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대 후반 공무원에 임용된 나는 또래에 비해 군 입대가 많이 늦어 3,4년 후배들 틈에 끼어 논산 훈련소 수용 연대에 입소 하였다 당시 수용 연대에 들어 가면 넓은 연병장에 모여 사복을 전부 벗어 본가(本家)로 보냈고 훈련소 에서 지급한 군복을 입어야 했다 옷을 지급 받기전 " 지급 받은 옷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 하지 말고 지급된 옷에 몸을 맞춘다 " 라는 말에 토를 달수는 없다 이때 제일 엄하게 다루었던 것은 돈을 소지 하지 못하게 감시 하려는 훈련소 기간병측과 어떻게든 돈을 숨기려 하는 장병들의 숨바꼭질 이었다 승산은 장정들 몫이 컸다 돈의 넓이를 최소화 하여 발바닥 밑에 숨기기도 했고 항문에 집어 넣기도 했다 어떤 날쌘 놈은 연병장 땅에 돈을 묻고 표나지 않게 찿아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남의 돈이 되기 일쑤였다 나는 입속에 집어 넣고 용케도 발각되지 않아 배 고풀때 필요한 군것질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군복으로 갈아 입고 내무반 으로 향하고 있는 과정에서 내무 반장이 내 이름을 큰 소리로 호명 했다 믾은 장병들이 있는데 왜 ? 하필 내 이름을 부를까 ? 나는 입에 감춘 돈을 재빨리 주머니로 옮기느라 대답을 늦게 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내무반장의 불호령은 조용한 살얼음 판에 금이 쫙- 가는 위협의 소리로 들렸다 " 장병들 ! 여기가 너희들 안방 인줄 아는가 !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가 자갈 밭에 똥 구루마(수레의 일본말) 굴러 가는 소리 같다 전원 제자리에 멈춘다 ! 실시 ! " 하는 명령에 모두가 행군을 멈추고 있으니 " 그자리에 머리를 땅에 박는다 , 실시 ! " 라고 하자 그 많은 장정들이 머리를 땅에 처박는데 가끔은 중심이 풀려 나동그라지는 장정도 있어 무섭기도 했지만 웃음이 튀져 나오기도 했다 이때 내무반장과 보조 하던 기간병이 " 이 새끼들 장난 하나 본데 , 어디 까지 웃나 보자 ! " 라며 엎드린 상태에서 손을 엉덩이에 올리라며 " 차렷, 열중 쉬어 "라는 구호가 빨라지니 나동그라 지는 장정이 많아 진다 내무 반장과 기간병은 나동그라 졌다가 다시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리려는 장정들의 순간 자세 두 다리를 발로 차니 고통을 참고 업드리려고 용쓰는 모습은 잊을수 없는 모습 이었다 시달림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 지급된 관물(따불빽)을 등에 메고 내발(두손과 두발) 로 걸어 선착순 내무반 으로 이동한다 ,실시 " 라고 했을땐 제대로 가는놈도 많았지만 따불빽에 걸려 자빠 지거나 따불빽을 편하게 끌고가다 걸려든 장병들이 열 외로 제외 되어 출발 했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장병들이 많았다 나는 요행 인지 몰라도 그 측에 끼지 않고 내무반 으로 가는 대열에서 낙오 되지는 않았다 드디어 내무반 문이 앞에 보였다 그런데
