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계속해서 안녕하신가요?
3월입니다. 이제 꽃샘추위 올 날도 멀지 않았네요.
누군가는 새 학기를 시작했고, 저는 미루고 미뤘던 일, ‘사랑니 발치’를 최근 감행했습니다. 이제 하나 아래쪽 한 개만 남았네요.
그리고 열심히 써왔던 감상문 하나도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책을 또 찾아야겠죠.
사실 업무가 좀 과중하긴 합니다. 월화수목 금금금이 완전히 정착될 만큼.
그래도 감상문은 씁니다. 반항심으로!
도서명: 조선 사이보그전
저자: 유진상
* 이 책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통신망 넓은마을 도서관에 데이지도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예전에 ‘터미네이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어릴 적이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자던 시절, 영화관이 아닌 집의 TV에서 명절 특선 영화로 방영한 것을, 졸다가 깨다가 자다가 하며 본, 아니 정확하게는 귀로 들은 기억이다. 아마 3탄까지 방영했던 것 같다. 아닌가? 4탄도 나왔나?
갑자기 왜 아주 오래된 터미네이터 영화 이야기를 꺼냈는가 하면, 이번에 들게 된 책의 소재가 그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 같은 사이보그, 아니 정확하게는 로봇이 주인공이요, 그 로봇은 터미네이터처럼 과거로 보내지는 타임슬립을 겪는다.
차이라면, 터미네이터는 위협 세력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책 속의 사이보그, 그러니까 로봇은 언어학 연구 자료 수집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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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이보그전》 - 아이돌 얼굴을 하고 저렴한 한복을 입은 채 시간 여행하는 로봇 이야기
“가고 싶지 않아! 정지되고 싶지 않아! 부서지고 싶지 않아!”
이 책의 소개글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중세 언어 연구를 목적으로 조선으로 보내진 로봇, 정착을 기똥차게 잘해서 가족까지 꾸리게 된 로봇, 그런데 하필 재수 없게 임진왜란 터지고 양아들 주검 수습하겠다고 전쟁터에 갔다가 왜군 포로가 되고, 무사히 풀려나려면 왜군 영주의 학질을 치료해야 하는데......
이런 소개글을 보고 좀 가볍고 약간은 코믹한 전개를 예상했다. 왜 있지 않은가, 로봇이니까, 로봇 특유의 의사소통 문제라든가.
가령, 조선의 지식 수준과 언벨런스한 지식 수준을 내보여서 ‘띠용~’ 하는 썰렁, 뻘쭘한 바람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것. 아니면 역시 로봇이니까, 통쾌하게 왜군들을 공중 비행시키는 활극 같은 거.
결과적으로 반은 맞았다. 반만 정답이었다.
소설은 온탕과 냉탕을 오고 간다. 그리고 회상과 현재 시점을 번갈아 소개한다. ‘G9’라는 표제가 붙은 게 과거 회상, ‘종부’라는 표제가 붙은 게 현재 상황이다.
G9(지구), 첨단 미래에서 대학원 연구실 연구보조 로봇이던 존재였다. 그러다 중세 조선의 언어를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한다는 목적 하에 과거로 보내진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었지만 패러독스 문제도 있고, 살아 있는 인간한테는 시간 여행이 부적합해 타임머신 이동은 오직 로봇에 한정되어 있다는 소설의 설정이다. 그리고 연구를 목적으로 과거를 조사하고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로봇이 과거로 보내어졌으나 귀환율은 오직 1%라는 글속의 설정도 따라붙는다. G9가 초반에 왜 그리도 오두방정을 떨며 인간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시간 여행을 가기 싫어했는지 공감이 간다.
더구나 현지에서 호감을 사기 쉽다는 명분으로 연구자의 사심이 듬뿍 들어간 외모, 일명 아이돌 록시의 얼굴로 개조를 당하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이유 있는 개조였으나, 조교 연두의 사심 부분이 좀 웃기긴 했는데, 이것은 G9에게도 황당함으로 작용한 것 같다. 업그레이드가 된 성능의 G9이 치는 귀여운 투정 같은 것도 그랬고, 조선 정착 초반에 묵언수행으로 말을 못하는 걸로 여겨지던 G9가 말문을 열었을 때 사투리 어쩌고 하는 대목도 코믹한 요소였다.
