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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할리우드를 꿈의 공장이라고 부른다. 꿈의 공장.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꿈의 공장의 의미를 똑같이 바라보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이들은 할리우드는 늘 두 가지 얼굴을 지녔다고 말한다. 스타와 아카데미의 오스카 상과 은막 속에 빛나는 스크린의 이미지와 월 스트리트의 모사꾼들과 다국적 영화 기업과 워싱턴 정가의 로비스트들이 지휘하는 문화 전쟁의 야전 사령부로서의 구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빼놓으면 할리우드는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가기를 원했던 것은 사실이다. 모든 조건이 주어진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를 만들어 보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소망이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로 알려진 빔 벤더스, <집시의 시간>의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를 비롯해 수많은 유럽 영화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몸을 담았다. 그 가운데는 성공한 감독들도 있었지만 거개가 고배의 잔을 들고 돌아서야 했다. 왜냐하면 할리우드는 한 개인이 마음껏 재능을 발휘하도록 내버려두는 곳이 아닌 까닭에서다. 성공한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성패의 명암이 엇갈린다. 그 이중성을 톡톡히 치른 감독으로 우린 빔 벤더스를 꼽을 수 있다. 그이는 동시대 독일 영화 감독들 가운데 가장 먼저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그것도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의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요청에 의해, 그이는 할리우드에서 사년을 보낸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그이는 제작자와의 갈등, 여러 번에 걸친 개작, 기약 없는 제작 중단에 시달리며 톡톡히 쓴맛을 보았다. 그래서 남은 시간 동안 그이는 <사물의 상태>라는 엉뚱한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는 마치 할리우드를 비웃는 듯한 장면을 담았다. 그것이 탕자처럼 유럽 영화로 돌아온 빔 벤스와 할리우드와의 마지막 관계였다.
할리우드의 두 얼굴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비단 할리우드의 문제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현대 영화의 기수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인 장 뤽 고다르는 이십 세기에 들어서면서 영화(라는 매체)는 상업을 문화로, 산업을 예술로 만들어 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 가장 적절한 표현임에는 분명하다. 오늘날 미국 문화의 거대함은 흡사 <쥐라기 공원>이나 <타이타닉>을 보는 것과 같다. 그이들은 고질라처럼 크기를 자랑하며, 떳떳이 우리 앞에 내놓는다. 영화산업에 있어서 미국에 대해 흑자를 볼 수 있는 국가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며, 할리우드 영화는 세계 영화 수요의 오십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몇몇 나라에서 국가적으로 영화 산업을 육성하고 있긴 하지만 미국 안의 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자국 내에서 공급과 수요가 가능한 영화의 자급 자족 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는 인도를 빼고, 영화 문화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특히 대규모 공장인 할리우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영화 선진국이었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들은 전쟁으로 그 창작의 토대를 잃게 되면서 영화 산업의 많은 부분을 미국에 빚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미국의 영화는 단 한 번도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영화 매체는 늘 미국을 중심에 놓았으며, 거개의 국가들은 미국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할리우드의 시작
우리 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때는 신동이라 불린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오 센트 극장>이라는 영화를 보면 옛날 할리우드가 어땠는지 그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오 센트 극장>은 말 그대로 오 센트 동전을 넣고 무성 단편 영화를 보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촬영장에 빚을 받으러 갔다가 졸지에 영화 감독이 된다. 처음 촬영 현장에 나간 주인공은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피스라는 이름을 듣는다. 주인공은 순진하게, "그리피스가 누구죠?"라고 묻고, 순간 사람들은 "아니, 그리피스도 모른단 말이야. 그리피스야말로 세계 최고의 영화 감독이야~"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리피스가 처음 개척한 장편 영화 시대가 열리는 순간을 보여 주며 막을 내린다. 