" 장병 모두는 눈을 감고 입실하고 복도에 들어가면 앞으로 계속 가다 장애물이 막으면 우향우 하여 제자리에 멈춘다 만약 눈 뜬놈이 적발되면 연병장 으로 모실 것이다, 실시 ! " 나는 출입문을 잘 몰라 넘어질뻔 했지만 그런대로 내무반에 진입하여 한참을 가다 앞사람이 장애물로 걸려 우향우 하고 벽쪽을 향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 연병장 으로 끌려간 전우들이 꽤 많은데 그들이 합류 할때 까지 가만 두지는 않을 턴데 - - - ! 등등을 생각하고 있는데 예상은 적중했다 처음엔 침상을 가슴에 대고 엎드려 쉬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 신발을 벗고 발을 침상에 올리고 손을 통로 바닥에 대고 쉰다. 실시 " 속으로 ' 야이 놈들아 ! 쉬는게 어떤 자세 인지도 모르냐 ? 무식한 놈들 같으니라구 ! " 차마 입 밖으로 내 놓을수 없는 욕지거리와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참을수 밖에 없는 군생활의 시작이다 이런 저런 기합을 받고 있는데 내무 반장이 어디서 많이 본듯했다 그러고 보니 목 소리도 익숙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자는 웃음을 참는 모습 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정면을 보여주진 안았다 연병장 으로 끌려 갔던 전우들이 지처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니 기간병이 나에게 오더니 밖으로 나가 보란다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돈을 감츈것이 들통 났나 ? 벌 받는 중에 요령 피운게 들통 났나 ? 어쨋던 밖으로 나갔다 5 m 거리에 내무반장 으로 보이는 군인이 있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그자는 돌아 보지도 않고
" 장병의 이름은 ? " ' 예, 장병 홍길동 입니다 ' " 저녁밥을 안 먹었는가 ? " ' 먹었습니다 ' " 그런데 왜 소리가 모기 소리 보다 작은가 ? " /' 녜, 시정 하겠습니다 ' " 자네 몇살인가 ? " ' 스물다섯 입니다 ' " 고향은 어디 인가 ? " '전북 정읍입니다 ' "정읍이 다 자네 고향인가 " ' 아닙니다 입암면 대흥리 입니다 ' 여기까지 의 문답 으로 내무반장의 신원을 짐작은 갔지만 내가 서투른 근거로 판단 하는건 무리였다 " 자네 중학교는 어딜 다녔나 ? " ' 녜., 정읍 배영 중학교 다녔습니다 ' " 그럼 이재련 이라는 학생도 알고 있나 ? " ' 예, 저와 같은반 학생 이었습니다 ' 그러자 내무반장 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익수를 청하고 있는데 나는 손이 발발 떨렸다 하지만 만약 이재련이 맞다면 난 엄청난 창피를 당했음을 부인 할수 없다 중학생 시절 그자는 칠칠치 못하고 조금은 바보 스런 모습 이었는데 군대가 숫기 없는 사람을 용기 있고 씩씩한 사람 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는 모든 반 동료들에게 똘만이 취급 을 받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바뀌었단 말인가 ! 나는 지금껏 군대 후배로서 모욕을 감수 하는 벌을 받아야 했고 묻는 말에 공손히 대답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면 챙피 하거나 부끄러운 생각 보다는 험지 에서 돌봐줄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말을 올려 할수도 없고 내려서 편하게 말 말할수도 없는 나의 언행을 감지 했는지 " 야 ! 군대는 왜 이리 늦었어 ? 내가 서둘러 부산 병력에 넣어 군번을 뻘리 받게 해줄께 ! 그러면 제대가 일 주일 빨라 질수도 있거든 " 이말에 혼란스런 모든 감정을 없애고 감사함 으로 다가와 ' 고맙다 . 재련아 ' 하고 말했더니 " 나 이재련이 아니고 육군 병장 이병장 으로서 너의 내무 반장 이라는걸 명심 하도록 해야한다 그렇게 행동 하지 않으면 내가 널 위해
