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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히6:13-20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래전 가을 심방을 가는 길에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양희은 씨와 송승환 씨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분들이 편지사연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사연은 맞벌이 가정의 주부가 보낸 내용이었습니다.
⌜주부에게는 남편과 더불어 어린 아이들 둘이 있었습니다. 큰아이가 서너살 정도고, 작은 아이는 돌이 지났다고 합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 그랬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아이들만 돌보는 일도 해도 얼마나 큰일입니까? 더구나 맞벌이를 하니, 아침마다 얼마나 분주하겠습니까? 미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아내가 남편 챙겨야지요, 아이들을 깨우고 준비 시키야지요, 자신도 메이컵하고 준비하려면, 정신없는 정도가 아니라, 전쟁터가 따로 없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준비하고, 자신이 아이 둘과 함께 마을버스를 타러 갑니다. 하나는 손에 잡고, 돌쟁이는 어깨에 둘러메고 갑니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기사님들이 버스를 세워도 저만치 세우는 날이 많더랍니다. 돈은 한사람 몫 내고, 타기는 셋이나 타니, 그랬는지...... 그래서 한 아이는 손에 잡고, 한 아이는 어깨에 걸치고 뛰어가서 겨우 타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겨우 닿을만하면 버스가 출발해 버려서 허탈한 날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겨운 출발을 해서 일차 들리는 곳이 친정아버지 집이랍니다. 친정아버지에게 아이들을 맡긴다고 적은 것을 봐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친정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홀로 계신 친정아버지에게 어린 것들을 맡기는 딸의 심정도 참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면, 어떤 날은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고 합니다. 자신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 사랑스런 아이들이 자신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같고.....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저녁이 되면 아침의 반대 순서로 친정을 거쳐서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 재우다가 남편 얼굴도 못본 채 아이들 침대 위에서 잠들어 버리곤 했답니다. 그리고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었고요.
그러던 어느날, 회사에 있는데, 친정아버지가 급하게 전화를 하시더니, 돌 지난 둘째 아이가 갑자기 숨을 안 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급차를 불렀다고 하고는 전화가 끊겼습니다. 그날따라 회사에서는 출장들이 많아, 당장 뛰어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동료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응급실에 가자마자 담당 의사가 큰일날뻔 했다는 것입니다. 원인이야 정확히 모르지만, 어린아이들에게 가끔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큰 고비는 넘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회사에 가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던지 반대반향 버스를 타고 헤매고 있더랍니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모르게 있다가 퇴근 후에 병원으로 다시와서 아이와 있는데, 친정아버지가 아주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한손에는 큰아이 손을 붙잡고요. 딸을 보자마다 대뜸 하시는 말씀이 “작은 녀석 살리려다가, 큰아이 잡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가 워낙 초를 다투는 일이라, 구급차로 오느라고, 큰아이를 집에 두었더니, 아이가 무서워 집 앞 내리막길 도로 가에서 할아버지 찾느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주변의 이웃이 무슨 일이 있나보다 해서, 아이를 데려다가 먹이고 재우고 데리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집에 가서 겨우 이웃집에서 찾았는데 아이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할아버지가 찾아가도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 인생에도 유난히 힘겨운 하루가 있는 법인데, 이날이 바로 그와 그 가족에게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겨우 한숨을 돌리는데, 그 여인의 마음에 갑자기 어떤 글귀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아이 엄마는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무심코 지나치면서 보았던 성경의 구절이 그 마음을 채우면서, 자신의 삶을 때때로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했던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반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은 이제부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되어진 존재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하면서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저는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음에 감동과 회개가 동시에 몰려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가정과 일과 삶의 소중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여인의 고백과 같이 주어진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스스로 결단했습니다.
이 시간에 함께 한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귀하고, 여러분의 가족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며, 이 시간 함께 예배 드리는 교우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들입니까? 여러분에게 허락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문제는 이러한 마음을 언제나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마음을 먹고, 몇 차례 심방 때에도 그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지 못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저도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삶의 문제, 또는 해결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도, 어떤 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고 많더군요.
그것이 인간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그 힘을 얻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늘 기뻐하고 감사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믿음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숫자적인 계산이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세상은 대부분의 것을 숫자로 계산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의 숫치는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학교의 점수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앞뒤좌우, 어디를 둘러보아도, 수치 없이는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수치와 그 기준에 의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이 현대인의 삶인 듯 합니다. 최근에는 캐나다에 익숙했던 제가 미국의 다른 단위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양식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을 지배하게 된 것 같습니다. 생각의 방식까지 바꾸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삶이라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제 자신을 보아도, 키는 작고, 몸무게는 넘치고, 물질의 문제,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을 수치로 계산해보면 저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러나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생각은 달라집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있어서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비록 없을지 모르고, 부족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창조자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우리의 객관적인 수치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믿음의 있기에 행복한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행복한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 11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나야 했고,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던 사라에게 향한 자식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또한 100세에 얻은 아들을 재물로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복을 줄 것이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겠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셀 수 없는 자손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계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그는 믿었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서기 73년에 로마 제국은 유대를 붕괴시켰습니다.
