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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0:30-37절 “예수님의 인격 1”
저를 포함해서 요즘 부모들은 자식들이 손해보는 일은 될수 있으면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너무 지나칠 정도가 아니면 약게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자기 몫에 대해서는 좀 악착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솔직한 부모의 심정으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사실 걱정이 됩니다. 만약 내 자식이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요? 정말 내 자식이 자기 시간과 돈을 쓰면서 뒷골목에서 강도를 만나 피흘려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옮기고, 치료비 보증까지 서고 돌아왔다면 ‘참 잘했다.’고 칭찬하며 좋아할 부모일 수 있겠습니까? 지나치게 자식을 걱정하는 분들은 ‘너 미쳤냐? 네가 제 정신이냐?“고 야단을 칠지도 모릅니다. ”너 말고 다른 사람으 뭐하고 왜 너 혼자 다 책임지느냐?“고 야단을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고, 남의 아들 이야기니까 참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지, 내 자식 일이라면 박수칠 부모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겉은 그리스도인 같은데 우리 속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신앙인격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9월 설교주제가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사전에 보면 인격이란 사람의 됨됨이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인격이란 개인의 성격에 지성과 도적적인 요소를 첨부한 개념입니다. 즉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인격입니다.
작가 최복현 선생은 인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호수에 물오리들이 앞으로 나아갈때 저절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부지런히 두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훌륭한 인격자는 남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행동하지만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한결같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인격은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의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생활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티나게 행동합니다.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정직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 무례하고, 거칠고, 위선적으로 행동합니다. 한마디로 훌륭한 인격의 사람은 한결같은 경우에 따라서 말과 행동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상황속에서 한결같은 삶의 가치관(동일한 행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한국사회에는 누가 보던 말던 한결같이 행동하는 인격자가 많을까요? 사람들을 의식하며 보여지는 생활과 실제의 생활이 다른 위선자들이 더 많을까요? 2003년 서울대 정신과교실 연구팀이 한국 20세 남성의 인격 장애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한국의 20세 남성 10명 가운데 4.5명이 ‘미성숙 어른’으로 나타났고 20세 남자 2명 가운데 1명이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 대인 관계나 사회 생활에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고 되었습니다. 1979년에 출생한 남자 5천 9백 19명을 대상으로 징병 검사 전에 성격 진단 설문지를 배포해 분석한 결과 조사 대상자 가운데 44.7%가 인격 장애가 의심되는 기준인 30점을 넘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 책임자인 서울의대 권준수 교수는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도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인격 장애 가능 수치를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20대 10명중 거의 절반이 미성숙 어른 즉 성인아이라는 사실입니다. 외형적인 성장은 있었지만 인격적인 성장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 이유는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훌륭한 인격자들을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의 지도자들은 업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의욕이 강해서 목적을 성취하는데만 급급할 뿐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부정직과 불공정과 음모와 뇌물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인격적인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자 조지 바나는 물밖의 물고기란 책에서 메리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메리는 미국 아이비리그의 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하고 바로 MBA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몇년간 그녀는 유명한 회사들을 옮겨 다니면서 승진했고, 30세가 되기 전에 뉴욕에 있는 큰 출판사의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에 메리는 그 회사의 이사회로부터 같은 법인 하에서 새로운 출판사를 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사회가 메리를 선택한 것은 그녀의 리더십 때문이었지만 창업한지 5년이 되자 메리의 회사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메리가 아무리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해도 뛰어난 직원들이 몇 달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힘들게 구한 저자들은 계약이 완료되자마자 다른 출판사로 떠나 버렸습니다. 실망한 이사회는 메리의 동료와 계약자들의 말을 듣고 그녀를 해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 도둑질, 구걸, 사기등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메리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아치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인격은 우리의 일상의 행동과 가치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훌륭한 인격이란 상황에 따라서 급박하게 변하는 대신 안정되고 일관된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그 인격의 신실함과 올바름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려면 인격은 신뢰할 만하고 변하지 않는 표준에 기초를 둬야 하는데 그 표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택하고 앞으로 전진하는데 지침이 됩니다. 그리스도인 리더에게 성경은 인격 형성을 위한 지혜의 보고입니다. 당신의 내면에서 밖으로 표출되는 당신의 인격은 어떠한가?
만약 여러분들이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속에 나오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했겠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춰 언덕을 내려가서 그를 부축하여 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주고, 더 들지 모르는 치료비까지 부담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러서 확인해야 하는 모든 부담스러운 일을 기꺼이 감당하겠습니까? 돈도, 시간도, 마음도 부담스러운 이 선행을 할 것인가? 만약 우리의 솔직한 대답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학자들을 비판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알았지만 아는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겉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처럼 보였지만 속에는 탐욕이 가득하고,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지키라고 하는 위선자였던 것입니다.
마23:25-28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참된 신앙인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삶이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언덕을 내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신 예수님의 인격은 무엇일까요?
