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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씨알주의입니다. 위에서 주체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역사의 주체는 씨알이기 때문입니다. 명(命)의 내리는 곳은 씨알입니다. 인심이 천심이란 말은 이래서 있습니다. 그 인심이란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마음이 아닙니다. 전체 씨알의 마음입니다.
민족 통합의 길2
信天함석헌
가장 근본되는 문제
동지 씨알 여러분, 두 번은 아니 오는 이 인생입니다. 만났으니 이 자리에서 옷깃을 여미고 잠잠히 나라 일을 생각해봅시다. 핑계도 도망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우리 의무요 책임입니다. “역사에서 도망은 못합니다.”
우리는 왜 이 고난입니까? 세상에 우리 같은 고난의 역사가 또 어디 있습니까? 이 고난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또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합니까? 우선 이 두 가지 문제부터 여러분과 같이 한 번 생각하고 싶습니다. 두고두고 늘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해결이 아니됐으니 영원히 새 문제입니다. 또 다시,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풀 결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우리 역사가 이렇게 어려움이 거듭 쌓이는 것은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은 가나 역사 체험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말입니다.
그것은 견디다 못해, 노력하다 못해 지쳐서 하는 한탄입니다. 그 의미에서 동감으로 받아들이고는 싶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분의 표현이지 사상이나 철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하다 못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지만 정말 운명이라면 아무 의미도, 따라서 모든 의무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운명론 때문에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한숨 뒤에 숨어 있는 간절한 애국심은 높이 보고 싶지만 그 사상은 강력히 배격해야 합니다.
아무도 4천 년 역사의 온 길을 한눈으로 돌아볼 때 그러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이렇기까지 할까? 해방 후의 일을 돌이켜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제까지 우리의 지배자 노릇을 했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잿더미가 됐던 속에서 20년이 못돼 세계의 강국으로 다시 일어나는 이웃의 일본과 우리를 비교해볼 때 더욱더 운(運)이란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들은 운을 탔고 우리는 못 탔습니다. 하나 하나의 인간으로 볼 때 우리가 무엇이 그들보다 못할 것이 있습니까? 서양물결이 오기 전, 같은 동양적인 속에 있었을 때 저희나 우리나 다를 것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는 그들은 성공의 계단을 턱턱 올라가는데 우리는 실패의 계단을 내려오기만 했습니다. 하필이면 대원군 민비며 일·청 일·러전쟁이며, 미·소 대립이며 38선이며, 6·25며 이승만이며, 군사정변이며 사극체제(四極體制)입니까?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나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이니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역사 아니라면 몰라도 역사인 담에는 운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운명보다는 천명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운명과 천명이 불가항적인 데서는 같으나 그 뜻에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에는 의미가 없고 하나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명이란 이 우주에 어떤 일관(一貫)하는 의미가 있는 것을 믿는 말입니다. 믿음이기 때문에 믿으면 있고 믿지 않으면 허무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살고 생각하는 이상 허무란 성립이 아니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명입니다.
천명인 담에는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의미인 담에는 실현해서만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역사가 나옵니다. 운명이라면 몰라도 좋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역사라면서도 운명에 숨으려 하고, 운명을 말하면서도 권리, 의무를 내세우는 것은 불철저한 소리입니다. 불철저는 편의주의(便宜主義)요, 편의주의는 생명에 대한 반역입니다. 모든 현실주의는 다 편의주의입니다.
운명에는 맹목적(盲目的)인 복종이 있을 뿐이지만 천명은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되고 실현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체가, 내가 문제입니다. 나는 우리의 근본 문제는 여기 있다고 늘 생각합니다. 모든 사진의 흐린 원인이 렌즈에 있듯이 모든 역사 사건의 잘못된 원인은 주체가 단단치 못한데 있습니다. 천명에 두텁고 엷은 차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의미의 세계는 스스로 서는 세계입니다. 그 체험하는 주체에 따라 역사의 차이가 생깁니다.