여하튼 G9는 변한 자신의 외형이 불만이었고 무엇보다 귀환율 1%인 과거로 가는 것이 불안하고 싫었다. 그러나 로봇은 임무를 거부할 수 없다.
결국 G9는 타임머신에 탑승했다. 그리고 조선의 새파란 하늘 아래로 이동됐다.
“제겐 인간과의 연애를 가능하게 할 기능이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G9는 너무너무 적응을 잘했다. 현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혼인 중매’까지 들어올 정도로 말이다. G9는 자신이 로봇이기에 기능적인 문제로 혼인을 거절하지만, 그 점이 웃을 수밖에 없는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적응을 잘한 건 아니다. 초반에 좀 버벅대긴 했다. 마을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져 파괴당할 것이라는 공포, 자신의 내구도가 과연 멍석말이를 버틸 수 있는가 하는 염려도 품는다. 그래서 처음 도착한 조선의 푸른 하늘 아래, 발 딛고 선 산에서 내려가지 못한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지역 양반 박종수와의 인연을 계기로 G9의 인공두뇌와 그 속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는 그의 정착을 위한 아이디어를 구상해냈다. 그리하여 G9는 조선의 최초 사이보그, 아니 로봇 의원이 되었다.
물론 은골 마을 사람들의 심성이 좋기도 했다. G9이 품은 양반에 대한 가치관을 와장창 박살낸 마을의 양반 박종수, G9의 첫 환자인 박종수의 모친, G9의 의원 스승인 윤 노인, 그의 손자 주선과 마을 아이들인 하진과 갑진, 그밖의 G9의 행동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를 로봇 G9가 아닌 그들과 같은 존재로, 언젠가부터 ‘노보 윤종부’로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G9는 자각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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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티한 한국판 터미네이터 - 《조선 사이보그전》
“당신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재, G9는 조선의 의원, 그리고 아비 ‘윤종부’가 되어 전쟁터의 사체 무더기를 헤집는다. 때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기, 조선 중기 무렵 왕은 선조 때이다. 왜군이 점령한 곳, 백성들은 헐벗고 떠돌고 쫓기며 유랑 생활을 했다. 그는 사방이 전쟁터요, 온 천지에 시체가 널린 들판을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찾고 있는 건 전쟁터로 떠나 돌아올 수 없게 된 수양아들 주선의 시신이었다.
마침내 주검을 수습해 야산의 동굴로 돌아온 종부는 양아들의 유해를 앞에 두고 탄식한다. 한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째 덤덤한 것 같기도한, 그런 묘한 억양으로 ‘배은망덕’하다고......
“자네에겐 양반이든 양민이든, 천민이든 하는 것은 상관없지. 그저 환자인 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그런 의원을 보지 못했기에 사람들이 자네에게 감사하는 것일세.”
G9가 의료 활동을 한 건 프로그래밍 때문이었다. 마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의료 로봇이 아닐지라도 인간을 구호하는 건 로봇의 우선 임무였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기에 그에게는 신분이나 지위 고하, 재물의 빈부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사람이면 됐다. 환자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G9를 받아들이고, 그를 윤종부로 부르던 사람들 역시 같았다. 그들에게 G9는 로봇이 아니었고, 이방인도 아니었다. 마을의 명의, 덕망 있는 이웃, 윤씨 성을 가진 종부일 뿐이었다. 그리고 입양한 아이들의 아버지일 따름이었다.
조선에서 G9는, 아니 종부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미래의 그는 그저 중세 한국어를 연구하는 로봇이지만, 조선에서는 양반 박종수의 친우, 의원 윤 노인의 제자, 주선과 갑진과 하진, 그리고 갑생의 아버지였다. 또 은골 마을의 명의이자 이웃이었다.
2년간 이곳에서 중세 한국어를 수집하고, 숲의 동굴이나 늪에 몸을 숨겨 기능을 정지한다. 화석의 형태로 미래로 귀환한다.
