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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라성
말의 나라 조선
말은 고대로부터 인류사회에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군사, 물류 교통을 포함한 국가경영에 필수품이었고, 馬政은 조선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에는 옛 적에 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팔도에 수많은 목장이 있었고, 그 중에서 조선태조의 애마인 팔준이 나왔다.
태조의 팔준의 산지를 보자
함길도산 | 여진산 | 강화산 | 제주산 |
유린청(遊麟靑) | 추풍오(追風烏) | 사자황(獅子黃) | 응상백(凝霜白) |
횡운골(橫雲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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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자(發電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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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등자(龍騰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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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표(玄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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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직 이유(李瑜)가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도련포(道連浦)는 태조(太祖)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제성단(祭星壇) 및 치마장(馳馬場)을 설치하여, 뒤에 유린(游鱗)·현표(玄豹) 등 팔준마(八駿馬)를 얻었습니다.
[副司直李瑜曰: “北道都連浦, 太廟潛邸時, 設祭星壇及馳馬場, 後得游鱗、玄豹等八駿馬。]
영조 8年(1732 壬子 / 청 옹정(雍正) 10年) 4月 10日(丁酉)
태조의 팔준은 조선의 북도에서 남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생산된 말들이다. 이것은 조선팔도에 좋은 말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일찍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함길도의
도련포 목장(都連浦牧場)은 함흥 소윤(咸興少尹)으로,
말응도 목장(末應島牧場)은 영흥 판관(永興判官)으로,
두언태 목장(豆彦台牧場)은 지단천군사(知端川郡事)로,
마랑이도 목장(馬郞耳島牧場)은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반상사눌도 목장(反上四訥島牧場)은 용진 현령(龍津縣令)으로,
충청도의
대산곶 목장(大山串牧場)은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로,
흥양곶 목장(興陽串牧場)은 결성 현감(結成縣監)으로,
원산도 목장(元山島牧場)은 고만 만호(高蠻萬戶)로,
개야소도 목장(開也召島牧場)은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로,
난지도 목장(難智島牧場)은 당진포 만호(唐津浦萬戶)로,
전라도의
지도 목장(智島牧場)은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도양곶 목장(道陽串牧場)은 지고흥현사(知高興縣事)로,
임치도 목장(臨淄島牧場)은 우도 도만호(右道島萬戶)로,
장산도 목장(長山島牧場)은 주량 도만호(周梁都萬戶)로,
자은도 목장(慈恩島牧場)은 다경포 만호(多慶浦萬戶)로,
경상도의
오해항 목장(吾海項牧場)과 석을포 목장(石乙浦牧場)은
지동래현사(知東萊縣事)로,
가조음도 목장(加助音島牧場)은 지거제현사(知巨濟縣事)로,
경기도의
자연도(紫燕島)·용류도(龍流島)·무의도(無衣島) 목장은 지인천군사(知仁川郡事)로,
대부도(大阜島)·여흥도(呂興島) 목장은 남양 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
덕적도(德積島)·사야곶(士也串)·이작도(伊作島)·소홀도(召忽島) 목장은 좌도 첨절제사(左道僉節制使)로,
매도(煤島)·장봉도(長峯島)·위도(位島) 목장은 정포 만호(井浦萬戶)로,
주문도(注文島)·보음도(甫音島) 목장은 우도 첨절제사(右道僉節制使)로 겸해 임명하고,
감목관(監牧官)은 모두 혁파(革罷)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18년 병진(1436,정통 1) 7월25일 (무오)]
위 기사의 내용으로 보건데 함길, 충청, 전라, 경상, 경기에 국가가 관리했던 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도의 지형으로는 各道에 이렇게 많은 목장이 존재할 수가 없다. 함흥이나 제주는 차지하고서라도 충청, 전라, 경상, 경기에 목장이 있었다는 기사는 반도조선에 매우 부합하지 않는 기록이다.
실록이나 조선문인들이 남긴 기록에 조선의 팔도는 비옥한 지역 뿐 아니라 말 키우기에 적합한 초지들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사인 한양 삼각산 북교에도 말떼가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進新都八景詩] ― 정도전(鄭道傳)
북교목마(北郊牧馬)
숫돌같이 평평한 북녘들 바라보니 / 瞻彼北郊如砥
봄이 와서 풀 성하고 물맛도 다네 / 春來草茂泉甘
만 마리 말 구름처럼 뭉쳐 있으니 / 萬馬雲屯鵲厲
목인은 서쪽 남쪽 가리질 않네 / 牧人隨意西南
[부분발췌]〈삼봉집(三峰集) 제1권〉육언절구(六言絶句)
삼봉이 북교에 무수히 많은 말이 있다고 한다. 풀 무성하고 물맛도 달고, 말을 치는 목동도 바빠서 정신이 없단다. 반도 조선의 한양 삼각산에 이런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러한 지역은 한혈마의 고향 즉 중앙아시아 지역이어야 마땅하다.