내가 천명 소리를 하면 소위 과학적 역사가는 반대하고 웃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말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 시대 자체는 이 시대를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 마지못해 그렇게 썼습니다. 이 시대를 죽을 데 빠친 것은 소위 그 과학적 역사주의입니다. 사료는 과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체험, 역사 해석은 과학의 할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절대의 명(命) 아래 있으면서도 명(命)없는 학문, 예술, 정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한 망상을 한 것이 근세의 잘못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는 역사에서 도망할 수는 없다” 한 링컨의 말을 진리로 알진댄 그 역사는 명(命)하는 역사요 명(命)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라지만 과학은 과학이지 전학 (全學)이 아닙니다. 과(科)는 부분입니다. 부분 속에 서서 전체를 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잘못된 견지에서 역사를 썼기 때문에, 절대의 명을 죽여 놨기 때문에, 편의주의(便宜主義)의 정치가들이 그것을 제게 좋도록 제 마음대로 악용할 수 있었습니다. 근세 이래의 잘못은 정치가들이 스스로 우상의 자리에 앉아 민중을 도둑질하는 데서 시작됐습니다. 이제 그 썼던 사자 가죽을 벗기우고 당나귀 발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현대의 고민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의 모든 정부가 다 정보 정부로 타락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씨알주의입니다. 위에서 주체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역사의 주체는 씨알이기 때문입니다. 명(命)의 내리는 곳은 씨알입니다. 인심이 천심이란 말은 이래서 있습니다. 그 인심이란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마음이 아닙니다. 전체 씨알의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전체라는 데 있습니다. 렌즈는 하나의 전체입니다. 그 질이 단단하고 완전히 맑고 잘 갈려서 분명한 초점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부분도 떨어지거나 흐려서는 초점이 생길 수 없고 그래서는 옳은 사진을 찍을 수가 없습니다. 역사의 온전한 의미를 비추는 것은 전체를 이룬 씨알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종교와 바른 정치를 맡아 할 사람은 그 씨알의 마음을 안 사람입니다. 노자는 벌써 2천년 전에 “어진 이는 지어 먹은 마음이 없고 씨알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聖人無常心以百姓心爲心)라고 했습니다.
2천년 전에 벌써 한 말인데 이 말이 바로 서지 못하고 늘 도둑을 맞고 속아왔습니다. 부족(部族)에 있다고 했다가, 제사(祭司)에 있다고 했다가, 임금에 있다고 했다가, 민족에 있다고 했다가, 마침내 이제 와서야 씨알에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참으로 된 것은 아니어서 정당이란 깡패들이 사이에서 협잡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씨알이 전체를 이루어 완전히 명을 세우는 날이 와야 하겠습니다. 만나자는 것도 숨을 쉬자는 것도 바늘구멍을 뚫자는 것도 다 이 전체로서 생각하는 자리에 가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나라 일을 말할 때마다 인물 걱정이 나옵니다마는 그것도 이 의미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인물이 무엇입니까? 전체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저 아랫자리에 앉아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나는 벽에 걸린 초상을 보고 오늘날 도산(島山)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마는 그만한 인물이 오늘같이 어려운 때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참 인물 없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군사정권이 일어나 10년 정치를 하겠습니까? 무기를 잡았을 때 사람은 없습니다. 무기가 나와서 사람이 도망간 것 아니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칼이 춤을 춘 것입니다. 무기 보고 도망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무기는 쓰는 것이지 무서워하는 것 아닙니다. 무서워하는 것은 숭배하는 것입니다. 능히 쓰는 사람은 쓴 다음에는 곧 버립니다. 버리지 못해 쥐고 있는 것은 무기 숭배요 무기에 잡힌 것입니다. 무기에 잡힌 것은 무기에 죽은 것보다 더 불쌍합니다. 인간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우리는 인물 가난에 빠져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민중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큰 재목은 깊은 산 원시림 속에서 구하고 큰 인물은 자유 하는 민중 속에서 구합니다. 민중이 생각을 자유로 못하고 말, 글을 자유로 못하는 나라에서 인물이 어떻게 나겠습니까?