걸작으로 전해지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을 보며 주인공은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얼굴을 드러낸 채 스크린을 바라본다. 이제 단돈 오 센트로 단편을 보던 <오센트 극장>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꿈의 공장이 할리우드에서 시작되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사실 초기 영화제작의 본거지는 뉴저지와 뉴욕이었다. 하지만, 뉴욕에는 영화 업자의 담합 형태가 결성되어 있어서 회원이 아니면 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독립 제작사에 대한 집요한 방해 공작이 이루어졌고, 뉴저지와 뉴욕 주는 영화사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찾아낸 하나의 해결책이 아름다운 산과 계곡 그리고 뜨거운 자연광을 자랑하는 할리우드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곧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남부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그이들은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무궁 무진한 영화라는 자원을 캐낸 것이다. 할리우드 공장은 이후 제작, 배급, 상영이 가능한 여덟 개의 소수 기업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른바 메이저 컴퍼니라 불리는 다섯 개 영화사인 파라마운트, 로스, 이십 세기 폭스, 워너 브러더스, 아르케이오와 그보다 작지만 다른 독립 영화사들과 견주어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세 개 영화사인 유니버설, 컬럼비아, 그리고 독립 제작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독과점 형식으로 서로 견제하면서 영화 시장을 장악했다. 이러한 형태는 할리우드의 문화사 속에서 복합적으로 발전과 후퇴를 거듭한다. 그 가운데에는 독특한 사람들도 있었다. 천구백사년 최초의 영화관을 만들었던 헝가리 이민자인 아돌프 주커는 그이의 제작과 극장 사업을 파라마운트 영화사로 성장시켰다. 오퍼상이었던 마커스 로는 천구백이십사년 메트로 영화사와 새뮤얼 골드피시의 골드윈 영화사를 매입하여 루이스 메이어에게 제작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이 영화사는 이후 로스(엠지엠으로 유명한)로 발전하게 된다. 천구백십이년 영화 배급업자인 월리엄 폭스는 조셉 쉔크와 대릴 자누크의 이십 세기사와 합병하여 이십 세기 폭스사가 되었다. 이들 회사는 대체적으로 오늘날에도 전세계에 영향력을 펼치며, 영화 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할리우드의 발달은 두 가지 격변을 겪으면서 가능했다. 천구백삼십년대의 할리우드가 대공황 속에서 지친 미국 대중들에게 도피처와 오락을 제공하며 경쟁자 없는 연예 산업의 왕좌를 굳힐 수 있었다면, 제이차 세계 대전은 할리우드가 전세계적 규모로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자본주의 종주국의 위치를 차지한 미국은 그네의 세계 지배 전략을 팍스 아메리카라는 말로 미화하였고, 할리우드 영화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위한 상품이 아닌 미국의 꿈을 전세계로 수출하는 수단이 되었다. 옛날에 단지 신기한 구경거리였던 영화는 산업으로 변화한 지 반세기도 되지 않아 이데올로기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또 하나 할리우드를 가능케 한 것은 미국의 극장 문화였다. 천팔백구십사년 사월 십사일, 핍 쇼 극장이 뉴욕에 처음 개관되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것은 오늘날 볼 수 있는 공동 관람 형태의 영화 상영은 아니었지만, 움직이는 그림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천팔백구십오년 십이월 이십팔일 뤼미에르 형제가 지하 그랑 카페에서 영화를 유료 상영한 날과는 또 다른 의의를 지닐 것이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은 에디슨이 영화를 최초로 (상업적으로) 공개한 천팔백구십사년을 영화의 원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네의 영화 백 주년 행사는 천구백구십사년에 행해졌다. 블랙 마리아라고 이름붙여진 에디슨의 초기의 영화 기구들은 미국의 과학 기구 제조업자인 로버트 폴에 의해 개량되었고,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영화가 스튜디오를 벗어나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로버트 폴의 키네토그라프는 곧 뤼미에르 형제에게 팔렸고, 그이들은 단순히 필름을 찍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만들어 투사할 수 있는 카메라를 발명하고 시네마토그라피라고 이름붙였다. 시네마토그라피의 엄청난 성공 이후 에디슨 역시 키네토그라프의 스크린 영사판인 비타스코프를 발명하였고, 영화는 비로소 영사되는 것이 되었다. 영화는 영사되면서 자연히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노력은 이윤과 대중으로 이어졌다. 샤를르와 에밀 파테 형제는 이 과도기를 상업적으로 이용한 첫번째 성공적인 영화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이들은 스스로 영화를 제작하고, 카메라와 필름을 판매하면서 성장하다가 이윽고 극장 체인을 소유하면서 영화 시장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가장 장사가 잘되던 영화는 한동안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였다. 다큐멘터리 일색이던 초기 영화에서 영화를 미학적으로 탐구한 거의 최초의 인물이 멜리에스였고, 관객은 그이의 영화들로 인해 영화의 허구적 매력에 탐닉할 수 있었다. 이후, 영화적 기법은 실제 시간과 영화적 시간의 차이를 구별해 낸 에드윈 포터와 테크닉의 혁신으로 서사시를 완성시킨 그리피스의 영화들로 이어졌다.