줄수가 없다 " 나는 그말을 듣고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할지 혼란 스러웠으나 이후 곧 바로 이해 할수 있었다 내무생활에서 지적을 당하지 않았고 사역(군대의 노동)에서 재외 되었고 잠자리가 좋은곳에 배치 되었기 때문이다 재련이는 나의 입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연병장 에서 나를 제일 먼저 확인했고 내 행동을 빠트리지 않고 주시 했다면서 돈을 입 속에 감추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안전을 위해 시간을 두고 호명을 했고 각종 기합에서 지적 당하지 않도록 수하 기간병 눈가림 으로 방패막을 첬고 내무반 입실도 나의 부주의(갑자기 사적인 언행 돌출)가 화를 부를수 있어 어쩔수 없이 행한 촌극이라는 이야기도 귀뜸해 줬다 고마운 친구 였다 이러한 친구의 배려로 일주일간 배출대(수용연대) 생활을 마칠수 있었다
문제는 훈련소 에서 였다 나는 부산 병력에 편성 되어 25연대 4중대에 편성 됬다 내가 부산 병력으로 군번을 빨리 받을수 있게 해준 수용연대 내무반장 이재련 은 전라도 병력중 내가 추천하는 친하고 현명하고 동작 빠른 10여명을 같이 묶어주는 배려를 해줬는데 나의 4중대 내무반장은 대구 K 대학 출신 으로 일반(단기) 하사를 단 최영준 병장 이었다 이 친구는 골 깊은 지역 감정에 편승해서 나를 포함한 10 여명 전라도 병력 에게 골탕을 먹이려는 악 취미를 행사 하려는 의도가 전우조(취침시 용변 등 사적 외출시 동행 하는 팀)편성을 보면 알수 있다 부산 병력 두 사람 사이에 전라도 병력 한사람 놓고 뒤에 부산 병력 두사람을 배치 했다 그리고 내무 검열 (취침점호)시에 일부러 전라도 병력중 선두 주자, 대표격인 나의 잘못을 민들어 지적을 하고 벌칙 으로 2.5 리틀 포탄 껍대기 잔으로 물을 체운후 마시게 했다 물론 맹물 이지만 한꺼번에 마시지 못한다 그러면 정강이를 각진 지휘봉 으로 때리며 독촉 명령을 반복하니 결국 그 많은 양의 물을 마시게 된다 취침점호가 22시 에 시작해서 23시 사이에 마치면 바로 취침에 들어 간다 그러나 나는 소변이 나오기 직전 이다 전우조를 깨우면 짜증을 낸다 가까운 동료 후배를 깨우려니 두사람 건너에 있다 그것도 동초(통로에서 취침 상태를 관리 하는 당번 군인)가 말리고 제지 한다 이러다 보면 옷에 오줌을 지리기 마련이다 터진 요도는 열려 있어 잠이 제대로 들리 없다 비몽 사몽에 한번 더 화장실에 다녀와 막 잠들었는가 하면 기상 나팔 소리에 졸린 눈을 비벼댈 뿐이다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 한번은 야외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나의 관물 중에 동내의가 없어졌다 내무반장 소행이 분명 하지만 표출 하면 산통이다 이때 최대의 수습 방법은 다른 중대 훈련원 내의를 훔처 체우는 방법이다 같은 중대 에서 훔처 체우면 내무 반장이 알기 때문에 내가 범인 으로 몰린다 이에 쩔쩔매고 있는 나에게 구세주는 단얀 나의 후배들 이었다 어떻게 했는지 사라진 내의를 3일 후에 채워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후배들이 옆 중대 내무반에 들어가 한적한 관물대를 지켜보다 미리 약속한 신호에 의해 자기 관물인양 관물을 정리 하다가 동내의를 옷 속에 품어 왔다는 것이다 당시 관물 도난 사고는 빈번 했음은 물론 이다 기간병이 이를 이용해 용돈을 얻었다는게 당시에 소문의 중론 이었다