본래 계획은 그랬다. 하지만 G9를 종부로 대하는 사람들과의 생활 속에서 그 계획은 점점 미뤄지고, G9은 결정을 유보하게 되고, 결국 종부로 조선의 역사 속에 기록되기에 이른다. 로봇은 귀환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윤종부가 되어 계속 가족과 함께하기로 결정한다. 아니, 그는 더 이상 로봇이 아니었다. 한 명의 인간이었다.
앞서 적었듯 소설은 G9의 시점과 종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둘 다 한 인물이지만 G9이 단순히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이었다면, 종부는 더 이상 로봇이 아닌 존재였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말한다. 또 인간을 학습된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식을 중요시 여기고, 학습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람이 된다고.
그렇다면,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무엇일까?
로봇도 사회의,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회적인 구성이다.
또 로봇 역시 학습을 통해 기능의 업데이트를 이룬다. 학습화 과정이다.
에너지 충전 방식과 인체의 구성 요소만 빼면 대체 인간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초반에 G9는 줄곧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다. 조선인의 폭력에 파괴될까, 순간순간 자신만 걱정했다. 하지만 로봇의 기본적인 의무로 다친 인간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G9가 행했던 구호 행위는 자신의 안위와 누군가가 심어놓은 명령으로써 행한 것들이었다. 불안으로 피하고 싶어도 강제로 따라야 했다. 그러나 G9의 걱정과 달리 로봇 자체를 모르는 조선인들은 그를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으로 대우했다. G9의 행동들에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선한 명의라고 존경했다. G9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소중한 사람이 되어 갔다. 줄곧 자신의 감정, 생각, 행동 등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가짜라 여겼지만 자신을 진짜 인간이라 생각하며 바라보는 조선인의 모습을 통해 흉내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로봇에게 심어진 의무로서 행하던 행위들은 진심이 되고, 아버지로서 친구로서 가족과 지인들을 먼저 걱정하게 된다. 같은 인물인 G9와 종부의 차이는 이타심에서 찾을 수 있다.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 로봇에게 타인을 위하는 것은 단순히 명령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느끼고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소설은 그것이 로봇과 인간의 차이가 아니겠느냐고 넌짓이 묻는다.
요즘은 감정과잉, 아니면 감정위축이 데세인 것 같다. Sns상의 댓글부대나 키보드 워리어 같은 경우를 보면 감정과잉이 의심된다.
그런 한편 또 금방 식기도 한다. 안타까움을 접해도 그저 그뿐이다. 무미건조하게 지나치기도 한다. 타인에게 다가서기가 어색하고,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낯설어졌다. 쿨하다고 포장하지만 사실은 기계적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가끔 뉴스나 인터넷에서 선의가 보이면 그 반작용으로 인해 한없이 마음이 푸근해지는지도 모른다.
G9는 조선으로 넘어가 종부가 되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선량함에 기대어 로봇은 인간이 되었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더라도 슬픔을 알게 되었다. 만약 G9가 조선으로 넘어가 진정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했다면, 그는 그저 로봇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과거로 보내진 로봇의 귀환율이 적다 못해 1%밖에 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 시대에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AI가 발전하고 로봇이 등장하면서 디지털윤리였나, 로봇을 개발하고 프로그래밍하는 개발자, 즉 인간의 윤리도 중요시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개발자가 인종차별주의자라면, 장애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가치관은 은연중 로봇에게 녹아들 수 있기 때문이다.
G9는 종부가 될 수 있었지만, 여차했다면 그저 로봇으로 남았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를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킨 건 사회, 인간들이니까.
《조선 사이보그전》은 그런 대목도 잠시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덮으면서는 그저 ‘힐링’만 남은 것 같다. G9의 귀욤이의 일면도, 인물관계 또한 좋았고, 양반 박종수부터 양자가된 아이들이 G9과 함께하는 모습도 읽기 좋았다. 휴머니티한 한국판 터미네이터 같달까?
이 소설에서 ‘구멍’이라고 할 부분은 글쎄. 이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일종의 설정 오류 내지는 작가 선생님의 빈틈인 셈이다.
G9가 과거로 갈 때 호패도 가지고 갔는데,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로봇 G9’라고 밝힌다. 호패에 적힌 조선식 신상정보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한복이 엉터리였듯 호패도 엉터리라서 그냥 버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