할리우드의 변화와 위기
그러나 할리우드가 순탄한 고속 도로를 탄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의 등장은 할리우드가 본격적으로 맞이한 가장 큰 위협이었다. 이에 할리우드는 대형 화면, 입체 음향, 입체 영화뿐만 아니라 심지어 향기가 나는 아로마라마라는 영화 기법까지 도입하였다. 얼마 전 우리 나라에서도 선보인 이 기법은 장미꽃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 장미꽃 냄새를 피워 후각적인 경험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밀폐된 영화판에서 후각적인 효과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았다. 여하튼 이러한 제작의 투자는 결국 거물들의 손을 떠나 은행가와 전문 경영인들과 투자자들이 영화 제작을 맡는 시대로 옮아 가도록 하였다. 발 빠른 독립 영화 제작자들은 일찍이 텔레비전과 손을 잡고 하청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들은 훗날 새로운 세력으로 득세를 하며 할리우드와 텔레비전과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 큰 구실을 한다. 한편 영화사들은 천구백오십년대와 천구백육십년대 초에 텔레비전으로는 방영이 불가능했던 성인을 주제로 한 영역, 곧 폭력과 성을 주로 다룬 영화들로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본래 무시되었던 소재들을 과감히 다주는 극약 처방을 시행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대책으로 드라이브 인 시어터와 동시 상영이 천구백삼십년대 중반에 모노그램 영화사와 리퍼블릭 영화사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고, 후에 영화 산업 구조의 재편성 속에서 두 회사가 살아남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앞의 것의 경우 연인들과 가족들은 차 안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게 되었으며(요즈음 들어 우리 나라에도 생겨났다). 그로 인해 드라이브 인 시어터는 한때 인기 있던 극장 형태일 수 있었다. 현재 거의 사장되어 버린 드라이브 인 시어터는 그 넓은 장소와 커다란 스크린을 활용하여 중고 물품의 매매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동시 상영의 경우에는 뉴스 영화, 만화, 예고편을 상영한 뒤 장편 영화의 동시 상영이 심지어 세 편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관객이 극장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극장에서는 팝콘과 음료수 들을 파는 매점을 확장하였고, 심지어 어떤 극장은 매점 수입으로 경영상의 대부분의 이익을 얻기도 했다. 빙고 게임과 추천 상품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그이들의 목표는 극장 영화가 텔레비전이 할 수 없는 것을 잠재적인 영화 관객에게 제공해야만 하며, 또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영화 관객은 기하 급수적으로 줄어들었고, 대형 영화관은 차례로 문을 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장이 문을 닫았음에도 영화 산업은 텔레비전, 비디오 들의 뉴미디어로 인해 제이의 황금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천구백오십육년 할리우드는 텔레비전에 대한 금지를 풀었고, 곧이어 낡은 재고 영화가 새로운 매체의 소프트웨어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방송인들은 요즈음 들어 제작된 영화를 극장 개봉 뒤 비교적 빨리 방영하기 위한 판권에 매우 높은 값을 주었고, 영화사의 이윤은 극장 수입에 관계없이 늘어갔다. 오직 극장주들만이 적자에 허덕였을 뿐이지 할리우드와 텔레비전이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고 영화가 바닥난 천구백육십년대 중반부터 네트워크는 극장 영화에 대한 권리에 금액을 지불하는 것보다 텔레비전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텔레비전 전용 영화가 등장했고, 이어서 케이블 전용 영화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화사들은 오래가지 않아 활로를 찾아내었다. 네트워크 편에서 관심이 줄었을 때 할리우드는 개봉 영화 패키지를 직접 독립 텔레비전 방송국에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영상물들은 단지 영화라는 까닭만으로 관객들에게 환영받았다.
