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업실이다.
주로 학교에서 작업을 하는 안규철님에게,
가나에서 제공한 평창동 Atelier는 사무실에 가깝다.
많아야 세장의 사진을 만드는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우라를 이끌어내는 곳으로는,
분명히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기에 사진가의 돌출행동이 이어졌다.
그 돌출행동으로 편집장과 안규철님은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나비효과'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왕코르 왓으로 도망가 버린 당신의 나무말이다.
'그 남자의 가방'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던
설치조각가 안규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철학하는 예술가란 그의 닉네임은
소개를 일삼는 어느 누군가의 나무일뿐이다.
안규철은 글 잘 쓰기로 유명한 몇 안 되는 예술가이다.
계간미술의 기자이기도 했던 그의 이력을 들추는 이들도 있지만,
그의 글쓰기는 일상에서 출발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그의 생각의 단계는 엄청난 폭풍을 이끌어 낸다.
어떤 것들은 그냥 상상으로,
혹은 상상을 이어가기 위한 소모품으로,
다음단계의 상상이 완성되면 곧 잊어버리는 소모품말이다.
어떤 것은 일상에서의 용감으로,
일부는 '그 남자의 가방'에 안착하기도 했으며
그중에 몇 개는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아래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작품과 언어와의 상관관계나 상승효과를
잘 알고 있는 예술가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그의 상상을 거짓없이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시각적인 예술작품이 언어로 완전히 설명되고 대체될 수 있다면
그것이 왜 미술작품으로서 존립해야 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로는 덮이지 않는 어떤 고유의 부분이 있음으로써
미술작품은 존립의 근거를 갖게 될 것이다.
안규철의 그 남자의 가방중에서...'
시각적인 예술작품이 언어로 설명되는 것은
예술작품 스스로도 허락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선행하여 존재하였던 언어 또한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그것이 성립된다고 가정한다면,
예술작품의 존재가치는 둘째치고 언어 또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진, 글 최항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