문제는 또 벌어졌다 각개전투 훈련을 나가기 위해 연병장에 도열해 있는데 지휘본부 마이크를 통해 " 4중대 홍길동 훈련병은 지휘 본부로 뛰어 나오라 ! " 갑작그런 호출에 멍 하는 생각으로 서 있는데 갑자기 기간병 조교가 나를 걷어 차며 " 임마 , 귀 먹었어 아니면 네가 홍길동이 아니야 ! " 이말에 정신 차리고 지휘본부에 뛰어 나갔더니 중대장 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중대장이 손을 내밀며 " 나 정판술 이다, 반갑다 "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나도 모르게 ' 정말 반갑다 판술아 ! ' 이 말을 듣고 4중대 중대장 이 " 야 ! 서훈련병 말투가 뭔가 ? 훈련병 군기가 없구만 모자를 벗어봐 " 하는 소리에 잘못을 깨닿고 쩔쩔메고 있는 상황을 무마 햐려는듯 나를 위로 하듯 고등학교 친구 정판술 대위는 " 어 ! 허대위(ROTC 2기 , 본명은 허보 ) ! 고등학교 친한 친구야 이해를 하게나 " 라고 했다 하지만 효과는 그날밤 바로 발생했다 내무반장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 서 훈련병, 훈련병은 개만도 못한 존재야 ! 하늘 같은 중대장 에게 반말을 하다니, 알 철모를 침상에 놓고 거기에 대가리를 박는다, 실시 " ' 녜, 훈련병 홍길동, 실시 ' 를 복창하고 관물 다이에서 철모의 위장 천을 벗기고 알 철모를 침상에 놓고 그 위에 머리를 얹고 엎드려 뻐친 자세에서 두손을 등뒤에 밎잡고 있는 상태로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이 혼미 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물 세례를 받고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들어 머리를 만져 보니 머리뼈가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사람은 죽지 않는걸 그때 알수 있었다 나의 유명새는 취사병 에게 전해 졌는지 배식 취사병 에게 된통 당했다 지금은 사라진 큰 알미늄 양재기에 밥을 먼저 퍼준다 다음으로 이동하여 가면 국 배식 하는 취사병이 기다란 손잡이 달린 스크프(국자)로 된국을 밥위에 부어 주는데 일부러 내가 밥그릇을 잡고 있는 엄지 손가락이 닿도록 뜨거운 국물을 부으니 고통은 말할수 없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만약 밥 그릇을 놓치면 한끼를 굶을수 밖에 없기 때문 이다 다음 배식은 염장 처리한 무우 쪽 (무우 장아치 겸 김치)을 받는데 일괄적 으로 2쪽 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쪽만 준다 그리고 " 앞으로 간다 " 라며 나에게 의미 심장한 야유를 보낸다 재식 훈련, 태권도 교육, 야간 전술 훈련, 수류탄 투척룬련, 장애물 통과를 포함한 각개 전투훈런, 유격 훈련, 화생방 교육훈련, 사격 훈련훈련이 생각 나는데 나는 모든 훈련마다 기간병 조교의 시범뒤에 제일 먼저 뒤따라 실시 하는 단골 훈련병이 되었다 모든 훈련이 힘들 었지만 유격 훈련에서 뛰어난 성과가 있어 칭찬에 인색한 조교 조차 혀를 내둘렀다 입대전 전화국 선로 보수에서 공중에 사다리를 걸고 오르 내리며 작업 했던 덕 이라 생각 한다 공중에 매달려 흔들리는 사다리를 다람쥐 보다 능숙하게 오르내렸기 때문에 외줄 타기나 삼각줄 도강 뿐만 아니라 줄잡고 웅덩이 뛰어 건너기는 나에게 줄거운 놀이에 불과 했지만 다른 훈련병들은 힘들어 했다 어려워 하는 사격 연습과 실전 에서도 좋은 탄착군 형성과 과녁을 명중하는 운이 있어 칭찬 받은 기억이 있다 당시 어려운 훈련 과정 이었지만 이후 삶에서 가끔 꺼내 볼수 있는 줄거운 추억거리가 되었다 훈련 성적이 좋아 특수 부대(당시 군사 첩보 부대로 흔히 말하는 HID, 후에 기술 정보 부대와 합병하여 정보 사령부가 됨 )로 배속 받고 자대 훈련장(개발전 판교)에서 특수 훈련 을 마치고 월남(사이공 소재 사령부와 나트랑 소재 야사령부 정보부대)전 참여후 귀국한뒤 서울에 소재한 예하부대(901대) 공직팀 으로 전속되어 누구도 경험 할수 없는 군생활을 했다 군생활 말년에는 후배들을 데리고 공작 활동을 하다 숨진 선배 유공자를 위한 주택 건설 공사를 