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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정시대 純淨時代 원문보기 글쓴이: 淨傳
제12강 6바라밀 수행[六度萬行]
이 강의는 대승불법에 대한 겁니다. 대승의 포괄 범위는 아주 넓지만, 수행과 공부의 강령은「6도(六度)」로 귀납됩니다. 어째서 이 여섯 조목으로 귀납되느냐 하면, 이른바 불법이란 것은 사실 상대적인 기초 위에 건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병이 있을 때에 불법은 약물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에게 병이 없다면 불법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법(法)」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금강경》에서는 말합니다.「법마저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法尙應捨, 何況非法]」. 병이 있을 때에는 이 법이 필요하지만, 병이 나으면 이 법도 필요 없습니다.
1) 6바라밀[六度]
이 표에서는 먼저 우리에게 어떤 병이 있는지 봅니다. 이건 꼭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1. 탐내는 병인「탐간(貪慳)」입니다. 이것은 병의 뿌리로, 무량무변한 번뇌 업장과 생사윤회가 모두 다 이로부터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악업과 성냄[瞋恚]에서 어리석음[愚痴]까지를 포함한 모두가 탐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모든 병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살의 수행은 근본부터 뽑아 버립니다. 그러기 위해 방법을 찾아 다스려야[對治] 합니다.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았다면 치료할 방법을 찾아서 효과 있는 방법으로 이 병을 다스려야 합니다.
「탐(貪)」이란 탐내어 구하는 것입니다. 범부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비단 세간의 명리 및 이익과 5욕 6진을 지치지 않고 탐하는 것뿐이 아니라, 삼계 밖의 불법에 대해서도 탐냅니다. 불법은 탐심을 끊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탐심으로 불법을 탐내면 결과는 번뇌만 키울 뿐 얻을 수는 없지요. 그러므로 불교 공부를 하려면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탐심으로 공부하여서는 안 되며 탐심으로 구해서도 안 됩니다.
아낌[慳吝]과 탐냄[貪]은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얻은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간(慳)」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병의 뿌리로, 불법에서는 곳곳에서 이것을 간파하여 놓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미혹이 무엇이고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이른바 미혹이라는 것은, 탐내고 아끼는 것이 병임을 알지 못하고 그래도 되는 좋은 일인 줄 아는 그것이 바로 미혹입니다. 깨닫고 나면 그것이 병의 뿌리여서 끝없는 고통과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만약 진정으로 마음속에서부터 아끼고 탐내는 마음을 뽑아 버린다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무량한 번뇌는 108개로 정리할 수 있는데, 108번뇌를《백법명문론(百法明門論)》에서는 다시 26가지로 정리하였고, 26가지를 다시 정리하면 6개의 근본번뇌가 됩니다. 6개도 그래도 많다면 탐진치의 3독(毒) 번뇌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3독이 있으면, 마음속에 독소가 있어서, 그 과보가 바로 생사윤회이니까요.
3독 번뇌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무거울까요? 만약 이것들을 다시 하나로 정리한다면 바로 간탐(慳貪)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행법에서 보시를 첫 번째에 놓은 것입니다. 보시는 간탐에 대응하는 것이니까요.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재물」보시 : 재물은 안의 재물[內財]과 밖의 재물[外財]로 나눕니다. 바깥 재물은 몸 밖의 재물, 즉 돈이나 물품 등이지요. 안의 재물은 신체인데, 예를 들면 자원봉사처럼 노동력이나 지혜나 기술로 사회 대중에게 봉사하는 것이 내적인 재물의 보시입니다.
안팎의 재물 일체를 필요로 하는 중생에게 베푸는 것을 재물보시라고 부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면 줄 수 있는 것, 다른 사람에게 공양하고 다른 사람에게 증여할 수 있는 것은 마음 바닥이 청정하여 탐내는 생각이 없어서이지요. 보시는 버리는 것,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버릴 수 있다면 청량함과 자재함을 얻고 지혜가 열립니다.