기술의 혁신 작은 위협들은 공장 건설 초기에 이미 존재하였다. 각 영화사들은 위기의 순간마다 관객을 끌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동원하였으며, 소리나 컬러의 도입 들 하여 기술의 혁신은 안전한 검토 뒤에 받아들여졌다. 천구백이십년대 파라마운트 소속의 퍼블릭스 극장 체인은 영화 관람을 화려한 축제의 하나로 만들었다. 공연과 영화의 시기라 불린 당시의 영화 관람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오 분 길이의 전주곡이 끝나면 무대 쇼가 삼십 분 가량 이어지고, 짤막한 뉴스 영화가 상영되며, 이어서 이십 분 안팎의 단편 영화 그리고 장편 영화의 순서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다발적 동시 상영 방식은 큰 인기를 모았으며, 돈 많은 대규모 영화사들의 가장 비싼 공연 쇼가 되었다. 천구백이십년대 말, 영화에 소리를 넣으려는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으나 영화 제작자들의 우려로 인해 계획이 번번이 취소되었다. 결국 당시 재정적 문제를 안고 있던 워너 브러더스가 모험적으로 <재즈 싱어>를 제작하면서 유성 영화 시대를 열었다. 무성 영화 시대의 시끄럽고 무질서한 쇼 위주의 극장 분위기에서 벗어나 유성 영화는 관객의 현실감을 높여 주었고, 그러한 경향은 이후 천구백삼십년대와 천구백사십년대를 할리우드의 전성 시대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세계 대전으로 경쟁국인 유럽이 화염에 횝싸여 있을때, 할리우드의 소리가 담긴 영화는 폭발적인 인기를 몰고 왔고, 공급이 수요를 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컬러의 도입에 있어서도 과정은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도무지 제작자들은 소리나 컬러 화면이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천구백십오년에 이미 설립되어 있던 테크니컬러사의 기술은 천구백삼십년대에 와서야(오늘날 <타이타닉>을 만든 이십 세기 폭스사의 주도적 투자에 의해) 영화에 전체적으로 쓰이게 되었고, 뮤지컬 영화를 비롯한 특정 장르 영화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할리우드가 옛 영광에 많은 덕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많이 변모한 것도 사실이다. 이제 영화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력을 지나칠 이는 없다. 우리 또한 스필버그의 문화론을 심심치 않게 언급하면서, 한 명의 인재가 양산한 영화의 문화 산업적 위력을 재빠르게 배워야 할 때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그것은 스필버그가 위대해서라기보다는 미국의 문화 산업의 배급망이 그만큼 우수한 탓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나 코카콜라처럼 미국 영화는 하나의 기호 상품이 되었고, 그이들은 다양한 제품을 만들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오늘의 할리우드
미국 스타들의 사생활이 아홉시 뉴스의 기사 거리로 등장하는 지금 할리우드의 오늘과 미래를 점쳐 보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인 일이다. 요즈음 개봉한 <스타워즈>의 새로운 시리즈도 미국과 거의 개봉을 같이 하는 때인 만큼 할리우드의 현재는 이땅의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그렇다면 할리우드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이들은 몇가지 방법론을 내세운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언제나 낫다는 진리이다. 요즈음 들어 할리우드 영화는 큰 것에 관한 숭배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모든 메이저 스튜디오의 슬로건은 크게 벌려면, 크게 써라이다. 그리하여 지난해 여름을 <타이타닉>이 강타하였고, 올 여름은 <스타워즈>의 귀환으로 시작되고 있다. 당연히 제작비 상승은 천문학적인 숫자를 넘어선다. 그렇다고 돈만 무조건 투자하는 풋내기 도박사들로 그이들을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블록버스터가 되는 것에도 몇 가지 조건이 있다. 특히 그이들이 노리는 시장은 이제 미국 내수용이 아니라 해외 수출용인 만큼 이 조건들은 기억해 둘 만하다. 먼저 액션이 있어야 한다. <타이타닉>에 우리가 감동했던 것도 실제로 치고 받는 싸움은 없지만, 배가 파괴된다는 거대한 액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액션을 행해 줄 스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새로운 화제를 끌어낼 만한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 할리우드의 성공작은 언제나 이 삼박자를 철학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얼굴과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자본 투자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니버설사의 테마 공원에 다녀온 뒤 <스타워즈>의 세트가 어떻고, 촬영 현장이 어떻고, 제임슨 카메룬이 어떻고 떠들어대는 것은 다소 순진한 것이다. 