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涅槃)과 해탈(解脫) / 자현 스님 법문
불교에 열반과 해탈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열반과 해탈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근본경전에 의하면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열반과 해탈은 말의 뜻에 차이가 있습니다.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는 ‘nibbāna, nirvāṇa(sk.)’를 번역한 것이고,
해탈은 ‘벗어났다’는 의미의 ‘vimokkha, vimokṣa(sk.)’를 번역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고 하셨습니다.
열반은 세상을 불태우는 삼독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러한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해탈은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구속이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인도 바라문이나 힌두교에서 우주의 긍정적인 원인인
브라만과 개인에 내재하는 아트만이라는 원리가
동일한 것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 아트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해탈을 무명, 무지에서 벗어난 의미로 쓰고 있다.
해탈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란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사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죽을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못할 것이 없습니다.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의미 있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무덤에서 가장 부자가 되는 일 따윈 중요하지 않다.
매일 밤 자기 전 우리는 정말 놀랄 만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 중요하다.”
해탈한 사람에게 죽음은 고통과 좌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스티스 잡스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낭비하지 마세요.
그건 다른 사람이 생각한 대로 사는 겁니다.”
이와 같이 생사에서의 해탈이란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선택의 가능성이 단절된 죽음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사해탈입니다.
이러한 해탈은 우리가 자신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오온이나 육입처가 허망한 망상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자각에서 비롯됩니다.
생사는 허망한 망념을 자신의 존재로 착각하는 무명과
욕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 욕탐을 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욕탐에서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탐에 결박되지 않으면
마음이 자신의 존재를 취착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이렇게 허망한 존재를 취하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한편 열반의 세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허무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견(無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사의 세계를 떠나 모든 존재가 생멸하지 않고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는 열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유견(有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열반은 허망하게 조작된 유무(有無)의 모순 대립을 떠난
중도(中道)의 세계이며 연기하는 법계(法界)와 공(空)의 세계입니다.
허망한 생각을 그치고 연기하는 법계를 여실하게 관조하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원(願)으로 충만한 삶, 이것이 열반을성취한 삶입니다.
열반은 타던 불이 꺼지는 것처럼 어디로 가거나 오는 것이 없이
적정상태로 평화로운 항상(恒常)함에 있는 것이다.
출처 : 불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