민중이 자유를 잃을 때 학문과 사상이 어떻게 더럽게 타락하나 보시렵니까? 5·16쿠데타가 일어나 칼이 번쩍거리니 신문이 뭐라 한지 아십니까? 조직 없이는 혁명은 아니되는데 4·19 혁명 실패 후 사회에 남은 유일의 조직은 군대이기 때문에 군사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어찌 학문입니까. 만일 그는 법대로 한다면 군대조직이 더 강해진 오늘은 쿠데타가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혁명 일어날 원인이 없다 합니까? 부정, 부패, 불평은 그때보다 더 한 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있어서 조직이지 조직 있어 사람입니까? 민중의 정신이 썩은 것이 원인입니다. 혁명 이론도 혁명 철학도 지도 인격도 없이 단순히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것은 혁명도 아닙니다.
또 뭐라는지 아십니까? 역사 교육을 할 때 사육신을 너무 높이지 말고 세조를 너무 깎지 말라 합니다. 이것이 교육입니까? 이 나라에 도덕이 있습니까? 또 뭐랍니까? 임경업(林慶業)은 그때의 정세 판단을 잘못했다 합니다. 그것이 역사 판단입니까? 그렇다면 이긴 놈은 다 옳고 진 놈은 다 잘못입니다. 그러고도 역사학이 성립됩니까? 사람이 어찌 성공, 실패에만 삽니까? 정세 판단 잘못한 것으로 한다면 예수같이 잘못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성공한 것으로 한다면 레닌 스탈린처럼 잘한 사람이 누구며 그 편에 일찍 가 붙은 김일성도 잘했다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가치관이 어쩌면 이렇게 변합니까? 5·16 하나를 겪고 그렇게 하룻밤 새 가치관이 변하는 것이 어찌 지식인입니까? 교육자입니까?
무슨 성역이니, 누구 숭배니 하는 것도 그렇고 요즘 일어나는 농촌사업도 그렇습니다. 다 민중이 자유 잃은 데서 나오는 병적 증상입니다. 씨알의 도덕의식이 건전하게 있을 때 그런 따위 시시한 것 나오지 않습니다. 도대체 인물숭배란 강제로 시킬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인물도 모욕을 당하고 숭배한 사람도 우스워집니다. 우상숭배인데, 역사상에 우상치고 망하지 않은 것 없고 우상숭배자 치고 망하지 않은 것 없습니다. 그런 따위 방법으로 국민정신 올라가지 않습니다. 더 타락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내 말이 맞나 아니 맞나.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나무가 하룻밤 새에 재목이 됩니까? 엊그제 교련 반대하던 대학생을 오늘 행군을 시키니 그 몸은 그렇지만 그 마음은 어떻습니까? 명령이 실행되는데 쾌감을 느껴 그런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라 일이 어찌 그것으로 되겠습니까?
역사에 중요한 것은 그 대세입니다. 거기 순종하면 흥하고 거슬리면 망합니다. 그 대세는 명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대세가 무엇입니까? 민입니다. 역사의 주인이면서도 이날껏 무시당하던 민이 이제 깨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속인단 말입니까? 이 정부는 민중을 얽매기를 그만 두고 단 1분 동안이라도 서 나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 고난의 역사의 원인은 주체성이 약한데 있고 그 주체의 확립은 씨알의 완전한 자유에 있습니다. 쓸데없는 변명 말고 씨알로 자유하게 하라, 그러면 땅에 떨어진 씨가 하늘 가운을 받아 저절로 움이 트듯이 그들의 속에 있는 선의 씨가 스스로 일어서 나옵니다. 나더러 독설을 한다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내가 어찌 독설입니까? 또 설혹 독설이라 하더라도 하게 만드는 것을 어찌합니까? 누가 하게 합니까? 이 정부입니다. 나는 본래 마음이 약한 사람이오, 나도 점잖은 것이 좋은 줄을 압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점잖만 빼고 있습니까? 나는 민중을 위해 화가 난 사람입니다.
