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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스라엘에 선지자 있음을 알게 하라(김요셉)
열왕기하 5장 8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다 하니라
나아만은 문둥병자였고 아람 나라의 유명한 장군입니다. 문둥병이라는 게 자기도 모르고 3년, 자기가 알고 3년 그렇게 지낸댔죠. 이 문둥병은 잠복 기간이 이렇게 아주 길대요. 참 무서운 병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나라에 공을 세우고 왕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만 왕도 어쩔 수가 없어요. 돈이 많아도 이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잡아왔던 이스라엘 나라의 하녀 하나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님이 이스라엘에 계신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가서 서시면은 좋겠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평소에 같았으면 그런 소리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호통을 치고 야단을 쳤겠는데 나만 장군의 부인이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뛰어서 <야 그러면 정말 우리 주인님의 문둥병을 고칠 수가 있다는 얘기냐?> 그랬더니 이 계집아이가 당돌하잖아요. <그럼요. 고칠 수 있고 말고요. 우리 선지자님 앞에만 가면 문제도 없습니다. 끝까짓 거는> 그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믿음이 좋아졌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 같아도 하나님은 이렇게 낮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아람 왕이 그래서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 나라로 보내요. 그런데 이 계집종으로 잡혀온 아이는 <사마리아에 계신 우리 선지자 앞에 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보내는 친서까지 써서 보냈죠. 나아만 장군이 찾아와 이스라엘 나라의 왕을 만났습니다. 전해준 아람 왕의 친서를 읽어보고 이스라엘 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물어보죠. 신하들이 다 꿀 먹은 벙어리, 말을 못 합니다. 왜? 자기들도 모르니까 생전 처음 듣는 소리잖아요. 이렇게 엄청난 비밀을 왕도 모르고 대신들도 모르고 누구만이 압니까? 계집종 하나가 이 사실을 알더라. 믿음의 사람만이 이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왕은 너무 기가 막혀가지고 <이렇게 트집 잡으려고 하는 게 틀림없는데 큰일 났다.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 그래서 왕이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말을 엘리사가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왕이여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보내세요. 그가 무엇을 알리다> 이렇게 말씀하죠, 뭐를 알 거라고요?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 참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성경 한 절 한 절은 그냥 적당히 이렇게 넘어갈 게 아니에요. 우리가 이 말씀을 곱씹어 보아야 됩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선지자가 누군데, 선지자가 누굽니까? 발람 같은 사람도 선지자예요. 이 사람도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초청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가지 마라>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고요. 분명한 증거를 받았던 사람이에요. 욥은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학자들이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욥은 아브라함하고 같은 시대의 사람이라 그래요.
엘리야가 자기 혼자만 남은 것 같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랬죠. <하나님 이 땅에는
다른 선지자들은 다 죽었고 이제 나 하나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할 때에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런 멍청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선지자 7천 명을 내가 남겨놓았노라>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음성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상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하간 엘리사가 이런 말씀을 왕에게 보냈더니 왕도 이 나아만 장군을 엘리사에게로 보냅니다. 자 근데 우리가 다시금 곱씹어 부어야 된다. 무슨 말씀이에요?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에는 누가 있어요? 선지자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꽃입니다. 선지자들이 성경을 썼습니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가르쳐주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해주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누구를 만나야 된다? 예수님이 이거 가르쳐 주신 거예요.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선지자 선지자를 만나야 돼요.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게 복을 받고 사는 사람도 물론 복된 사람이에요. 그러나 진짜로 복된 사람은 부모가 아니고 선지자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이게 중요합니다. 왜? 그분이 우리에게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래요. 그분이 우리에게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해 주시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를 알게 해 주시니까 선지자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정말 주님 잘 섬기면서 살아가는 복된 백성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러 찾아갑니다.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고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쳐서 깨끗한 몸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리다> 하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선지자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새롭게 배워야 하고 이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선지자란 누구인가? 첫째 나는 세 가지로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뭐예요? 선지자란 유권적 해석자다. 유권적이란 권위가 있다, 그 말이죠. 유권적 해석은 정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해석 이런 해석이 돼야 한다 그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해석할 것이냐 중요하게 세 가지를 해석해야 됩니다. 선지자는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왜? 선지자는 성경을 쓴 사람이에요.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가지고 성경을 기록을 했어요. 신학자도 선지자가 된 사람이면 해석할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해석합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 왕에게 할 일이 아니고 사실은 선지자의 몫이다. 그래서 이 세상 돌아가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이것이 내가 절 무엇인가 이 해석을 바르게 하려면 왕을 찾아가서 물어볼 게 아니고 당시의 유명한 학자를 찾아갈 것도 아니고 선지자를 찾아가서 <이것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연을 해석하는 사람이에요. 선지자는 누구냐 자연을 해석한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저 유대 땅에 임금이 나오셨구나, 메시아가 오셨구나, 이걸 알았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하나님은 어디엔가 다 기록해 놓고 계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의 별들을 통해서도 메시아가 오신 것을 알게 해 주셨어요.
둘째로 선지자는 누구냐 선지자는 만병의 대의사라야 한다. 의사다 하는 거죠. 세상 의사들은 고치지 못하는 것을 선지자를 찾아가 만났더니 그 선지자가 고쳤더라. 모세도 많은 병을 고쳤습니다. 엘리아도 엘리사도 병자들을 죽은 자를 살려냈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병을 통 고쳐주셨습니다. 선지자가 누구냐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선지자를 찾아가서 만나야 합니다.