2.「제법(諸法)」보시 : 제법이란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괄합니다. 세간과 출세간의 법 가운데 자기가 아는 것을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제법보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을 누가 와서 가르쳐 달라고 청할 때에,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아는 대로 모두 가르쳐 준다면 그건 법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열이지만 남에게는 한 세 가지만 가르쳐 주어서 절대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법을 아끼는 것이지요. 탐내고 아끼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3.「무외(無畏)」보시 : 중생들은 재난과 위험을 만날 때에 마음에 공포와 두려움이 일어나는데, 여러분이 그들을 도와서 공포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안온하게 해주는 것을 무외보시라고 부릅니다. 이 세 가지 보시를 한다 해도 탐내고 아끼는 마음을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바라밀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저 보시일 따름이지요.
이 세 가지 보시를 닦으면 복보를 얻습니다. 재물보시로 얻는 과보는 재물이 모자라지 않는 것이므로, 돈을 보시하면 큰 부자가 됩니다. 세간의 부귀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재물보시를 닦아서 된 것입니다.
법보시로 얻는 과보는 총명과 지혜입니다. 세간 사람들은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차이가 있는데, 이런 불평등이 바로 과보이지요. 왜냐하면 과거의 생에서 닦은 법보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외보시로는 건강과 장수의 과보를 얻습니다. 재물에 인색하면 빈궁의 과보를 얻고 법에 인색하면 어리석음의 과보를 얻습니다.
무외보시를 행하지 않으면 몸에 병이 많고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보시는 일체의 불법을 포괄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재물보시와 법보시와 무외보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닦고 배우는 것들이 이 세 가지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청정하고 진실 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일체 중생과 사회와 백성에게 봉사하면서 이익을 구하지 않는, 이것이 보시입니다.
불보살이 베풀 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의 세계는 소유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간 사람들이 보시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몸과 마음의 세계가 진짜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속에서 탐내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얻어도 걱정 잃어도 걱정입니다. 단지 자기만을 위할 줄 알고 중생을 위할 줄은 모르지요.
보시를 닦은 공덕을 두 가지만 들어 보면, 첫째는「원한을 제거하는 것[除怨]」이고 둘째는「모자라는 게 없는 것[不乏]」입니다. 재물과 제법과 심신의 건강 및 장수 등, 모든 것이 다 구족되어 결핍이 없지요. 원한을 제거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세간 사람들이 하는 말에,「한 집안이 배부르고 따뜻하면 천 집안의 원한을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돈을 벌어서 부자이지만 어질지는 않아서 다른 사람을 돕거나 구제하지 않는다면, 동네의 이웃들이 다들 원한을 갖겠지요.
여러분 집에 도둑이 들어도 사람들은 빤히 바라만 보며 신고도 안하고, “잘 훔쳐갔다”고 할 겁니다. 오히려 “저 집엔 물건도 많을 텐데 많이 좀 가져가지” 할 겁니다.
여러분 집이 불에 타도 사람들은 와서 꺼주려고 하지 않고, “불나서 시원하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부자이면서 자주 보시를 하여 사람들을 구제해 주었다면, 모두들 원한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경까지 하겠지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큰돈을 버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마을과 이웃을 두루 구제하는 이런 자선사업과 복지사업을 많이 하니까요. 보시로 얻는 공덕과 이익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앞의 두 가지는 다 세간의 이익을 말한 것이고, 불법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요. 불법의 목적은 장애를 없애는「장애 제거[去障]」에 있지, 원한을 없애는 일이나 모자람이 없는 일 따위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보시의 목적이 하나를 베풀어 만 가지 보답을 얻는 것이라면, 이것은 세간의 과보이므로 삼계를 초월할 수 없고, 구경 원만한 공덕의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삼계를 초월하여 생사를 마치고 명심견성 하고 싶다면, 장애를 제거하여야만 합니다.