이 민중은 병이 든 민중입니다. 이조 5백 년 압박 착취에 못 견디어 골병이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어나 역사의 주인이 되라는 이 시 대에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멍청히 있으란 말입니까? 이제 그 역사적 사명을 다 하도록 하려면 그에게서 모든 간섭, 구속, 업신여김을 다 제해버리고 몸과 마음을 기운껏 마음껏 놀려 그 원기를 회복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해방은 그래서 하늘이 준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을, 이제 너는 병신이니 못한다고 주인 자격을 가로채버리니 어찌 화가 아니 난단 말입니까? 정부에서는 나보고 민중을 자극시켜서 안됐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더 자극시킬 것입니다. 깨어 사자처럼 일어날 때까지 찌르고 찌를 것입니다. 그것이 왜 잘못입니까? 그런 잘못이라면 죽으면서라도 하겠습니다. 벌써 지옥 가기로 작정한지 오랩니다.
나를 무식하다 업신여기지 마시오. 지난번도 강연하면서 나는 내 말이 역사에 적힐 것을 확신한다, 적혀야 한다 했더니 정부에서 건방지다고 하더랍디다마는 건방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누가 정말 건방집니까? 스스로 씨알인줄 알아 전체 씨알과 운명을 같이하며 거기 충성하기 위하여 스스로 어리석어지는 이 나입니까? 나라의 주인은 씨알이라는 이 시대에 그들을 떠밀어내고 말도 못하게 하며 우리 하라는 대로 해라 하며 정치도 경제도 종교도 교육도 다 자기네가 아노라는 그들입니까? 제발 생각을 깊이 널리 하기를 바랍니다.
민 족
민족을 어떻게 다시 하나로 살려낼 것이냐, 그 길을 생각해보잔 것이 구체적인 것은 말하지 않고 서론을 하는데 밤이 다 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론이 본론입니다. 준비를 옳게만 하면 진리는 저절로 빚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어질게도 그 체험을 이렇게 표시했습니다. “시작이 절반이다.” 본론은 제가 할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할 것 아니라 전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그래야 명(命)입니다. 그 명(命)은 내리는 것이요 받는 것이지 만들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는 노력의 목적은 그것을 받는 준비에, 정지작업(整地作業)에 있습니다. 길은 가자는 의지에 있습니다.
그럼 우선 민족이 됩시다. 민족은 하나의 산 것입니다. 산 생명체입니다. 하나의 하나입니다. 여럿으로 있어도 하나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돼도 하나요, 여기 놓고 저기 놓아도 하나입니다.
하나기 때문에 그것은 하늘로 된 것이지 사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이지 인위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절로 나온 것이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절로란 말은 저 저로서란 말입니다. 스스로란 말입니다. 민족은 스스로 된 것, 스스로 사는 것이지 누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민족은 스스로 민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원을 찾는다면 하늘이 만들었다 해야지 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통합운동의 첫걸음은 이 하나를 하는 일입니다. 하나를 함은 하나를 사는 일입니다. 하나를 삶은 하나를 믿어서만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깨질 때 너와 내가 맞서게 되고 너와 내가 맞설 때 의심이 일어나고 의심이 일어나서 생각을 하고 생각이 많아서 무엇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전체는 죽습니다.
