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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흉노족과 한민족
비익조 추천 0 조회 1,161 13.06.23 10:5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흉노족 과 한민족  
http://blog.chosun.com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단일민족'으로 반만년 역사를 지켜왔다"

...고 말도 않되는 소리를 정치적 목적으로 떠들어 대던 과거 정권에서 골치아픈 문제를 당면한다. 그것은 신라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최초의 한반도 통일 정권으로서 신라는 단일민족 개념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민족의 정권이어야 했다. 가뜩이나 신라의 지리적 근거지였던 경상도 지역에서 배출된 대통령들이 정권을 잡았던 시절이니 신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은 길게보아 현 정권에 대한 의문 제기와도 같이 취급?다. 헌데 문제가 좀 있었다. 신라의 정통성을 강조하기에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권은 결심했다. 밝혀진 모든 사실을 다 역사 교과서에 적을 필요는 없을 거라고, 쉽게 말하자면, 적긴 적되 가장 중요한 설명은 빼자고. 이런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역사론으로 역사 교과서를 집필한 결과 현재 초,중,고의 역사책에서 신라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이 정권이 한 민족이 세운 정권이라는 점에 추호의 의심도 들지 않는다. 대신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화랑들의 삼국 통일 과정을 읽으면서 우린 자랑스런 선조를 둔 것에 감사한다.

(한반도 삼국 초기 세력도)

신라에 대해 배울때 우린 이런 것들을 배웠다. 찬란한 문화유산으로로 통칭되는 고대 신라의 유물들에는 천마총에서 쏟아져 나온 금관, 금팔찌, 금 가슴장식, 금 귀고리, 금 허리띠, 칼, 마구등이 있고 경주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와 역시 많은 금제 유물, 유리병, 유리 구슬 그리고 그 유명한 적석목곽분등이 있다. 이 모든 신라 유물들이 당시 한반도 문화권을 감안했을 땐 '듣보잡'인 낯설고 엉뚱한 유물들이란걸 아는가 ?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빠진 설명만 모아서 역사를 재 구성해봤다.

(신라 금관, 금으로 왕관을 만들고 사슴뿔을 형상화 한 점이 무척 이질적이다)

위의 신라 유물들은 고대 한반도를 구성하고 있던 전통적 토착민인 한족(백제, 신라)이나 고구려, 백제의 지배계급이었던 예맥족인 부여족 유물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천마총의 천마도는 기린보다는 듣도 보도못한 유니콘에 가까운 형상이고, 금관을 장식하고 있던 사슴뿔 모양역시 한반도에선 낯선 물건이었다. 옥을 숭배했던 당시 한반도 토착 문화에 견주어 금으로 만든 장식품들이나 유리병, 유리 구슬, 적석목곽분들은 당시 중앙 아시아를 지배했던 흉노족 문화와 100% 일치한다. 심지어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볼수 있는 기마상 뒤 말 안장에 매달린 솥은 흉노족 문화권에서만 볼수 있던 독특한 유물이었다.

(신라의 기마인물형토기, 기마상뒤 솥은 말을 달리다 즉석에서 식사를 만들어 먹던 당시

북방 기마민족(훈족-몽골)의 특징으로 훈족 문화권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흉노족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진, 한과 대립했던 기마민족으로 몽골반점이 특징인 아시아계 유목민이었다. 그런 그들의 문화가 신라 지배계급의 무덤에서 그리고 신라 영토 여기 저기서 노다지로 발견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그렇다. 과거 정권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사실은 '신라는 흉노족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흉노족의 세력권, 당시 아시아 최강 진나라, 한나라등도 공주를 바치고 공물을 보낼 정도로

중국을 능가하는 힘을 과시했다)

신라 법흥왕을 기준으로 그 전까지 사용되던 순수 신라말 '내물 마립간'대신 갑자기 '김'씨성이 왕위를 차지하고 왕권을 세습하기 시작한다. 고구려, 백제에는 없던 카스트제도(진골, 성골)가 생겨 지배계층과 피 지배계층을 나누더니 급기야 자신은 과거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였던 투후의 7대손이라고 문무왕과 그의 동생 김인문은 묘비에서 노골적으로 밝힌다. 이 모든 것이 신라의 지배계급은 흉노족이었음을 의미하고 지금껏 꿀먹은 벙어리로 살아온 역사학계는 이 사실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 나무가 썩으면 자연스럽게 그 위에 쌓인 돌무지가 무너져서 도굴을

막던 시스템으로 역시 훈족의 매장 풍습이었다)

여기에 보너스로 골치 아픈 사실들이 더 발견된다. 신라의 피 지배 계층이었던 대다수의 남부인(가야, 신라)에게서 남방계 유물들이 나온다. 벼농사 용어는 인도어와 유사하며 신라 4대왕 석탈해와 김수로왕과 결혼한 허황후를 인도인으로 추정할만한 증거들이 발굴된다. 이쯤되면 신라 지배계급은 흉노족과 남방계인들로 구성된 다민족 연립 정부였던 셈이다. 실제로 3국 통일후 백제인들은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주하고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중국에 흡수되어 현재 한국인이라 불리는 우리는 신라인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즉, 강원도,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할 것없이 우린 말타고 개 장수하던 훈족과 비가 오면 더 가관인 곱슬머리의 나라, 인도의 피와 토착민의 피가 짬봉된 다민족 국가의 후손들인것이다. 곱슬머리에 몽골반점이 있었다는 김씨성을 가진 친구를 주위에서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의 80%가 북방계 인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20%가 남방계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유전적 분석 결과는 위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3-4세기 중국의 5호 16국 시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가 아직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지 못했던 시기 중앙 아시아의 흉노족의 일파가 북쪽 변경을 뚫고 신라로 남하해서 현지 토착 정권을 정복하고 흉노 정권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왕씨 '김'은 흉노족이 숭상했던 금을 의미하고 그들 인종의 유래인 '알타이'와 같은 의미이다.

기마민족답게 키가 컸던 흉노족은 유달리 왜소한 일본인(당시에 일본은 없었다)들을같은 의미로 '왜'라고 불렀고 왕권을 장악한 그들만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골품제도를 만들어내고 김씨 왕권을 세습했던 것이다. 위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흉노족이 왕권을 잡은 신라가 대다수 토착민인 한족을 바탕으로 했던 나라였으므로 흉노족의 나라가 아니라고 한다면, 소수 부여족이 정권을 잡았던 고구려는 그 논리상 우리 역사속에서 지워야 한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자면 흉노족이든 돌궐족이든 부여족이든 우리 모두 마늘과 쑥에 관한 신화가 많고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했던 몽골계통 유목민들의 후예들인 것은 사실이다.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뼈대있는 민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있어서는 않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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