불교 공부를 하는 사람이 보시를 닦는 목적은 아끼고 탐내는 마음을 끊는 것입니다. 재물보시는 결코 부자 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법보시는 결코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무외보시도 건강과 장수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병의 뿌리를 제거하기를 구하는 것이지요. 만약 여기에 목표를 둔다면 이것이 바로 보시바라밀이며 비로소 6도(六度)라고 할 수 있어서, 간탐(慳貪) 번뇌를 건너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 의미를 알아서 결코 원한을 제거하고 모자람이 없는 데에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간의 과보를 얻는 것일 뿐, 삼계를 초월할 수는 없어서 세간의 과보를 다 누리고 나면 또다시 떨어지고 말 테니까요. 세간의 복보란 누리다 보면 결국 끝이 납니다. 세간법은 무상하여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계 (持戒)」: 지계는「악업(惡業)」에 대한 것입니다. 범부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일체의 조작이 악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음과 생각이 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업 가운데 특히 무서운 것이 악업인데, 악업의 과보는 3악도이기 때문입니다. 3악도의 과보를 받기 싫으면 반드시 악업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악업을 짓지 않으면 당연히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악업을 제거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계율을 지키는[持戒] 겁니다. 지(持)는 보호하여 지켜서 잃지 않는 것이고, 계(戒)는 계율입니다. 계율은 선업으로, 악업의 반대이지요. 계율도 세 가지로 귀납됩니다.
1.「율의(律儀)」계 : 율(律)은 조문으로 규정한 것으로 법률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5계나 10계, 보살계, 비구계 같은 것들은 모두 조문이 있는 거지요. 의(儀)는 거동이며 모습입니다. 계율 중에는 위의(威儀)에 관한 것이 아주 많은데, 위의란 작은 규칙입니다. 작은 규칙까지도 범하지 않아야 위의를 범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예절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 예절과 규율은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지요.
2.「선법(善法)」계 : 일체의 선법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선근을 자라게 하니까요. 비록 계율에는 없더라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지켜야 할 계율[持戒]에 넣습니다.
3.「익중(益衆)」계 : 자기의 몸과 마음에 좋은 것은 아니지만 중생에게 좋은 것,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보살이라면 마땅히 자기를 버려 남을 위해야 합니다. 이것은 보살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살은 능히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성취시켜 줍니다.
지계의 공덕은「청량(淸凉)」과「해탈」입니다. 계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자리가 청정하고 번뇌가 적습니다. 해탈은 자재인데 계율이 청정하면 자재를 얻게 됩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계율은 사람을 묶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자유자재를 얻고 일체의 무명과 번뇌를 제거해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욕(忍辱)」: 인욕은 성냄[瞋恚]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진에(瞋恚)」: 3독 중에서도 이것은 아주 무거운 번뇌이므로 과보도 아주 무섭습니다. 간탐은 아귀도의 업인이고, 진에는 지옥도의 업인이지요. 불법에서는「불길이 공덕의 숲을 태운다[火燒功德林]」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불이 바로 진에의 불입니다. 공덕은 정혜(定慧)를 가리킵니다. 한 번 화를 내면 선정[定]이 없어지고 지혜도 없어져서 정혜가 다 불타버리지요. 복덕은 불에 타지 않지만 공덕은 불타버립니다.
공덕은 번뇌를 끊고 무명을 깨뜨릴 수 있지만, 만약 성내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번뇌와 무명은 반드시 커집니다. 이 병의 뿌리를 뽑아 제거하기 위해서 보살은 인욕바라밀을 닦습니다. 6도에서는 인(忍)만을 말하고 있고, 욕(辱)은 경전을 번역한 대덕들이 덧붙인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인내심이 많아서 아주 잘 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참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욕(辱)」은 참지 못하지요.「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 不可辱]」는 말이 있지요. 죽는 것은 참을 수 있어 별 상관이 없지만, 모욕은 참지 못합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모욕을 아주 큰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번역하던 조사 대덕들은 사람이 모욕을 참을 수 있다면 다른 무엇인들 참지 못할까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忍) 뒤에 욕(辱)을 붙인 것은 바로 중국인을 겨냥한 것이지요. 모욕을 참을 수 있으면 어떤 법도 참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참으려면 지혜가 있어야지,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인욕을 할 때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인욕바라밀은 광대하고 끝이 없게 되어서 모든 것을 지혜로 바꾸고 선정으로 바꿉니다. 인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1.「인해(人害)」: 다른 사람이 온갖 방법을 써서 방해하고 해쳐도 여러분이 참을 수 있으려면, 반드시 이 속에 있는 이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저 사람은 왜 나를 방해하고 해치려고 할까? 저 사람은 왜 다른 사람은 방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해치지 않을까?’
