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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자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여러 남자의 품을 전전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후미코는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후미코가 아홉살이 되던 해, 조선 청주군 부강에 사는 고모내외의 양녀가 되어 친할머니와 조선으로 떠났다. 7년간 식모처럼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별 이유 없이 학대를 당하며. 집앞 철길에서, 금강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문득 스치는 생각에 자살을 포기한다.
″그래도 세상에는 아직 사랑할 만한 게 무수히 있다″
조선에서는 외조부 호적에 입적하여 그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어렵게 입학한 학교에서 조차 따가운 시선은 이어졌다. 그렇게 학대와 차별이 지속되던 어느날, 우연히 3·1운동을 목격한 후미코는 일제의 희생물로 고통 받던 조선인들에게서 가족제도의 희생물로 학대받던 자신의 처지가 투영되어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서슬퍼런 총칼 앞에서도 당당히 만세와 독립을 부르짖는 그들을 보며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과 ′약자에 대한 연대의지′를 깨닫게된다. 이 날의 감격은 훗날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고난은 그치지 않았다. 친가에 머물며 평범한 청년과 연애를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돈이 많은 외삼촌과의 혼인을 강요했다. 곧 연애 사실마저 발각되자 파혼을 선언한 외삼촌, 아버지는 그때부터 무자비한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후미코는 도망치듯 도쿄로 상경했다. 낮에는 경제활동, 밤에는 고학을 하며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다보니 자신의 ′자아′확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다양한 서적을 읽던 중 우연히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청년 조선」에 기고된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그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한듯 황홀함을 느낀다.
< 개새끼 >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감시가 심한 조선을 떠나 도쿄로 건너온 박열은, 신문 배달부터 식당 종업원, 막노동꾼 등 가리는 일 없이 열심이였다. 학업에도 열중하였으며 의열활동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후미코는 언제나 뜨겁고 자유분방한 청년 박열이 마냥 좋아 망설임없이 사랑을 고백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교제하자.″ 이때부터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이자 굳건한 사상적 동지가 되어 조선인의 투쟁을 알리는 잡지 「흑도」와「뻔뻔스러운 조선인(太ぃ鮮人)」을 발행하고 항일단체 불령사를 결성하며 다양한 의열투쟁 및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건물과 집, 나무들이 쓰러졌고, 다리는 끊어졌으며, 도로는 땅 밑으로 꺼졌다. 불과 13초만에 수도 도쿄를 비롯한 관동지역 일대의 도시는 순식간에 무너진 곳곳에서 발생한 화재는 강한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휩쓸었고 피난민으로 북적이던 야적장에 옮겨 붙으며 4만 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14만2000명이 죽고, 3만7000명이 실종됐다. 정작 지진보다 화재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기능이 마비된 도시 속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비규환이었다. 먹을 물과 식량은 부족한데 도로가 끊겨 지원 받을 방법마저 사라지자 정부를 향한 민심은 요동을 쳤다.
″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 타
우물에 독을 풀고, 폭탄을 투척하며
폭동과 방화를 일으키고 있다. ″
소문은 불안했던 일본인들의 심리에 더욱 불을 질렀고 조선인을 향한 증오는 극에 달했다. 일본 정부는 긴급 칙령에 따라 <조선인 폭동 단속>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이른바 ′조센징 사냥′이라 불리우는 광란의 학살극이자 처참한 비극의 서막이 시작됐다.
일본 군대가 출동하고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조직됐다. 이들은 불심검문을 통해 조선인으로 확인될시 가차없이 살해하였고, 곧 도쿄의 두 개의 하천에는 조선인 시체로 붉게 물들어 흘렀다. 치안 당국은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하에 수수방관만 하다가 점차 공권력까지 위협하자 개입해보지만, 이미 약 6,661명의 조선인이 살해되고 상당수는 암매장된 후였다.