민족이니 뭐니 하면서 손을 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에 감히 손을 대는 일입니다. 믿는 마음은 그저 그것을 살 뿐이지 부르지 않습니다. 민족이요 나라요 건방지게 지껄이면서 손을 댔기 때문에 잘못이 생겼습니다. 정치란 것이 그 짓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전체를 사는 씨알에게는 민족은 언제나 살았고 나라는 언제나 있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씨알은 물 같고 바람 같은 것입니다. 한없이 약하지만 약하기 때문에 어질고 착합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보라,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혹은 속에, 가운데) 있다” 합니다. 물, 바람을 칼로 자르면 잘라진 것 같습니다마는 칼을 뽑는 순간 다시 변함없는 하나입니다. 민족도 그렇습니다. 정치라는 칼이 공연히 들어 왔기 때문에 말썽입니다. 필요한 것은 어서 바삐 즉시로 칼을 뽑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팎의 정치가라는 것들에게 외치십시오. “물러가라, 민족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라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
신성불가침입니다. 거룩한 것에 손을 대서는 아니됩니다. 스스로 있는 자연이, “있어서 있는 자”인 하나님이 거룩한 이입니다. 민족도 나라도 있는 것입니다.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서양식 근대문명은 한마디로 인위입니다. 만든 것입니다. 인위기 때문에 위(僞)입니다. 참이 못되고 거짓입니다. 그 거짓이 우리를 해쳤습니다. 우리 이 민족적 비극의 원인이 근대문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정치가 근대화를 목에 핏대를 돋혀 부르짖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민족은 단순히 하나의 생명체일 뿐 아니라 하나의 인격입니다. 인격은 생물적인 동시에 생물보다는 한단 높은 정신적인 생명체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점이 그 생물적이 아닌 점, 내면적인 점에 있습니다. 생물은 무생물을 밑바닥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생물은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동물적인 생명은 식물적인 생명을 밑바닥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만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동물적인 생명을 밑바닥으로 하고 있으나 동물만은 아니요, 정신적인 생명은 개인적인 정신작용을 밑바닥으로 하고는 있으나 개인만은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내면화라 할 때는 이 점을 특별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이라는 생명은 결코 개인 인격이 여럿이 모여서 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의 보다 높은, (혹은 보다 깊다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복잡이라는 말을 씁니다마는 복잡은 결코 수적으로 다른 것만이 아닙니다. 정신은 생물보다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 사이의 관계는 평면적인 것이 아니고 입체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계적인 것만이 아니고 의미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신적인 인격에서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위에서 전체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마는 그 믿음은 미의식(未意識)은 아닙니다. 믿음의 뿌리는 아마 미의식의 심부층(深部層)에 박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그 머리를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직접 보이는 것으로는 나무는 땅에서 나와서 공중으로 자라 올라가지만, 보다 깊이 보면 그 씨는 위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참 의미로는 생명의 나무는 하늘에다 뿌리를 박고 아래로 내리 자랍니다. 믿음은 미의식에서 초의식(超意識)에까지 닿아 있는 거목입니다. 옅게는, 뿌리 없이는 가지와 잎은 자랄 수 없다 하지만 보다 깊이 전체를 보면 빛과 바람 없이는 뿌리 없습니다. 심부심리(深部心理)는 높은 계시의 자각 있어서만 의미가 있어집니다. 생물의 세계는 밑은 땅에 두고 정점을 하늘에 두는 피라밋 형으로 생겼지만 정신의 세계는 밑바닥을 하늘에 두고 정점을 아래 두어서 두 피라밋이 정점에서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계시라는 정점에 설 때 무한의 세계가 위에 열려 있는 것을 봅니다. 전체의 의미는 이렇게 해서만 파악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체를 살리는 믿음은 미의식의 자연적인 신념만이 아니라 깊은 반성을 통해서만 열리는 초의식에까지 이르는 신앙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라 신생이라 하는 말은 이래서 있습니다.
산 전체가 문제인데 전체는 유기적인 구조를 가진 것입니다. 그 구조는 자연적인 것은 물론 아닙니다마는 그렇다고 기계적인 구조도 아닙니다. 기계문명에 버릇이 붙은 우리는 구조라면 곧 기계적인 얼거리를 생각하지만 물질, 정신을 다 같이 살려내는 구조는 그런 것 만일수는 없습니다.
전체가 그 스스로를 생각하는 우리 마음 위에 새로 계시해주는 것을 받아 해석할 수 있기 위하여 정치주의를 우리 마음에서 씻어내야 할 것입니다.