불문(佛門)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요.「물 한 모금, 음식 한 입도 이전에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 없다[一飮一啄, 莫非前定].」그 사람이 여러분을 해치는 것은 과보입니다. 과의 앞에는 반드시 인이 있게 마련이지요. 만약 진정으로 이것을 깨닫는다면, 참는 것이 빚을 갚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채무를 갚아버리면 이제 괜찮겠구나’ 생각할 수 있겠지요.
보살은 세간에서 깨달은 사람인데 보살도 상해를 받을까요? 받습니다. 피할까요? 피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이 빚이 꼭 갚아야 하는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아니까요.
안세고(安世高)도 중국에서 두 번이나 목숨 빚을 갚았습니다.《고승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요. 그는 신통력 중에 타심통(他心通)이 있었습니다. 피하고 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원수진 빚쟁이와 마주치지만 않으면 그를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의로 빚쟁이를 찾아가 맞아서 죽음으로써 목숨 빚을 갚았습니다.
그리고는 후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또 그 사람과 만나 친한 친구가 되어 원한을 풀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범인은 미혹되고 전도되었기 때문에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서 끝이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모든 일을 다 끝을 맺고 절대 보복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에 인욕선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리왕(歌利王)이 인욕선인의 몸을 분해하였는데, 이것은 일종의 능지처참과 같은 것으로 칼로 한 칼 한 칼 서서히 가르는 것이지요. 이 형벌은 너무나 잔혹하여 형을 받는 사람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인해(人害)」인데, 이 보살은 받아들이면서 성내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인욕바라밀이 원만해졌습니다.
여러분이 보살도를 닦으려고 발심하면 언젠가 꼭 이런 날이 올 겁니다. 마치 여러분이 공부를 하면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시험을 치루고 만점을 맞으면 인욕바라밀이 원만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우리에게 대항하고 해치는데도 전혀 화내는 마음이 없는, 이것이 원만한 인욕바라밀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조금만 해를 입혀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면, 무슨 보살도를 공부한다고 하겠습니까?
2.「세고(世苦)」: 세간의 고난을 참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아와 한파의 고통이나 물질적인 환경의 결핍으로 오는 고통들을 모두 참을 수 있어야지요. 이것도 자기의 업력에 속하는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재물의 결핍은, 과거생에 재물보시를 닦지 않아서 오늘날 결핍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인과가 상응한 것이니, 오늘 이 빈궁함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고 인과응보임을 알아차립니다.
만약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고 싶다면 인(因)을 닦아야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을 갖고 싶거든 재물보시를 많이 하십시오. 재물이 결코 모자라지 않을 겁니다. 보시를 닦지 않는다면, 이 일생 동안 많은 결핍을 반드시 참고 견뎌야 합니다.
3.「수법(修法)」: 불법을 수학하려면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법의 수학은 무량겁의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성취되므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인내심이 없으면 성취할 수 없지요.
인욕선인은 오로지 인욕바라밀을 닦으며 5백세를 수행했습니다. 중국인의 계산법으로는 1세가 30년이니, 5백세를 닦았다면 상당히 긴 시간이지요. 이렇게 하여서야 비로소 인욕바라밀을 원만하게 닦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수행에 인내심과 항심(恒心)을 가지고, 마음에 새겨 잊지 않아야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퇴보하고 타락하는 것은 모두 인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사람들은 한 스승을 가까이 하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모셨습니다. 《고승전》에는 선지식 한 분을 20년, 30년씩 가까이 모신 예가 많이 나옵니다. 스승과 도반이 있어야 동학들은 서로 절차탁마하고 스승은 길을 일러 주어서, 비로소 성취할 수 있으니까요.
법을 수행하는 데에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행문(行門)과 해문(解門)을 막론하고 모두 다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강미농(江味農) 거사나 주지암(周止菴) 거사처럼, 평생 한 가지 경전에 매달려 40년을 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취한 사람은 우연히 어쩌다 얻은 것이 아니지요. 이런 굳센 힘과 인내심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다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들이 좋은 말을 했지요.「천하에 어려운 일이란 없다. 다만 마음먹기에 달렸다[天下無難事, 只怕有心人].」인내심이 있고, 인욕의 마음이 있으면 꼭 성취합니다.