일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평소 눈엣가시였던 박열과 후미코가 속해있던 항일 단체 불령사 회원 17명도 구속했다. 조사과정에서 박열의 폭탄구입 계획이 드러나자 물적 증거는 전혀 없었음에도 진술만으로 ′황태자 암살 모의′ 혐의를 씌워 기소했고, 후미코까지 공범으로 기소됐다. 그렇게 재판을 앞둔 두 사람은 빠져 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을 직감하고 천천히 더 큰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박열은 재판에 앞서 요구 조건을 걸고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법정에서 침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재판장은 말도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세간의 관심이 주목된 대역 사건 재판이 꼭 필요했던 그들은 ″사법부의 체면을 살려 달라″며 조율을 부탁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재판은 시작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등장한 박열은 화려한 조선 예복을, 후미코는 3·1운동의 상징인 검은색 치마와 하얀색 저고리를 입고 등장하자 재판부는 ′특별 방청석′을 제외한 방청은 재판 개정 20분만에 금지했다. 박열이 ′방청을 공개하라′ 소리쳤지만 판사가 기각하자 박열은 더이상 요구하지 않았고, 백 오십여명 정도가 앉아있는 특별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단 한 명의 조선인이 보였다.
「 그들은 범죄에 있어서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켰지만
사랑에 있서서도 세계적인 승리자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두 사람이 손 잡고 꽃 구경 갈 날이 없을지라도,
둘의 깊은 사랑의 정은 영원토록 변함 없을 것이다. 」
<조선일보 1926.03.04 이석기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생활 중 도쿄로 유학을 떠난 ′이석′은 현지에서 박열·후미코 재판에 유일한 방청객으로 취재하여 생생한 법정 스케치를 보내왔다.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의 극심한 보도 통제와 왜곡된 기사가 빗발치던 당시에도 위험을 무릎쓰고 현장에 특파되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등 항일 보도에 앞장섰다.
재판장은 기립을 명했지만 두 사람은 따르지 않았고, 이름을 묻자 곧장 조선어로 ″박열″,″박문자″라고 대답했다. 박열은 약 한 시간정도 ′나의 선언′을 낭독하였고 정확한 범행 동기를 묻는 재판장에게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어′로 답변을 이어갔다.
박열 ″ 일본은 3.1 만세운동에 조선인의 혀를 자르고 전기로 지지고 여인의 음부에 쇠꼬챙이를 꽂았다. 얼마 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기억한다. 무고한 조선인 육천명이 죽었다. 죽창과 일본도로 찌른 것은 기본이요, 양손을 묶어 강 속에 던지고, 산 채로 불 속에 던지고, 오토바이에 몸을 묶어 달렸다. 감히 사람이 할 짓인 것이냐? 너희는 만행을 묻으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발악할수록 드러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요, 역사의 흐름이다. 너희들 스스로 문명국이라 하지 않는가? 국제사회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증인들의 증언을 취합하여 유골이 묻힌 곳을 발굴하라. 유골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가 광인일지어니 전향하여 천황의 열렬한 신봉자가 될 것이다. 이의 있는가? ″
후미코 ″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천황제 사상은 민중의 생명이나 자아를 박탈시키는 것이며, 권력을 이용하여 이익을 탐하기 위해 아름다운 형용사로 포장한 것 뿐이다. 따라서 이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특권 계급의 노예가 되는 것임을 경고한다.″
끝이 보이는 싸움이었던 외로운 투쟁이었지만 두 사람은 무죄를 증명하거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제국주의와 천황을 비웃었고, 무고한 조선인들에게 행한 일제의 만행을 비판했다. 오롯이 서로만를 의지하며 호기롭게 재판장을 뒤흔들었다.
일본 재판 역사상 유례 없는 황태자 암살 모의 혐의를 쓴 ′대역 사범′을 변호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누구도 나서기 쉽지 않은 외로운 법정 공방에 기꺼이 목소리를 보태준 한 일본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일제의 만행과 식민통치를 철저히 비판하며, 조선 독립을 지지하던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였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검사로 활동하던 중 불합리한 기소 명령과 경직된 법률 적용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된 이후「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하다」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일본의 한반도 강제 병합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독립 운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청년들의 사건이라면 무료로 자임하였고, 이 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였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사′를 도왔다. 1946년에는「조선 건국 헌법초안」을 완성후 조선으로 돌아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선물로 건내며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던 ′조선인들의 진정한 친구′였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0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최초의 일본인이다.
