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해崔暎海씨와 그 주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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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석(金昌錫)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있다. 미동학교, 그러니까 보통학교가 같았다. 지금 시를 쓰고 있으면서, 번역일에 집중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보통학교를 나오자마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라는 불어를 전문으로 교육시키는 곳에 다니면서 오로지 그림과 문학,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서대문 일대의 부자집 아들로 자유분방한 생활환경 속에서 오로지 예술이라는 것에 젖어서 정규적인 학교 다니질 않았다. 내가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다닐 땐 도쿄 교외 스기나미구라는 신흥주택지에 아름다운 아틀리에를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형 김창억(金昌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서양화) 씨와.
김창억씨는 그땐 일본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형제들이 참으로 부러울 정도로 예술을 공부하면서 예술을 살고 있었다. 서재와 화실, 그리고 생활공간이 관립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겐 참으로 딴 세계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일요일이면 가끔 이곳 스기나미 구(杉竝區) 상야쪼(山谷町), 창억·창석 두 형제의 꿈 같은 집에 들러서 점심도 먹고, 같이 신주쿠(新宿)에 나와서 옛날 명화만 틀어주던 극장에서 영화감상을 하곤 했다.
그 김창석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그동안 번역만 했다는 거, 로망 롤랑의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완역했다는 거, 을유문화사에 출판하기로 했는데 자꾸 연기만 하고 있다는 거, 어디서 빨리 출판할 곳이 없느냐는 이야기였다.
이때 대뜸 최영해씨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학벌을 잘 따지는 우리나라에서 잘 먹혀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그의 실력을 설명해서 납득시키지 하는 생각이 뒤따랐었다.
최영해씨와 나의 집은 혜화동 이웃간이어서 거의 매일 집안식구처럼 만나는 처지였다. 아침식사를 같이 하는 수도 많았다. 그날도 아침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아침을 들면서 김창석의 이야길 끄집어냈다. “학벌은 하나도 없는 친구가 있는데요......” 이렇게 시작을 했다. “그게 뭔데......”
“나에게 김창석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길 이어가면서 위와 같은 이야길 다 마치면서,
“어떻게 정음사에서 출판할 수가 없을까요?” 이렇게 끝말을 내 놓아보았다. 그러자 두말없이,
“그럽시다.” 하는 게 아니던가. 나는 놀랐다. 크게 놀랐다.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가 얼마나 많은 분량인데, 200자 원고용지로 약 1만 매, 그걸 그렇게 쉽게 한마디로 그럽시다, 출판합시다, 그 말이 나올 수 있는 건가. 그리고 한 번도 보지도 못하고, 대학도 다니지도 않은 김창석이라는 사람의 실력을 나의 말만 믿고, 그럽시다, 출판합시다.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고, 나를 믿어주는 그 신뢰, 의리에 그저 감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김창석을 약속한 장소로 불러냈다. 명동, 그 카리레오라고 기억이 된다. 처음으로 인사를 하는 김창석과 최영해 사장, 술이 돌고, 돌며, 술만 돌았지, 로망 롤랑의 이야기도, 장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도 한마디 나오질 않았다. 그저 술과, 웃는 이야기, 어려운 말은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이곳에서도 나는 놀랐다. 크게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번역에 대해서 한마디도 물어보질 않는가, 그 방대한 번역물에 관해서.
그날 밤 몹시 취해서 거진 통행금지 시간 임박해서 우린 헤어졌다. 헤어질 때 한마디,
“김형, 내일 그 원고 넘기시오.”
최영해씨의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 김창석 번역 장 크리스토프는 방대한 서적 3권으로 우리 나라에선 처음으로 출판이 되었던 거다.
최영해씨는 이렇게 크게 대담한 사람이기도 하며, 한마디로 멋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후 나는 김창석을 만나면 내가 너에게 대학원 졸업증서를 품의하고 최영해 사장이 졸업장을 수여한 거다. 이걸 한잔 가지곤 안 되지 하면서 서로 고마워하곤 했다.
김창석은 계속해서 역시 로망 롤랑의 대작 매혹된 영혼(200자 원고용지로 약 1만 매)을 3권으로, 발자크의 풍류 해학을 1권으로, 폴 클로델의 마리아에게 알림을 1권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7권으로 정음사에서 번역 출판을 하고, 창작시집 하루(1964)도 정음사에서 출판을 했다. 얼마나 최영해씨가 그를 인정했길래 이러한 작업이 계속 이루어졌겠는가, 생각할 때 참으로 흐뭇한 생각이 들면서 나의 일처럼 기뻤었다.
최영해씨는 거대하고 대담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관대했지만 일단 출판에 관해선 그렇게 까다롭고, 정밀하고, 세심할 수가 없었다. 그건 책이야말로 사람을 키우고, 국민을 키우고, 나라를 키우는 원동력이며, 양심이기 때문이라고 늘 나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점 역시 그 의 부친이신 외솔 최현배 선생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을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김창석이가 정음사 단골손님이 되고 말았다. 그 방대한 번역작업을 계속한 김창석도 장하지만, 그걸 계속 출판해준 정음사 최영해씨 또한 은혜로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실로 번역이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만매, 2만매, 3만매, 거진 4만매 가까운 번역의 분량을 생각할 때 실로 나는 김창석의 인내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인내력, 인내심이 어디서 나오는 건가, 생각해본 일이 있다. 그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믿기 시작했던 가톨릭 종교의 그 가톨릭 정신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혼자서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한마디로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지금도 계속 그 일을 소리 없이 하고 있지만, 명성을 좋아하는 이 시대에 그저 묵묵히,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