인욕의 공덕 :
1.「잃지 않게 한다[不失]」:《금강경》에서는 6도 중에서도 특히 보시와 인욕을 강조하였습니다. 보시는 공덕을 닦을 수 있는 것이고, 인욕은 공덕을 보호하여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2.「성취하게 한다[成就]」: 보호하여 지키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세간 출세간의 법을 모두 성취할 수 있지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작은 일을 참지 않으면 큰 계획을 그르친다[小不忍則亂大謀]」.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은 모두 인내심에 달렸으니,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건 충동적으로 하지 말고 완급을 조정하며 순서대로 차근차근 해나가야 비로소 성취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조급하여 무슨 일이든 빨리 하려고만 하니, 폐단이 많습니다. 인욕은「성냄[瞋恚]」의 장애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장애를 제거할 수 있으면 인욕바라밀은 성취됩니다. 따라서 보살도를 수학하는 사람은 인욕도(忍辱度)를 닦아서 진에의 장애를 건넙니다.
「정진(精進)」: 정(精)은 정화(精華)를 얻어서 순수하고 섞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進)은 진보입니다. 하루하루 진보하기를 구하는 일을 유가에서는「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日新又新]」고 하고, 불법에서는 정진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진보하는 것이지요.
정진도 세 종류로 나뉩니다.
1.「피갑(披甲)」정진 : 이것은 비유입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사병이 투구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진격하지만 현대의 전쟁에서는 전차를 일선에 나열해 놓는 것도 피갑정진이 됩니다. 이는 용맹을 비유하는 것으로,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기꺼이 노력한다면 어떤 장애도 막지 못할 테니까요. 어떤 물건이 자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게으름과 나태함이 자기를 막는 것이지, 외부의 힘은 아무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순경(順境)이건 역경(逆境)이건 모두 장애가 아니고, 그저 자기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무서울 뿐입니다. 그건 정말 방법이 없지요.
2.「섭선(攝善)」정진 : 정진법의 내용을 말합니다. 우리의 정진은 일체 선법을 향하여 추구하고 노력하는 것이어야 하며, 절대 악법을 향해 전진하여서는 안 됩니다. 일체의 악을 끊고 일체의 선을 닦는, 이것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정진법입니다.
3.「이락(利樂)」정진 : 일체 중생에게 이익이 되고 일체 중생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이 일이 우리가 노력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일체 중생이 진정으로 복덕과 이익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것이 바로 불법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이익이고 진실한 안락이니까요. 우리 스스로 노력하고 공부하면서, 불법을 선양하고 발전시켜 일체 중생에게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공부를 돕는, 이것이 정진바라밀입니다.
정진의 공덕은「선을 키우며[增善]」「물러서지 않는[不退]」것입니다. 일체의 선법을 키워서 물러서지 않게 하는[不退轉] 이것이 우리가 당장 얻는 이익이지요. 선을 키우고 물러서지 않을 수 있다면「게으름[懈怠]」의 병은 자연히 끊어집니다. 게으름과 나태함은 일체 중생이 무시겁 이래로 가지고 있는 번뇌이니, 선천적인 번뇌라 할 수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지요. 이 번뇌가 너무 심각하여서, 우리의 세간법과 출세간법 공부를 성취할 수 없게 만들고 모두 원만하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병은 반드시 방법을 찾아 치료하고 극복하여야 합니다. 극복할 수 있다면 꼭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극복할지는 개개인에 따라 일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 병이 있음을 알고, 어떤 방법을 선택하여 이 병을 극복할지 알아야 합니다. 저는 강단에서 경전 강의를 하는 방법으로 게으름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처음 강단에 서서 강의를 할 때에는 한 시간 말을 하려면 거의 2, 30시간은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열심히 준비하지 않으면 창피를 당할 테니까요. 한 주에 한 번이나 두 번 강의하기 위해서는 한 주 내내 잠시도 게으를 틈이 없었지요. 이처럼 게으름은 심각한 장애이니, 스스로 방법을 찾아 치료하여야 합니다.
「선정(禪定)」: 이것은 대승 불법을 수행하는 관건이며 문고리입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는 다 선정을 닦기 위한 전방편(前方便)이지요. 비우지 못하면 선정을 얻지 못하고, 악업이 있거나 인욕하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하여도 선정을 얻지 못합니다. 앞에서 닦은 것들이 모두 선정을 닦기 위한 예비 공부였고, 선정이야말로 진정 중요한 수행임을 알 수 있지요.