전한의 무제가 현 서안에서 수만리 떨어진 대완으로 사신을 파견했었다는 것도 말도 안되는 억지다. 그러나 만일 한 무제의 장안(長安)이 아무다리야 이남지역에 있었다면 대완마를 얻기 위해 장건을 파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중세의 아미르 티무르도 사마르칸트 케쉬를 중심으로 몽골기병을 앞세워 인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천하의 준마는 대완마로 별칭 '한혈마'이다. 현재의 악할테케에 해당한다. 악할테케는 현 투르크메니스탄의 아할 주가 원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에 3000두가 있다는데 2000천두는 투르크메니스탄, 나머지는 우즈벡 러시아 영국등지에 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여포의 적토마, 조조의 절영, 유비의 적로 모두 대완마라 한다. 대완 아라비아말 모두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이다. 주목왕의 팔준, 당태종의 육준, 조선 태조의 팔준의 고향은 이런 지역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함길도산을 제외한 태조의 팔준을 보자
1. 강화산: 사자황獅子黃
2. 제주산 : 응상백凝霜白
3. 여진산 : 추풍오鎚風烏
강화에도 좋은 목장이 있다는 것이 실록에 많이 보이는데 그 중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사복시 제조 이병모가 전곶(箭串)의 목장에 나무를 심도록 신칙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전곶 목장의 목마(牧馬)로서 수명(修明)의 효과를 시험해보려 한 지 오래되었다. 자문한 것이 정중하였으나 오늘날까지 미루게 된 것은 다만 기강이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司僕寺提調李秉模, 請飭箭串牧場植木, 從之。敎曰: “箭串牧場之牧馬, 欲試修明之效者久矣。咨且鄭重, 而荏苒至今者, 特以紀綱之不若昔也]
옛날 팔도의 인부를 동원하여 성의 담을 건축하되, 용마봉(龍馬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전곶에 이르고 북쪽으로 영포(泠浦)에 이르렀는데, 전곶에서 그 바깥은 둑도(纛島) 일대를 한계로 삼았다. 영포의 내계(內界)는 곧 큰 시내의 직류(直流)로 남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려 서쪽으로 돌아 배봉(拜峰)에 이르렀으며 배봉에 이르러 또 목책(木柵)을 세우고 문을 설치하였다. 그 주위가 이처럼 넓고 멀며 경영한 것이 저처럼 두루하고 컸다.
[昔者發八道丁夫, 建築城垣, 始自龍馬峰, 南至于箭串, 北至于泠浦, 而箭串以外, 限以纛島一帶。 泠浦之內界, 是大川, 直流南迤, 西廻至于拜峰, 而又樹柵設門。其週遭如是之闊遠, 經始若彼其博大]
산의 바깥 담 밑에 들 1백 묘(畝)를 떼어서 백성들에게 경작해 먹게 하였고, 그것을 경작해 먹는 사람은 모두 관에 의해 먹고 사는 사람으로 모두 목장에 예속되었다. 산과 강이 그 형세를 도와주고 농민이 그 노력을 함께 하였다. 목장 안의 동서남북 일대는 곧 천 마리 말을 방목하고 만 마리 말을 기를 수 있는 곳으로서 역정(驛亭)의 이름을 화양(華陽)이라 불렀는데 지방 또한 명구(名區)이니 명마(名馬)가(원문에는 팔준으로 되어있다.) 이로부터 산출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다.
[山之外垣之底, 畫野百畝, 許民耕食, 食之者皆食於官, 而俱隷牧場。 岳瀆助其勢, 田民共其力。 場內之東西南北, 卽放千群孶萬馬之所, 而亭號華陽, 地亦名區, 八駿之從此出, 固其然也.]
정조 21년 정사(1797,가경2) 10월 4일(기해)
강화(江華)의 역정이름을 실록에서 華陽이라 한다. 華陽이 무엇인가?
화양국지(華陽國志)는 중국 동진(東晉) 영화(永和) 11년(355년)에 상거(常璩)에 편찬된 화양(華陽) 즉 파(巴), 촉(蜀), 한중(漢中)의 지리지이다. 〈위키백과〉
화양은 파, 촉, 한중을 뜻하며 중화의 남쪽이라 해서 화양이라 부른다. 한고조 유방이 한중왕, 유비는 촉한을 세웠고, 현종은 파촉으로 피난을 갔으며, 전촉의 왕은 왕건이고, 조선의 왕들은 북쪽의 군벌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로 간다.