이번 사건의 시발점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태가 발생하자 일본 계엄당국과 경찰서를 방문해 야만적 행위를 따져 묻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겁에질린 조선인 100여명을 보호하였으며, 직접 사죄의 뜻을 담은「세계에 변명할 방법이 없다」는 사죄문을 써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기고하는 등 공정한 인권적 시각으로 자국의 포학한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법조인이었다.
박열과 후미코의 재판에서도 이들의 독립운동과 사상투쟁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또한 일본이 조선인에게 저지른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시키는 악순환을 논리적으로 꼬집으며 시종일관 ′억울한 누명′을 쓴 두 사람에게 무죄를 주장했다.
1926년 3월 25일 후세 변호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언도됐다. 예상했다는 듯 의연하게 듣던 후미코는 판사를 향해 만세를 외쳤고, 박열은 수고했다며 조소를 띄었다. 이 태도의 침착성, 이 사상의 일관성, 이 생사의 초월성은 만세에 있어 사상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판결이 난지 열흘만에 두 사람에게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천황의 은사장이 내려왔다. 조용히 받아들었다고 전해진 박열과 달리, 후미코는 일본의 기만술책을 비웃었고, 형무소장 앞에서 보란듯이 은사장을 박박 찢어버리며 말했다.
붉은 마닐라 삼줄을 이용해 창의 철봉에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는 것이 형무소 측의 공식 발표였으며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의 유품으로는 빗 3개와 현금, 만년필, 세 권의 책 그리고 빽빽하게 쓰여진 세 권의 노트가 전부였다. 유서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노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형무소 측에서 검게 칠한 후 찢어버렸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
후미코의 자살 소식에 후세 변호사와 흑우회 동지들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형무소를 찾아가 부검을 요구했다. ′임신중이던 그녀에게 낙태수술을 감행하다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었으나 다툼 끝에 부검을 진행한 결과 이미 사망한지 7일이나 지나 정확한 사인을 밝히지 못한 채 화장하여 임시로 후세 변호사 집에 안치하였다.
박열의 형 박정식은 연락을 받고 유골 인수를 위해 도쿄로 갔지만, 일제가 방해하면서 직접 가져오지 못하고 경북 상주경찰서가 인수받았다. 상주경찰서는 가네코의 유골을 문경읍 팔영리 주흘산 밑에 가매장해버린 후 제사조차 치루지 못하도록감시하였다. 일본은 훗날 그녀를 추모하지 못하도록 유골을 도굴하려는 시도까지 하였으나, 그녀의 동지들의 도움으로 막을 수 있었다. 살아서도 외로웠던 그녀는 죽어서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고 해방때까지 버려져있었다.
1945년 10월 27일, 해방 후에도 석방되지 않았던 박열은 동료들의 탄원 시위 끝에 정치범 석방 포고령을 받고 22년 2개월만에 홋카이도 아키타 형무소에서 출소했다. 새파란 청년이었던 그의 나이는 어느덧 44살의 중년이었다.
출옥후 그는 우익 교포단체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의 단장을 맡으며 활발한 반공활동을 펼쳤다.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글까지 신문에 기고하며 우익적인 색채를 표출했다. 김구 선생의 부탁으로 일본의 형무소에 버려져 있던 순국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 송환을 무사히 마쳤으며 이듬해 장의숙과 재혼후 영구 귀국했다. 그리고 후미코의 기일이면 하루 종일 집안에서 정좌하고 묵상하며 추모했다고 알려져있다.