먼저 선(禪)과 정(定)의 정의를 알아야겠습니다.「선」이란 글자는 범어의 음역이고「정」은 한자입니다. 정이란 글자가 인도어의 선나(禪那)와 아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대 사람들이 번역할 때에 이 두 글자를 합한 것이지요. 이런 번역법을 범화합역(梵華合譯)이라고 합니다.
선의 의미는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금강경》에서「상을 취하지 않는다[不取於相]」고 한 것은 선이고,「여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如如不動]」는 것은 정입니다. 선정이란 결코 매일 가부좌를 틀고 면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좌선(坐禪)이지요.
선정의 범위는 넓습니다. 좌선은 선정을 수학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요. 이 방법은 초학에게 편리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초학자들은 마음이 산만하여, 한 자리에 앉아서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마음이 움직여 망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정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데 역점을 두며, 몸은 움직여야 됩니다. 몸은 일종의 기계[機器]입니다. 기계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기계를 꼭 사용하여야 하듯이, 몸은 움직여야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면 안 되는 것은 마음이 본래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非有非無].
불법에서는 보통 원 -법륜- 으로 법을 표현하지요. 원주는 움직여야 합니다. 원주가 안 움직이면 원이 작용을 못 합니다. 오늘날의 모든 문명도 모두 원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의 중심은 움직일까요? 중심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정은 중심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역점을 두고, 몸은 움직여야 하는 것이지요.
육조대사가 황매산[黃梅]에서 여덟 달을 지내며 닦은 선정이 바로 이런 공부였습니다. 당시 황매산에는 1, 2천 명 대중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매일 절집 살림살이를 하였습니다. 나락을 찧고 장작을 패면서 온종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황매에 사는 8개월 동안 진정 그곳에서 선정을 닦은 것이지요. 그렇기에 오조스님은 법을 그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매일 선방에서 면벽하며, 한 번 자리 잡으면 며칠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말입니다.
《육조단경》은 참으로 대단한 책입니다. 이 책은 인도 경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이 직접 지은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불교의 원리와 원칙을 거의 전부 포괄하고 있습니다.《단경》이라는 이 한 책을 읽고 통달하면 모든 대소승의 법을 전부 통달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책입니다. 중국의 국보이지요. 여러분들도 진지하게 공부하고 이해하여, 선이 무엇인지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을 생활에 응용하면 걷고 멈추고 앉고 눕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일들 어느 하나도 선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술만 보더라도 중국의 회화와 서예와 조각과 미술 같은 것들이 모두 농후한 선가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예술화, 선의 생활화지요. 우리의 생명 전체를 다 선정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를 반야지혜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심ㆍ의ㆍ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분별과 집착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사유와 상상으로 만들어진 지혜도 아닙니다. 선정 가운데에서 자연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세간선정(世間禪定)」: 4선(禪) 8정(定)을 가리킵니다. 이 선정을 닦아 성취한 후의 과보는 4선천(禪天)ㆍ4공천(空天)에 있는데, 색계ㆍ무색계가 삼계 안에서 가장 수승합니다.
2.「출세간선정(出世間禪定)」: 불교 용어로 9차제정(次第定)이라고 하는데, 제9정을 말합니다. 앞의 8정은 세간의 것인데, 색계에 4종의 선정이 있고 무색계에 4종의 선정이 있어서 도합 8종이 됩니다. 선정 공부에 깊고 얕은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선정의 공부가 더 깊어서 다시 위로 초월하여 올라가면, 그것이 바로 제9정입니다. 제9정은 출세간에 속하는 것으로, 삼계 6도를 초월한 것입니다. 제9정은 소승의 아라한을 가리킵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이 닦는 것이 출세간의 선정이고, 그리고 여러 보살들이 닦는 것도 역시 출세간의 선정입니다. 모두 세간을 초월한 것이지요.