먼저 주님의 인격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행하는 선행입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댓가를 바라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무척 힘든 존재입니다. 지난주에도 은행에서 앞사람이 두고 간 18만원 찾아줬는데 만원도 안주더라구요. 물론 제가 돈 만원 뭐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이지만 주면 좋잖아요? 선행을 하고,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인정받고, 댓가를 받고 싶은 마음 자연스러운 마음 같아요. 그런데 본문이 말하고 있는 위대한 예수님의 인격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 이야기에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가 덧붙여 있으면 좋았을지 몰라요.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엄청난 부자여서 그 사마리아 사람은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았다. 선행을 장려하기 위해 이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댓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는 선행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묻는 것입니다. 너는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네 시간을 쓰고, 물질을 쓰고, 마음을 다 기울이는 것이 가능하겠냐?고 묻는 겁니다.
2005년 11월 21일 이른 새벽 소록도선착장에는 첫 배를 타기 위해 나온 수녀님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의 손에는 43년전 이 섬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다 헤진 손가방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얼른 보기에 뭍으로 나들이를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행선지는 오스트리아. 파란 눈의 수녀님 두 분은 70대 은발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록도 선착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들이 떠난 후 텅 빈 방에서는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라고 적힌 한 장의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국내 의료기술의 향상과 고령의 나이로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일이 없고, 한센병 환자와 주민들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줄까봐 말없이 떠난다는 내용이 A4 용지 두 장에 촘촘히 적혀 있었습니다.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이 편지로 용서를 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들은 1962년 20대 중반의 나이로 소록도에 찾아온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였습니다.
고국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소록도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낯선 나라에 왔습니다. 의사들도 마스크를 쓰고 고무장갑을 손에 끼고 환자들을 돌보던 때에 이 수녀들은 도착한 다음날부터 맨손으로 문드러진 한센씨병 환자들의 팔과 다리에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주었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는 2000년 대장을 1m이상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고 다시 소록도로 돌아왔습니다. 동화작가 강무홍씨가 그녀들의 이야기를 소록도 큰 할매 작은할매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이 두 수녀님의 43년간의 섬김의 댓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들은 1996년에 국가에서 주었던 국민훈장 모란장의 상금과 정부보조금 10만원과 고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마저 모두 다 주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 두 수녀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두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위대한 주님의 인격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란 영화에 조로증에 걸린 한 소년의 옆집에 사는 한 노인이 등장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촬영할 때 PD가 소년과 어떤 관계냐?고 묻자 노인이 대답합니다. “같이 늙어가는 친구”라고 불치병의 소년과 노인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마친 주님은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율법학자는 말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그 율법학자와 비슷합니다.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양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 중심에서 누가 회목하게 하는 직책을 자기 일로 여기고 감당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세월호 유족들의 단식현장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 만나면 네 탓만 하는 여야의 정치인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절대로 친구가 될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 지독한 분열과 차별앞에서 우리는 ‘그 사람도 내 이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친구가 되어주신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명백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 예수님은 그녀의 가능성을 믿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돌을 내려놓도록 그녀를 지켜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인격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더 많은 이웃의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난민들, 필립핀 스모키 마운틴 지역의 어린이들, 그리고 이 나라와 세계 각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찾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강연가이자 저술가이며 미국 IVF 간사를 역임하고 지금은 현재는 IVF의 전도 자문위원인 레베카 피펏의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속의 한 이야기로 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날 빌은 갑자기 예배가 드리고 싶어 교회에 갔습니다. 언제나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구멍 난 옷과 청바지를 입고 맨발로 교회에 들어섰죠.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자리를 찾아 빌은 앞쪽으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흘기며 빌을 쳐다 봤지만 예배중이라 아무도 뭐라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강단 앞까지 갔지만 결국 빈자리를 찾지 못해 강대상 앞의 빈 공간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모든 교인들은 교회안에서 그런 행동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빌이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교회당 뒤쪽에서 집사님 한 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집사님은 팔십세로 은빛 머리에 정장을 한 신사였는데 신앙심이 아주 돈독했고, 예의바른 분이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빌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교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집사님이 저 젊은이에게 어떻게 하든 저분을 비난할 수는 없어. 저토록 점잖으신 분이 어떻게 저런 대학생을 이해할 수 있겠어.’ 교회는 쥐죽은 듯 고요했고 오직 집사님의 지팡이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리고 빌 곁에 다가 간 집사님은 바닥에 앉아 있는 빌 옆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그리고 빌과 함께 그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인의 뜻밖의 행동에 사람들은 놀랐고, 곧 노인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날 예배당에 있던 교인들은 모두 감동으로 목이 메었다. 정신을 차리신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설교를 시작했다. “여러분은 오늘 제가 할 설교는 금방 잊을지 모르지만, 방금 보신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비난하는 대신 그를 지지 하는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를 떼어놓는 대신 품안에 품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요15: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