國家主義
한마디로 잘라 말합시다. 민족 분열의 원인은 정치적 과대망상증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이런 식의 정치가 있는 한 민족 통합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정책문제, 군사문제가 아닙니다. 맨 첨에 말씀할 때 재주나 방법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문제가 훨씬 더 큽니다. 세계적인 문제요,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서양식 문명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 문명은 근본에 있어서 정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치란 타고르가 이미 지적한 것 같이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발원한 것입니다. 서양 말의 정치를 의미 하는 폴리틱(politic)이란 단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도시란 말인 폴리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벽돌과 회삼물로 성을 쌓고 그 안에 살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 발달했던 옛 문명을 섭취하여 자기네 독특한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것은 그 성벽이 표시하듯이 대자연과는 떨어져 그것을 정복하기를 목적하면서 사는 인위를 강조하는 문명이었습니다. 그들의 장점은 정치와 학문과 예술에 있었습니다. 자유의 사상은 그들에게서 시작됐습니다.
서양문명은 로마를 통해서 그 그리스주의의 내림을 받아서 발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문명은 매우 정치적입니다. 동양은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문명은 자연과 싸우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되어 대조화 속에 살려고 애쓰는 데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기술에 머리를 쓰지 않고 자기를 전체에 적응시키는 마음의 태도에다 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장점은 정신적인 것을 발달시킨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선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단군은 선인(仙人)이었습니다. 임금이란 말부터가 종교적입니다. 임금은 곧 임검인데 검은 신(神)입니다. 신라에서 임금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했다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일본 말을 보면 더 분명합니다. 정(政)을 마쯔리고도라고 하는데 마쯔리란 제사라는 뜻입니다. 정치는 곧 제사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동양에게는 법과 무기와 전쟁과 그것을 돕는 과학기술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서양은 정치를 주로 하느니만큼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그 발달된 기술을 가지고 오니 정신적으로는 어떻게 높은 것이 있든 간 그 수천 년 정신의 역사를 가지면서도 미개(未開)라 하고 야만이라는 이름을 들어가며 꼼짝 못하고 그 지배 아래 들어갔고, 결국은 스스로도 자신을 잃고 서양숭배에 빠져버렸습니다.
오늘의 운명은 이렇게 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서양식 정치 만능의 문명이 결국은 어찌 됐던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즉 대세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 국가지상주의는 극점에 이르렀습니다.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그 목적인데 자유를 위해 싸우다 본즉 너도 나도 자유가 없어졌습니다. 인간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술을 발달시켰는데 극도로 발달하고 본즉 익살이게도 인간은 기술의 종이 되어 그놈의 손아귀에 빠져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우리같이 후진국이라는 것들은 멋도 모르고 뒤따라가기에만 바쁜 데 앞선 그들은 벌써 당황하고 딴 길을 찾고 있습니다. 후진국(後進國)이 아니라 후진국(後塵國)입니다. 먼저 잘못한 나라의 죄악의 값인 티끌을 받아 쓴 것이 그들입니다. 민족분열을 국가지상주의 위에 내린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는 길은 어서 바삐 이 잘못된 정치주의를 탈피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줄은 모르고 다 낡아빠진 서양식 국가지상주의 그대로 민중과는 의론도 없이 군사력으로 외교로 스파이 싸움으로 통일을 이루려 합니다. 잠꼬대입니다. 잠꼬대이기만하면 좋게! 잘못 가다가는 나라의 밑천을 놓는 일입니다.
