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편에 서기 위하여
2023년 5월 21일 마 25:31-46
1. 오래된 오해
(1)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교리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큰 오해를 받는 교리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인데, 이 대목에서 믿음과 행함에 대한 오해가 발생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율법 준수에 대해서 반대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이 교리가 선한 행실, 행함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반복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에 반대한 것입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믿음의 반대는 율법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이 관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행함이 없어도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완전히 그르치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니 행실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나가게 되면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가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는 율법을 행함입니다. 율법 준수!
이처럼 매우 잘못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오해가 그리 널리 성행할까요?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무임승차 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여 인간의 선한 행실과 의무를 방기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신앙과 복음이 헐값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바겐세일 하고 있습니다. 땡처리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주고 사신 교회와 복음이 무슨 값싼 뻥튀기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아무렇게나 사는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2) 죽은 믿음
그런데 이 믿음과 행함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초대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전연 행실이 엉망인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우들의 모습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약 2:14-17입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란 말입니다. 죽은 믿음이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믿음이란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와 같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이란 행함입니다.
2. 마태복음 25:31-46
(1) 구원의 기준
성경에서 오늘 본문처럼 생생하게 심판의 기준을 드러낸 말씀도 없습니다. 본문 마 25:31입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것이다.
예수께서 직접 일러주시는 심판 광경입니다. 그 심판의 자리에서 모든 민족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모든 민족들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는데, 그 기준이 이렇습니다. 35-36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이에 의인들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실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2) 말씀의 실천이 관건
세상의 모든 민족이 두 무리로 갈려서 각각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 무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한 무리는 영원한 형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두 무리를 갈라놓은 핵심적인 기준이 뭡니까? 선한 행실입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한 선한 행실이 이 두 무리를 천당과 지옥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교회에서 늘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선한 행실로, 믿음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곧 당신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도의 증언이 아니고, 어떤 신학자의 교리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심판의 기준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기준은 없습니다.
3. 오른편에 서기 위하여
(1) 왼편 오른편
전 세계의 왼손잡이 비율은 대략 10% 정도랍니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숫자도 아닙니다. 80억 인구 가운데 8억 명 정도가 왼손잡이니까요. 오늘날엔 왼손잡이가 유전적 요인으로 간단히 설명됩니다만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와 중세에는 왼손잡이는 뭔가 불길한, 바르지 못한, 좋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영어 단어 가운데 사악하고 불길하다는 뜻의 sinister는 왼손잡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반면에 오른쪽은 옳은 쪽, 바른 쪽입니다. 영어 단어도 그렇지요. right는 오른쪽도 되지만, 바른 것을 말합니다. 의로운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에 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말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우편, 오른편에 앉아계시지요. 왼편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오늘 본문 표현으로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기 위해서는 예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의 길이니 예수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말로 제자도라고도 하겠습니다. 여기서 도란 길을 말합니다. 길 도(道)자입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을 일컬어 도를 닦는다고 합니다.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입니다.
(2) 믿음은 행함
어떤 선무당이 또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서에 보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했으니, 구원은 개인의 마음과 고백의 문제지 행위와 실천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배웠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보다는 조금 아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설피 알면 큰일이 나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선무당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롬 10:10에 나타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씀은 자기 혼자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초대교회 시절, 그리스도인으로 탄로 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런 엄중한 상황에서, 붙들려간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입으로 시인(고백, 새번역)한다.’고 할 때 사도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떠올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가장 명확한 신앙의 실천, 믿음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경 구절의 어리숙한 이해에서 나온, ‘행동이 아닌, 실천이 아닌, 마음속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매우 그릇된 것입니다.
이른바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거기서는 믿음의 조상들에 대해 장구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데 거기에 나타난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라합과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모든 예언자들의 믿음이란 삶이었습니다. 행함이었습니다. 믿음은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일컬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교회가 타락하여 엉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는데 복음에 따라 살지는 않는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참으로 기기묘묘한 현상입니다. 바른대로 말하자면 이는 타락의 한 모습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이건 아니에요. 부디 우리 하늘샘교회 교우들은 주님의 복음을 몸으로, 행함으로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