즉 강화가 화양이라는 말이며 파촉이라는 것이다. 강화(江華)가 한양(漢陽)의 남쪽(양(陽)) / 중화(中華)의 남방이면 華陽이 된다.
본문중의 '목장 안의 동서남북 일대는 곧 천 마리 말을 방목하고 만 마리 말을 기를 수 있는 곳으로서'[場內之東西南北, 卽放千群孶萬馬之所,]
이런 말이 반도로 설명이 되지 않을 뿐더러 중공 사천성 또한 명마 생산지로 적절치 못하다. 실록에서의 설명과 가장 부합되는 華陽지역은 현 파키스탄. 아프칸 지역이다. 이곳은 영국 식민지배시 폴로가 성행했고 펀잡평야와 힌두쿠시로 둘러쌓여 있어 천해의 요새로 꼽히며 매우 우수한 말들이 산출된다.
연경 남쪽으로 도망가 있는 피난 고려정부(南宋)가 힌두쿠시의 요해지 카이버패스를 막고 있어 고려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쌍성을 탈환했다. 당 현종이 성도부로 파천할 때 리백은 파촉을 화양이라 한다. 몽골에 밀려 피난가 있는 고려정부가 있는 곳이 강화 즉 화양/파촉인 것이다. 그러니 가장 신뢰받는 사료 조선왕조실록이라 해도 조선왕과 대신들은 말도 안되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1. 강화(江華)에 새 목장이 이룩되니, 둘레가 6만 7천 1백 48척(尺)이었다.
[江華新牧場成, 周回六萬七千一百四十八尺。]
태종 15년 을미(1415,영락 13) 1월21일 (경신)
2. 한성부 윤 김소대(金素大)와 대호군 고득종(高得宗)이 계하기를,
“강화부 경내에 목장으로 적당한 곳은 남진강(南鎭江)에서부터 대청포(大靑浦)까지 1만 1천 6백 자[尺]이고, 서쪽으로는 건동을포(巾冬乙浦)까지 5천 8백 자이온대, 그 사이에 비어 있는 땅을 합쳐서 한 목장을 만들면 주위가 60리가량이오니, 비록 만 마리의 말을 먹일지라도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합니다.
[漢城府尹金素、大護軍高得宗啓: “江華府境內牧場可當之處, 自南鎭江至大靑浦一萬一千六百尺, 西至巾冬乙浦五千八百尺, 其間閑曠之地, 合爲一場, 則周回可六十里, 雖放萬馬, 水草俱足。]
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11월8일 (계묘)
3. 임금이 예조 판서 신상에게 말하기를,
“태종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강화의 목장은 물과 목초가 다 풍족하여 제주(濟州)와 다를 것이 없다.’ 하셨다. [上謂禮曹判書申商曰: “太宗嘗言: ‘江華牧場, 水草俱足, 無異濟州。’]
세종 14년 임자(1432,선덕 7) 3월19일 (무인)
4. 외방(外方)의 목장이 비록 그 수는 많으나 번식하는 곳으로는 강화만한 곳이 없기에 평상시 세공마(歲貢馬)들은 모두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外方牧場雖曰數多,孶息之地莫如江華,故平時歲貢馬皆出於此。]
국역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 (1625, 천계 5) 5월19일 (병인) 흐림
1. 태종 때 건립된 새목장의 둘레가 무려 6만 7천 1백 48척(尺)이다.
2. 비록 만 마리의 말을 먹일지라도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합니다. [雖放萬馬, 水草俱足。]
또한 목장 둘레는 60리이다.
3. ‘강화의 목장은 물과 목초가 다 풍족하여 제주(濟州)와 다를 것이 없다.’
4. 번식하는 곳으로는 강화만한 곳이 없기에 평상시 세공마(歲貢馬)들은 모두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孶息之地莫如江華,故平時歲貢馬皆出於此.]
주척(周尺)으로 계산하면 태종이 목장 둘레는 약 15.5킬로미터(km)
세조실록의 목장둘레 60리도 대동소이.
〈현 강화도 면적 293㎢, 해안선 길이 99km[브리태니커]〉
강화를 구글어스로 살펴보면 말을 키울 만한 면적이나 지형.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으며, 말에 관한 흔적이나 력사도 없다. 강화하면 떠올리는 것이 인삼이 아니던가? 강화의 해안선의 길이는 총 99km 대략 2백리 정도가 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섬의 삼분지 일이 목장이다.
태종이 세운 목장은 국가에서 세운 마정으로 군마용이며, 기타 실록에서 민간에서도 말을 치도록 허용했다는 점으로 보아 강화는 그야 말로 말의 천국인 것이다. 만(萬)마리의 말을 먹일 물과 풀이 풍족하며, 명마가 산출되어 세공마로 바친 고장이다. 제주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한다.