1950년, 6.25전쟁 발발하자 아내 장의숙은 남하할 것을 권유했지만 ″국민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며 잔류하던 박열은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다. 대부분의 납북 인사들이 북한의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는 끝내 살아남으며 1956년 남한 출신 인사들 중심으로 결성된 북한단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활동 소식 이후의 행적은 묘연했다. 그리고 1974년 1월 17일, 북한 당국은 박열의 죽음을 알렸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은 결국 그렇게 끝났고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박열의 전향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쩌면 그는 단순한 사회주의자나 반공주의자도 아닌 오직 해방과 자유, 그리고 애국을 위한 수단으로 그 이념을 선택했을 수 있다. 지금이라면 ″설마 이 사람이″라고 생각할만한 인물까지 전향의 뜻을 표명하고 친일로 전락한 아픈 역사가 있기에 고통스런 진실일지라도 직시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박열이 남긴 전향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나 자신도 천황폐하의 적자이자 권속이니만큼 그 신분에 맞는 책임을 분담하는 영광을 주셨으면 한다″
<내무성 경보국 월보(月報) 4월호>
″저 역시 천황폐하의 적자로서 응분의 책무와 분담의 광영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면 매우 기쁘다″
<동아일보 1935년 8월9일자>
″우리 조선인은 자기의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 하루속히 일본인과 합체하여 신민족을 형성하고 내선융화를 완성하여 일한병합의 결실을 거둘 필요가 있다″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사상휘보」 제16호 1938년 9월>
″전향 이후 일본인으로 살아간다고 맹세한 이상, 사회가 받아주지 않아도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출옥전 형무소에서 야마가타신문 기자에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지금까지 내가 체험한 것을 활용, 조선인으로서 조선을 위해 일하고 싶다. 일본을 적대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다″
<출옥 당일 아키타사키가케 신문사에서>
″천황제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일본의 전체주의와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와 국민을 강압하는 경우는 절대 반대하며 감히 말하건대 말살하고 말 것이다″
<11월 20일 야마가타시 강연회>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돼 있다.
전향한 경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전향서의 문투가 박열의 문체와 다르며, 화젯거리였을 ′박열의 사상전향′은 일간신문이나 대중 잡지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또한 사상 전향의사를 밝힌 유사 사례들과 달리 감형이나 석방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가 출옥했을 때 김구 등 독립투사 동지들이 반감 없이 환영했다는 점이다.
부분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그가 남긴 전향기록에 대해 누군가는 ′일제에 의해 날조된 허위정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날조·허위라는 논증 또한 충분하지 않기에 완전히 부정됐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박열의 전향 논란과 월북 여부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어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비교적 늦은 198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서슬퍼런 제국주의 심장에서 대한의 독립을 외치던 그녀는 누구보다 열렬한 반일론자이자 혈기왕성한 항일투사였다. 일본 여성으로서 세간의 인식을 무릅쓰고 가부장적인 당대 사회의 관습을 벗어나 식민지 조선 청년을 사랑했다. 권력이 부여한 삶에 대한 최후의 저항으로 자유로운 죽음을 선택하며 그토록 바라던 평등한 세상을 맞이하지 못한 채 순국의 길을 걸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스물 셋, 그녀는 가장 불량하고 화려한 청춘을 완성했다.
후미코의 묘지는 1973년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2003년에는 박열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후미코의 묘소도 기념관 옆으로 이장되었다. 그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가네코 후미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 이후 두 번째 사례이다.
조선의 아픔을 이해하는 수 많은 외지인들과 함께 꾸었던 혁명의 꿈과, 함께 외친 자유와 평등은 우리가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원동력이자 기나긴 투쟁에서 승리하는 발판이 됐다. 이것은 과거의 조선과 현재의 대한민국, 그리고 이들이 일구어낸 민주주의의 역사이자 오래도록 기억될 가치이며 특정 전문가의 지식이 아닌 일반 대중의 상식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새들도 힘에 겨워 쉬면서 넘는다는 ′새재′의 고장 문경, 조선 청년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일본여인의 무덤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고향 한자락에 또 한 번 외롭게 남겨졌다. 죽어서도 남북으로 갈라져 함께하지 못하는 그녀의 삶이 참으로 애달프다. 그녀의 영생에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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