3.「상상선정(上上禪定)」: 제불과 대보살들이 닦는 것입니다. 범위를 넓혀 말하면, 모든 견성할 수 있는 선정은 모두 상상선(上上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조대사가 닦아서 전한 것이 바로 상상선정입니다. 오직 상상선만이 비로소 명심견성 할 수 있습니다. 출세간의 선정이 비록 생사의 윤회를 초월할 수 있다고는 하나 견성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상상선을 닦아야 합니다. 상상선의 원리 원칙이 모두《단경》속에 있습니다.
선정의 공덕은「정려(靜慮)」입니다. 정려는 당장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이지요. 몸과 마음의 청정이니까요. 려(慮)는 머리가 맑아 미혹되거나 전도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정하고 두뇌가 맑은, 이것이 선정의 좋은 점입니다. 일체의 세간 출세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학업이나 사업에도 모두 큰 도움이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선의 생활화입니다.
더욱 수승한 공덕은「견성(見性)」, 즉 명심견성입니다. 선정은 불법(佛法) 수학의 중심입니다. 8만 4천 법문과 무량 법문이 모두 선정을 닦습니다. 선정을 닦지 않으면 해탈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정을 닦지 않으면 견성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법문이 있을까요? 법문은 방법이고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선정을 닦는 데에는 무량무변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저 가부좌를 틀고 면벽하는 것뿐이 아닙니다. 가부좌 하고 면벽하는 것은 무량무변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염불도 선정인데, 일심불란이 바로 선정이지요. 사일심불란(事一心不亂)이 바로 출세간의 선정이고, 이일심불란(理一心不亂)은 상상선정입니다. 염불이라는 방법으로 도달하기 때문에 염불도 좌선인 셈이지요.
좌선에 대해《단경》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라 하고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을 선이라 한다[心不動, 名爲坐. 心不執着, 名爲禪]』. 장애인「산란(散亂)」을 제거합니다. 산란이란 정신을 의지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니, 장애지요. 정신과 의지가 집중되지 않으면 지혜가 나타나지 못하니까요. 이 역시 큰 병이므로 선정의 방법으로 끊어 제거해야 합니다.
「반야(般若)」: 이것이 불법을 수학하는 목적입니다. 선정이 수단이라면, 그 앞에 말한 네 가지는 수단의 수단인 셈이고, 관건이 되는 수단은 선정입니다. 선정으로 인하여 지혜가 열리니까요. 지혜는 청정심에서 나오고, 지혜는 선정에서 나옵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결코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야에는「실상(實相)」ㆍ「관조(觀照)」ㆍ「방편(方便)」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실상은 체(體)로, 반야지혜의 본체이지요. 관조는 스스로 수용하는[自受用] 것이니, 스스로 수행하여 스스로 증득하는 것입니다. 방편은 중생을 교화하는 선교방편입니다.
반야의 공덕은「큰 깨달음[大覺]」입니다. 큰 깨달음이 바로 성불이며, 원만하고 완전한 깨달음이지요. 스스로 깨달은 후에는 반드시「남을 제도하여[度他]」다른 사람도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장애, 즉「어리석음[愚痴]」을 제거합니다. 어리석음은 근본 무명이므로, 근본 무명이 다 끊어지면 성불합니다. 부처가 되면 등각보살까지도 제도할 수 있으니, 중생 제도가 원만해지는 것이지요. 9법계의 유정중생을 모두 교화할 능력이 생기며, 장애가 없어집니다.
6도(度)는, 장애를 제거하지 못하면「도(度)」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반야의 여섯 가지 복을 닦는 것일 뿐이지요. 모두가 단지 복보일 뿐입니다. 탐간(貪慳)과 악업과 진에와 게으름[懈怠]과 산란함과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6도, 즉 6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의 3달덕(三達德), 즉 대지(大智)ㆍ대인(大仁)ㆍ대용(大勇)은 불법에서 말하는 6바라밀과 아주 흡사합니다. 보시와 지계는 대인입니다. 보시는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고, 지계는 일체 중생을 기쁘게 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에 대해 공포심을 갖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계를 지닌 사람은 어떤 사람도 해치지 않으니까요.
인욕과 정진은 대용이고, 선정과 반야는 대지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지ㆍ인ㆍ용(智仁勇)의 3달덕을 갖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보살의 수행 강령이지만, 불법이 중국에 전해지기 이전에 유가에서의 수학이 대승불교의 교의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