그리고 원문에서 江華라 하지만 우리는 반도 지형에 맞추어 江華島라고 한다. 제주도 마찬가지이다. 원문에는 濟州라고 하지만 濟州島로 인식한다.
이렇게 실록에서 인식하고 있는 강화와 반도 강화도의 지형은 매우 이질적이다.
강화에서 팔준중의 하나인 사자황이 나왔다는 것은 현 반도의 강화도로는 설명될 수 없다.
중앙정부에 바칠 만한 좋은 말(良馬)를 강화에서 바쳤고, 제주와도 비견될 정도로 말 사육 만큼은 최적의 지역인 것이다.
조선의 말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이번에 영안도(永安道) 점마관(點馬官)에게 명하여 알타리(斡朶里)에게 어승마(御乘馬)를 사게 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諸道)의 목장(牧場)에 양마(良馬)가 많으며 제주도(濟州島)의 말이 가장 훌륭하여 양마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비록 와서 바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거절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사는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은 임금의 부(富)를 물으면 말의 수로 대답하였는데, 지금 말을 구한다면 약점만 보일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천리마(千里馬)를 거절했는데, 내가 어찌 그들에게 준마(駿馬)를 사야 하겠는가?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
[侍讀官兪好仁啓曰: “今命永安道點馬, 市御乘馬于斡朶里, 我國諸道牧場多良馬, 而濟州尤最, 良馬不爲乏也。 彼雖來獻, 猶多却之, 況市之乎? 古人有問國君之富, 數馬以對, 今求馬徒示弱耳。” 上曰: “漢文帝却千里馬, 予何獨市駿於彼人乎? 爾言誠是。”]
[성종 24년 계축(1493,홍치 6) 3월16일 (신사)]
조선에 좋은 말이 넘쳐나서 굳이 알타리(斡朶里)가 어승마(御乘馬)【(임금이 타는 말)】를 바친다고 해도 살 필요가 없다면서 성종은 알타리산과 조선산을 모두 준마(駿馬)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천리마를 언급하고 있다. 천리마는 천하의 준마이고 한혈마라 한다. 태조의 팔준 중 응상마가 제주산이다. 응상마는 한혈마가 아닐까? 추풍오는 또 여진산이라 알려져 있다. 태조의 팔준은 주목왕의 팔준, 당태종의 육준, 유비의 적로와 비교된다. 이 말들은 모두 대완마다. 즉 조선의 팔도는 말의 생산지에 적합한 곳이어야 하며, 조선에는 말이 매우 많았다. 특히 함길도, 강화, 제주는 천마의 고향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 아래의 실록기사가 그를 증명해 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 역시 말은 집집마다 있으나, 소는 희소하다고 들었노라.
[上曰: “予亦聞馬則家家有之, 牛則罕少。]
세종 13년 신해(1431,선덕 6) > 1월28일 (계사)
팔도의 편오군(編伍軍)이 10만 1천 9백 14인이고, 무사(武士)가 1만 7백 17인, 제색군(諸色軍)이 29만 9천 4백 76인으로, 이는 병조 도안(都案)에 있는 수효이다. 그러나 병란 이후로 실종과 사망이 매우 많아 모두 채우지 못하였다. 여러 도의 역에 필자재해석(여러 도의 각 驛馬마다) 3천 2백 74필, 제주의 관목장(官牧場)의 말이 9천 3백 14필이다.
[八道編伍軍十萬一千九百一十四人, 武士一萬七百一十七人, 諸色軍二十九萬九千四百七十六人, 此是兵曹都案數, 而兵亂以來, 失亡甚多, 未盡充定。 諸道各驛馬三千二百七十四匹, 濟州官牧場馬九千三百一十四匹。] 인조 18년 경진(1640,숭정 13) 12월1일 (정미)
조선팔도의 정규병력 31만2107명 말은 제주에 9천 3백 14필 제도라 했으니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3천 2백 74필 × 7 = 22918 + 9314 = 32232 로 경기의 중앙군을 제외한 지방군의 병력은 약 31만 군마(軍馬) 약 3만 필 이니 엄청난 숫자이다. 군마를 제외한 말을 더한다면 조선은 말의 천국이 맞다. 세종대왕도 집집마다 말은 다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 참고 :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팔도의 총병력 수를 알 수 있는 기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병제(兵制)의 경우 우리 나라의 군졸은 팔도(八道)를 통합하여 명색은 거의 1백 수십만에 가까우나 하나도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兵制則我國軍卒, 統合八道, 名色殆近一百數十萬, 而無一可用, 寧不寒心乎?]
정조 9년 을사(1785,건륭 50) 7월26일 (계유) 방어책·병제·무기 등에 대한 유학 조익의 상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