이 거대한 할리우드라는 세트와 테마 공원과 이름모를 할리우드의 검은 손들을 보지 않고, 꿈의 공장에 감히 다녀왔노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끔 직배사들의 초대로 미국에 다녀오는 친분 있는 기자는 현지 시사회를 다려온 뒤 이런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 곳에서 먼저 기가 죽는 것은 스케일이죠. 사람들의 얼을 빼논 다음 그이들은 슬며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답니다." 우리 역시 이 크기에 질려 할리우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한 것은 아닐까.
앞날이 궁금하다 조금 더 할리우드의 미래를 들여다보는 데에는 조지 루카스의 일화가 도움을 줄 것 같다. 그이는 <스타 워즈>가 공개되었을 때 극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는 와이드 스크린에 백 퍼센트 서라운드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간을 함께 하는 다수의 관객을 전제로 한 영화라고 했다. 곧 모든 사람이 동시에 웃고 소리지르는 집단적 경험이 바로 영화의 마술적인 힘이며,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충분히 잘 볼 수 있음에도 경기장이나 콘서트를 찾는 것은 바로 현장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이는 앞으로는 스리디 극장이 나 아이맥스 극장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며, 반면 대형 텔레비전 스크린이 등장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제삼의 스크린이 어떠한 방식으로 기능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이의 말이 조금은 가까워진 듯하다. 모든 것이 갖춰진 복합 상영관이 나라 곳곳에서 세워졌거나 건설 중이고 요즈음 들어 가장 인기 있는 텔레비전 스크린은 이십구 인치라고 한다. 점점 거대한 시각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는 늘 할리우드 영화가 있음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충무로는 할리우드를 본떠 만든 작은 공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즈음 스크린 쿼터제를 비롯한 싸움은 달걀로 바위 치는 싸움과 견주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작은 공장이라도 생산품의 질만 우수하면 싸워 볼 만하지 않겠는가. 이 또한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할리우드를 여행하는 내내, 스필버그는 나오지 않더라도 강 제규와 이 광모가 있는 다양한 이땅의 영화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충무로는 할리우드를 본떠 만든 작은 공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쉬리>나 <아름다운 시절>에서 느낄 수 있듯 작은 공장에서 만든 것이라도 생산품의 질만 우수하면 할리우드의 영화들과 싸워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할리우드 영화를 사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이들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이 보편성의 틀은 이미 세계의 사람들을 한데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빔 벤더스나 오우삼이 할리우드로 건너간 것처럼 이땅의 감독들과 배우들도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린 할리우드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용관
어려서는 시인이, 커서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현재 활발한 영화 비평 활동을 하고 있는 그이는 작가론, 구조주의, 서사 이론을 훔쳐보면서 한국 영화 분석에 전력했지만 별로 신통치 않았다고 스스로 겸손해 한다. 요즈음 첫번째 영화 평론집 <한국 영화를 위한 변명:시각과 언어>를 펴냈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서울단편영화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성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에서 영화 비평, 영화 미학, 편집론, 한국 영화연구 들을 강의하편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계간 <영화 언어>의 발행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