서대문구 역촌동 에서 했는데 터파기 중에 통훈대부(종 3품 으로서 당하관중 최 상위직 ) 내시묘를 발굴 했으며 이는 역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될수 있었으므로 당연히 고고 학계에 알려야 했는데 부대 보안상 무시 할수 밖에 없었다 터를 고르는데 백 회로 둘러 쌓인 봉분이 나왔는데 곡굉이 질에도 부서지지 않아 이를 제거 하는데 정말 힘들 었다 봉분을 제거 하자 관위 명전 자리에 산뜻한 황토 흙 위에 通訓大夫 內侍墓 라는 글자가 숯 가루로 써졌는데 종이에 정성스레 쓴것 이상으로 잘써진 것으로 보아 당대 명필가의 글일 것이다 나는 명전 역할을 한 황토 흙을 제거 하고 관 뚜껑을 열어 봤다 시신의 뼈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내면을 살펴보니 물이 들어와 흘러 내린 흔적이 있어 의아해 했다 그곳이 높지 않은 산 이었지만 해발 300 M 정도는 됬고 시신의 관이 석회로 단단히 둘러 쌓여 물이 들어오지 못했을 턴데 관속에 있는 명주천이 누렇게 썩는중 이었다 호기심 으로 관 길이를 재 보았다 내가 단신(短身) 이었는 데도 두팔을 벌인 안쪽에 들어 왔다 이로 보아 내시의 신장이 작았다는 걸 확인 할수 있었다 관의 재질은 육송 어서 그런지 별로 부식하지 않아 역촌동 마을 기반 시설 중 복개하지 않은 하수도(우수관 겸용)를 만들기 위해 파서 콘크리트로 수로를 만들고 아직 덮개를 덮지 않아 건너기 불편 했는데 이곳에 가로 질러 걸처 놓으니 사람들 통행이 좋은 다리가 됬다 시신의 뼈는 정성 들여 수습하고 창호지에 쌓서 앞에 조촐한 재수를 마련해 예를 갖추고 당시 부대원 모두 에개 재배토록 했다 예를 마친후 공터에 묻어 주었지만 나는 그로 인하여 가끔 죄스런 고통에 사로 잡혔다 땅에 묻은 사체가 잘 보존 되고 있을지 ! 그것 말고도 당시 고고학계에 알렸더라면 이조 시대 신분 계급, 장례문화 , 사후 복식, 내시 들의 신체 특징, 부장품 등을 연구 할수 있는 토대가 됬을 턴데 하는 아쉬움은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머리속 에서 지워 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되고 있다 이제는 희미해진 점이 위로 라면 위로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는 젊어서는 군대 생활 자랑, 나이 들어서는 손주 자랑을 하는데 나 또한 다르지 않지만 남들과 같은 자랑이 아닌 고통과 수난을 고백 하는게 남들과의 차이다 나에게 관심을 배푼
당시의 수용연대 내무 반장, 훈련소 3중대장은 어쩌다, 가끔 만나 술자리를 갖는다 그때는 항상 내가 기꺼히 술값을 치룬다
당시에 나를 도왔던 후배들과 만나면 술값은 고하를 막론하고 내가 기꺼이 내는 것을 고집 한다 . 끝
첫댓글 [복수]너처럼나도70년도에논산훈련소29연대에입소했었지
훈련도중에복통으로1주일입원하고나오니전남여수병력과훈련을마치고후반기교육을거쳐101보충대에갔더니내동생친구가병장으로기간병으로근무하고있더군(재련이친구주상훈)보충대에서6사단2연대배속을받아연대군수과에서근무를했는데하루는장교식당에보급장교와선임하사시사를타러갔다오는데양손에식기두개를드었는데앞에오는대위가초등학교동창을만났지만서로인사만나누고곧헤어졌지(후에정읍군청에함께근무하고퇴직하고지금도모임하는중)그후로병장달고사수가포항앤데나보다두살이나어린놈이어찌나거드름을피우는지꼴보기싫어월남지원을해서비들기부대에파병되어8개월근무하고철수병력의일원으로귀국했지우리철수병력은운이좋아비행기로귀국하는행운도있었다네
이제지난일이지만덕택에국가유공자수당으로친구들과대포라도함께할수있음에감사를느끼네
자넨재련이친구와훈련소에서의사연이있었드랬구먼
살다보면이렇게저렇게얽켜살아가는게인생이라는생각이드는구려
친구의페이스북글을통해친구를좀더이해할수있는좋은게기가되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