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신부-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부르시면>
매월 포콜라레(마리아 사업본부)에서 보내오는 "그물"이란 월간 신앙 잡지가 있습니다. 부피가 얇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생활 말씀으로 가득 찬 보고와도 같은 잡지여서 늘 애독하고 있지요.
이번 호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지난 여름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아버지의 품으로 떠나신 김낙웅 토마스 모어 형제님인 듯 합니다.
의사였던 형제님은 마지막 시간이 다할 때까지 온 정성을 다하여 진료를 계속하며 아픈 이들을 돌보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다가 입원한 지 한달 여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입원 중에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찾아온 이들을 맞았으며 남아있는 이들에게 "좋은 뜻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유지로 남겼습니다.
형제님이 건강할 때 써놓으셨던 시 한 구절을 통해 그가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했던 신앙인, 초연하고 겸손했던 신앙인인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물처럼 흙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부르시면 소리 없이 가려네. 후회 없이 가려네. 기쁘게 가려네. 그 날 주님께로 가는 그 날 , 파란 풀밭으로 가는 그 날, 형제님들! 저를 위해 기쁜 노래 부르며 기도해 주십시오. 잔칫집처럼 웃고 떠들며 기도해 주십시오. 연도곡도 흥겹게 신나게 불러주십시오."
그분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 기간은 그야말로 형제님을 향한 찬미가가 울려 퍼지던 축제의 기간이었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었으며, 한번 진료를 하고 간 환자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시 못 온다고 생각 될 때에는 필요한 약을 지어 보내주기까지 했답니다.
그에게는 걸인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바쁜 와중에도 직접 문 앞까지 나가 손에 돈을 쥐어주고는 허리 굽혀 인사하여 보내고, 또 병든 걸인들을 고쳐주곤 했으므로 그들 스스로가 미안해하며 같은 시간에 함께 그를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자신에게 암이 생겼다는 것을 안 형제님은 평생 준비해온 죽음을 담담히 맞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맑은 정신으로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며 체력이 허용하는 한 진료를 계속했습니다. 2년여의 투병생활 중에도 언제나 기쁨과 평화로운 모습을 잃지 않았던 그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모범으로 삼았고, 고통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연금술을 알고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의인들의 고통"일 것입니다.
정말 착한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 갖은 난관 속에서도 묵묵히 제 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 무병장수하며 팔자가 활짝 핀 인생을 사는 것이 상식적인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은 너무나 불공평할 때가 많습니다.
비리란 비리는 다 저지른 사람들, 그토록 파렴치한 사람들,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 자기만 아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은 저리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왜 하필 저 올곧은 양반, 한평생 한눈 한번 팔지 않는 사람에게 저리 그리 몹쓸 병이 온단 말입니까?
착하기로 따지면 세상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 그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리도 빨리 불러 가십니까?
오늘 첫 번째 독서와 위에 소개해드린 김낙웅 토마스 모어 형제의 삶은 어렴풋이 나마 "의인의 고통"에 대한 나름대로의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사랑 안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라 주님께 뽑힌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저물어 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잠시지만 주님께서는 영원하십니다.
현재의 십자가를 불평하지 말고 떠벌이지 말고 묵묵히 한번 지고 가 보십시오. 현재의 고통에 아무런 토도 달지 말고 기꺼이 한번 견뎌내 보십시오. 이 세상 그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 순간 현실이 아무리 열악하다하더라고 김낙웅 토마스 모어 형제처럼 기쁜 얼굴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정월기신부
사제로 살아온 지 이십팔 년이 되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내가 드린 미사에서 당신 평화를 주셨음에 주님께 감사드린다.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당신 사랑과 말씀과 성령의 보화를 넣어주시고 늘 좋은 그릇으로 써주신 주님께 나도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싶다.
예수님 시대에는 율법을 잘 지켜서 하느님께 공을 쌓으면 당연히 하느님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인과응보 사상이 있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주인과 종으로 나뉘는 신분제도가 사라졌지만, 당시 사회는 이 제도가 일반화되어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하면 청중은 쉽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품꾼은 보상을 바라지만 주인에게 매인 종은 한 식구이므로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자녀가 엄마에게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넘치도록 사랑을 받는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자세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보상을 바라거나 계산하는 상업적인 관계에서는 이익을 따지는 거래는 있지만 감동이나 사랑은 없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9장 16절에서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도로의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종들의 세상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오늘날 보수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종의 신분"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置簿)될 지도 모른다. 굳이 논한다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품꾼이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종은 무상(無償)으로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법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 앞서간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6,1-15)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 대가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준수가 재물을 보상으로 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에 깊이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을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의 신분으로 설정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떤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 반대로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섬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루가 6,13; 마태 6,24)
인간이 하느님께 보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곧 빚이 아닌가? 그 빚을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당시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가 채권자의 종으로 귀속되는 이치만 봐도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필립 2,7) 결국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종들인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착각을 경계로 삼아 예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0절)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그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