여러분, 나 이제 놀라운 말을 하나 하렵니다. 이것은 사실 이 시간까지 이 강연회를 같이 마련해온 동지들한테도 아직 발설하지 않은 말입니다. 나는 요새 통일 소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납니다. 아직 결정은 아닙니다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내가 이날껏 평화통일을 강조해온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던 내가 왜 갑자기 그 주장을 그만두려나? 들리는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긴지 아닌지 정치란 것이 본래 민중은 모르게 쑹쑹이로 되는 것이니 진상을 알 수는 없지만, 돌아가는 말이 표면으로는 남·북협상을 한다 하면서 사실은 요새 비밀리에 이북에서 어떤 거물급의 사람이 왔다 갔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왜? 그 뜻이 뭐냐 하면 표면으로는 협상한다 하면서 막 뒤에서는 흥정을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나라 일로가 아니라 자기네의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때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이 국가지상주의 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주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 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 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
권력숭배
그러기 때문에 우선 정치부터 바로잡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 허리에서 칼부터 뽑잔 말입니다. 칼이 우리 허리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정치입니다. 국가주의입니다. 우리 국가 관념부터 바로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 정치는 지배주의의 정치기 때문에 분열과 차별을 조장시킵니다. 전체는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지배하려는 자는 먼저 민중을 분열시킵니다. 돈과 권력의 차별을 만듭니다. 그런 따위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또 놀라운 말하랍니까? 나는 어리석어서 들리는 것이 있으면 그냥 두지 않고 폭로합니다. 사실은 그래야 합니다. 개방해 버려야 독균이 성종을 하지 못합니다. 속담에 “쥐 나오기 전에 야옹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된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정치야말로 쥐 나오기 전에 야옹 해야 합니다. 쥐를 잡아먹으려는 고양이인 정부는 그러려 하지 않겠지만 만일 쥐를 살리려면 미리 야옹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가엾은 쥐 같은 민중을 살리고 싶기에 일이 아주 잘못되기 전에 파종을 합시다. 작년 선거 때 이래로 끈질지게 들려오는 총통제를 실시하려 연구한다는 말이 물론 낭설이라고 봅니다마는 만일 사실이라면 남북통일 이 중요 과제인 이때에 이 무슨 말입니까? 내 생각으로는 통일을 위해서는 정권을 내놓을 각오를 하며 운동을 해야 한다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통일은 결코 정치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문제입니다. 이때까지의 낡은 국가주의로는 정치문제이겠지, 그렇지만 새 시대의 주인인 씨알은 그것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단연 배격해야 합니다. 통일에는 정부가 주체가 돼서는 안됩니다. 정권의 통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주체가 돼야 합니다. 민족의 통합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환한 것을 잘못 보고 있단 말입니까? 분열의 원인인 그릇된 정치를 내몰면 통합은 들어갔던 칼을 뽑는 강물같이 대번에 자동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정말 통일이요, 정말 독립입니다. 외교 교섭으로 쑹쑹이 흥정으로 통일 절대 아니 옵니다. 또 속지 맙시다.
낡아빠진 영웅주의가 나라를 그릇치고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공화당의 상징이 황소 아니야요? 그것은 폭력 숭배의 영웅주의입니다.
이제 민족통합의 큰일 하려면 그 황소, 길을 들여야 합니다.
나는 인도 갔을 때 그 선거 하는 것 보았습니다. 인디라 간디의 정당의 심볼도 소였습니다. 그러나 황소가 아니고 암소요, 송아지까지 데리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참 민중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표시 아닙니까? 무서운 뿔을 뻗친 우리 황소는 그와는 다릅니다. 폭력의 숭배입니다.
나는 우리 군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다 폭력주의 영웅주의의 종입니다. 6·25가 터지던 날 나도 나가는 군인보고 울었습니다. 솔직한 말로 그때의 군대의 질,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라 위해 도둑을 막겠다고 트럭으로 나가는데 그 광경을 보니 간격해 눈물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랬는데, 전쟁 다 하고 나니 어쨌습니까? 이겼다고 축하하고, 적군을 섬멸했다고 공으로 훈장타고, 죽어도 형제 죽인 마음에 미안해 사양할 줄 알았더니 쭐렁대며 자랑하고, 그것 밑천으로 돈 벌고 뭐하고 뭐하고, 나는 참 그럴 줄 몰랐습니다.
