처를 버렸을까? 김일진은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네요. 김희선과 김일진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아시는 분 댓글 부탁합니다.
김학규장군이 백파자서전에서 남은 형제와 본처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복잡했던 가족사때문인 걸로 판단됩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김일진이 백파자서전의 탈락된 가족사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저장해 놓지 않은 게 후회됩니다.
본래 3남2녀 + 1명(김성범) 대리고 시집 가면----->4남2녀---->여기서 김학규장군 탄생---->그럼 5남2녀인데[7남매]....................백파 자서전에서는 4남2녀 결국[6남매]를 남겼다.
김희선주장-->본래 3남2녀--->두아들 데리고 시집가다--->5남2녀[7명]
그럼 김성범을 놔두고 그냥 혼자 시집을 가서 김학규장군을 낳아서 3남2녀가 4남2녀로???[6남매].......... 애[김성범]를 데리고 시집간게 아니고 놔두고 혼자 간건가?.....................
답은 이것입니다. 안동김씨나 의성김씨둘다 자기가문의 자식을 주고 받지는 않습니다.그래서 김성범은 의성김씨에 그대로 둔것이고 김학규장군은 안동김씨와 재가한후 낳은것이 확실합니다.특히 두가문으로 봐서 정확한 호적정리입니다.그래서 재가를 했으나 김성범은 그대로 의성김씨에 두고 같은동네라 같이 산것입니다.
제임스 배 님의 말씀이 정확합니다. 김희선의 친할아버지 김성범과 할아버지로 팔아 먹는 독립투사 김학규장군은 한국인의 씨족개념으로는 분명하게 남(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