로마에는 개선문이 세워지고, 유대 정복을 기념하는 금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금화에는 ‘유대아 데빅터, 유대아 카프터라는 글귀와 더불어 뽐내고 있는 로마 병사의 발 밑에 유대 여인이 꿇어앉아 있는 모습이 조각되었습니다. 유대를 사로 잡았다는 말과 함께 로마는 축배에 도취되었고, 유대인들은 패배의 고배를 마셨으며, 세계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제국은 사라졌고, 유대인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의 역사는 철저히 패배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강력한 무기와 군대로 그들을 위협해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들수록 약속을 기억하였고, 어려울수록 약속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별을 쫓는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어두운 밤이 되어야 보이는 별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쫓았던 별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별을 바라보며 살았던 그들의 삶은 패배와 굴욕의 역사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놀라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복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여러분의 재산이며,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계산할 수도 없고, 지금 당장 눈이 보이지도 않지만, 그 약속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며, 약속이 있음으로 해서 여러분은 삶의 참된 기쁨과 감사와 기도를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감신대 선배 중에 가깝게 지내던 안춘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대문 근처 창신동 산동네에서 소아마비로 장애를 가진 남편과 하늘이라는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반 지하 방에 어렵게 사는 것이 보였지만 가정이 참 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남편은 이미 백혈병으로 수술을 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후에 남편은 백혈병이 재발되어 돌아가셨고, 현재는 인천에서 아들과 함께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오기 전, 인터넷에서 그 선배의 사진과 글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7살 된 하늘이가 친구 집에서 멋진 장난감을 보고 재밌게 놀았던 모양입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 할 수 없이 장난감을 돌려주고 집으로 오는데,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 장난감 이마트에 가면 있는데...., 그거 얼마면 사는데..... 하면서 엄마에게 사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아들에게 선배가 짧은 편지를 썼습니다. “하늘아, 우리는 아빠가 없단다. 그리고 부자도 아니고... 그래서 사줄 수가 없단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줄의 내용이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선배의 편지를 읽으면서, 제가 느꼈던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는 아들에게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빠가 없어서, 돈이 없어서 비록 장난감은 사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불행하거나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고....” 아빠가 없어서, 남편이 없어서 보고 싶고, 가난하고, 아이는 아빠라는 말만 나와도 눈빛이 달라지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살려고 하는 선배의 모습, 오히려 어려운 곳을 방문하며 살아가는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보이지만, 생각하기도 힘들지만, 하나님의 약속, 그분으로 인한 승리는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첫목회는 강원도 영월서지방 흥월교회란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약 4년간 목회를 했었는데, 있는 동안 몇 번의 크고 작은 공사가 있었습니다. 1년 결산이 10000불 정도 되는 교회에서, 한달 생활비로 20만원을 받는 교회에서 몇 번의 공사를 진행하면서 적금도 깨고, 옥수수 뻥튀기, 더덕도 팔아 보면서 공사를 진행했었습니다. 한번이 지나갈 때마다 무척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제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2003년도에 콘테이너로 교육관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가로세로가 3미터 9미터로 제법 길게 제작을 하게 되었는데, 거의 오백만원 정도의 경비가 소요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년 결산이 천만원인데, 오백만원을 만들려고 보니 정말 쉽지 않더군요. 하여간 제작이 되고, 일주일 후면 교회 앞 작은 둔덕 위에 교육관이 세워지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콘테이너가 오기 전에 바닥공사를 해야 했습니다. 사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바닥 공사는 생각도 안하다가, 선배 목사가 바닥 공사를 해야지 오래가지 안하면 콘테이너 바닥이 썩는다고 알려줘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레미콘 한차 30만원, 둔덕에 해야 해서 펌프차를 불러야 하는데 그것도 몇십만원, 프레임 짜고 등의 일을 위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경비는 다 지출이 되어서 도저히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교회 앞 길에 도로 포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공사장 관리 직원에게 어떤 방법이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결국은 다 돈이었습니다. 그분은 정해진 가격을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그날 저녁에 공사장 직원 한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공사장 소장이 말하길 10만원 낼 수 있냐고 묻더랍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10만원만 내면 제가 원하는 것을 해 주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좋다고 했더니, 내일 아침에 보자는 말만 하고 가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목수들이 오더니 프레임을 짜고, 바로 포크래인 레미콘이 들이 닥치더니 불과 한시간만에 제가 일주일을 염려하며 기도하던 일들이 끝나버리더군요. 저도 콘크리트 공사를 하는 중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과 찬양이 저도 모르게 마구 터져 나오더군요.
그날 저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약속의 성취는 오늘도 여러분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