통일되려면 이런 것 다 청산해버려야 합니다. 이 민중이 왜 이렇게 무기력한지 아십니까? 저 정치배들 때문이요 잘못된 군인 때문입니다.
해방이 됐을 때 어떠했습니까? 나도 자치회에 나가봤기 때문에 압니다. 그때에 무식 유식 잘살고 못 살고 없이 나라 위해서라면 눈알이라도 빼서 바칠 심정이었습니다. 그 기개 가지고 새 나라 못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며칠이 못 가서 다 없어졌습니다. 뭣 때문입니까? 정치가라는 것들 나와서 민중 속이고 제 뱃속 채우고 더럽게 세력 싸움 하는 것보고 낙심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더구나 6·25 이후의 정치, 특히 신흥 군인계급 일어나는 것 보고는 민중의 마음은 아주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것이 통분해 이럽니다.
개인숭배주의처럼 나쁜 것은 없습니다. 개인숭배를 시켜놓으면 민중의 정신이 죽어버립니다. 그러기에 독재적 지배자는 반드시 자기숭배를 시킵니다. 그러나 나라가 어찌 영웅 한 사람으로 됩니까? 그것은 옛날 사상입니다. 지금은 민중이 하는 나라입니다. 개인숭배가 어찌 있을 수 있습니까? 이제 영웅 명군 위대한 영도자 하는 것은 다 민족의 도둑의 별명입니다. 나는 김일성을 미워합니다. 모택동을 미워합니다. 젊은 시절에 초기의 모택동 칭찬했습니다. 그가 장개석이 어마어마하게 호위병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그런 따위 아니한다. 이 중국 천지에 나를 쓸 놈 없다” 했다 하지 않습니까? 그게 정말 참 영웅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모택동 어떻습니까? “주권은 총구멍에서 나온다” 했다지요. 밉습니다. 불쌍합니다. 그런 것들이 세계의 민중을 휘두르다니! 아니오, 영원히 못할 것입니다. 끝이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런데 이 나라도 개인숭배주의가 차차 일어나니 시대착오 아닙니까? 이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습니까? 역사를 거꾸로 끌자는 이 악과는 나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34,999,999 명이다 한 사람보고 절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누구보고 절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죽어도 아니할 것입니다.
절대로 미워서 하는 말 아닙니다. 아직도 이 정권에 개선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나는 공화당의 황소 그림을 볼 때마다 보명선사(普明禪師)의 목우십도송(牧牛十圖頌)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제 속에 있는 흉악한 수성(獸性)을 극복하고 깨닫는 자리에 가는 것을 소를 길들이는 데 비유해서 열 단계로 설명해서 한 노래입니다. 그 열 단계라는 것이 ① 미목(未枚), ② 초조(初調), ③ 수제(受制), ④ 회수(回首), ⑤순복(馴伏), ⑥ 무애(無礙) ⑦ 임운(任運), ⑧ 상망(相忘), ⑨ 독조(獨照) ⑩ 쌍민(雙泯)입니다. 첨에는 타고난 흉악한 성격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남의 곡식을 다 짓밟아 해하다가 억센 산동(山童)이 용기와 지혜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정성으로 길들이는 노력에 따라 차차 순해져서 나중에는 이끌고 때리지 않아도 스스로 말을 들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타고난 못된 성질이 바뀌어져서 흰 소가 되고 주인과 소가 서로 잊어버리리만큼 온전히 자유자재하는 지경에 간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이 그럴 뿐 아니라 한 민족의 일도 그렇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폭력주의 정치는 흉악한 황소의 짓 같아 역사의 꽃동산을 왼통 망가치지만 잘 길들이면 변화할 수 있고 그러면 나라의 일이 그 마지막 귀의 말대로 야화방초자총총(野花芳草自叢叢)의 지경에 갈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긴말을 지껄여 미안합니다마는 이만하면 그래도 이 숨막히는 현실 중에서도 마음을 좀 풀고 한 밤을 주무실 수 있을 줄 압니다
씨알의소리 1972년 6,7월 12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1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