셋째로 선지자는 누구냐 이스라엘의 국방이다. 왜 이스라엘의 국방이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나라를 지키는 국방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왕이 가장 고민하는 게 뭐예요? 혹시 아람 나라가 쳐들어올까 봐 이게 제일 고민이잖아요. 그래서 옷을 찢었지 그까짓 문둥이 병 고쳐주거나 안 고쳐주거나 그거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못 고쳐줬다가는 아람이 쳐들어올까 봐 전쟁이 날까 봐 자기의 옷을 찢은 거잖아요.
소돔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런 기도를 해야 돼요. <하나님, 이 땅에 의인이 얼마나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땅의 죄악이 너무 관념 그래서 벌 받는 건 너무나 당연해요. 그런데 <하나님 그래도 이 땅에 의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의인들을 보시고 이 땅에서 재앙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의인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주여 이 땅에 새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십니다. 이 의인이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인으로 변할 때 이 땅이 밝아집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마지막 때에 저희를 구원해 주시고 참 선지자로 쓰임 받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은 이 땅에 의인들을 일으키시려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의인들을 일으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50) 여호와의 복병
역대하 20:20-23
20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아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 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여호사밧 왕 때의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자손들 이 세 나라가 연합군을 만들어서 이 조그마한 유대 나라를 치러 쳐들어왔어요. 세일산 자손이라는 거는 에돔 족속입니다. 왕은 여호사밧입니다. 하나님 성전에 나갔습니다. 무릎을 끓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세 나라가 연합해서 쳐들어옵니다. 나는 한나라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주님이 택하신 나라, 하나님이 이제까지 인도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나라인데 하나님 이 나라를 멸망시키실 겁니까? 이 나라를 살려주시옵소서>
여호사밧 왕은 기도할 줄을 아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이 꼼짝 못 하도록 만들어 놓는 기도의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옛날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들에게 주리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적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우리를 이 땅을 다 차지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를 박멸시켜 버리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붙잡고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합니다. 주여 우리를 살려주시는데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고 약속을 우리에게 지켜주시옵소서>
둘째, 하나로도 모자라서 하나 더 해요. 옛날 솔로몬 왕이 이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 앞에 성전 봉원 기도를 드릴 때 물론 여러 가지를 다 마련했어요. 그러지만 그중에 특별히 이 땅에 전쟁이 났을 때 우리 백성들이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에 와서 기도하거든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구해 주겠다> 그러니까 <하나님 솔로몬과 하신 약속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해 주시옵소서>
셋째로, 하나 더 얘기합니다. 옛날 모세가 우리 백성들 애굽 땅에서부터 해방시켜서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방황하면서 살다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모세가 우리 조상들을 인도에서 광야에서 살 때에 이 모합 족속, 암몬 족속, 에돔 족속들이 길을 막았습니다. 근데 하나님 말씀하세요. <그들도 다 너희 형제들이 아니냐. 싸우지 마라. 길을 막으면 돌아서 가면 되는 거지> 눈물을 머금고 빙빙 돌아서 먼 길로 갔어요.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하는데도 먼 길로 갔어요.
<하나님 옛날 모세가 했던 일,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빙빙 돌아서 고생고생하면서 이렇게 갔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자들이 은혜는 알지 못하고 이제 우리 땅을 뺏어먹겠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옛날 모세와 맺은 약속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은 옛날 아브라함과의 약속, 솔로몬과의 약속, 모세와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시고 <내가 해준다> 그러면 된 거예요. 야하시엘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와서 소리칩니다. <유다 백성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너희는 내일 그냥 맞서 나가기만 해라. 너희는 싸울 것도 없다>
오늘 20절부터 23절까지 읽었어요. 여호사밧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습니다. 믿고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좀 기쁘시게 해드릴까 하고 생각하고 찬양하는 부대를 만들어 제일 앞에 세워서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나가게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요. 무기도 없어요. 적군들이 치면 다 죽는 거예요.
22절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뭐 하셨다고요? <복병을 두셨다> 복병이 뭡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복병을 하나님이 두셨어요. 그래서 우리 국어사전을 보면 복병이라는 말이 꼭 숨겨둔 용사만 말씀하는 게 아니에요. 뜻밖에 용사라 그럴까, 뜻밖의 상대 뜻밖의 구원자 이것도 복병이라고 그래요.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가지고 구원해 낸단 말이죠.
또 뭐가 복병이 있어요? 어려운 일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복병을 두셨어요. 복병이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없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복병을 주셨어요. 나에게 주신 복병 누구예요? 예수님. 그런가 하면 또 이렇게 살짝 뒤집어서 보니까, 누가 복병이냐. 내가 복병이야 하나님이 나를 숨겨 놓으셨어요.
하나님이 오늘 밤에 여러분들을 부르셔서 <너 나를 위해서 일 좀 하지 않을래? 내가 이 나라를 구하는 데 쓸 복병을 찾고 있는데, 네가 한번 복병이 되어 보지 않겠니?> 하나님은 복병을 찾으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엘리야가 그랬어요.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사람들은 다 멸망 당했고 나 하나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뭐라 그러세요. <너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이 땅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선지자 7000명을 남겼다. 내가 그 땅에 내 백성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내가 전쟁을 한다>
그날 밤에 역사가 일어났어요. 성 바깥에 문둥이 네 명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도 하도 굶주려 가지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이왕이면 아람 사람들한테 가서 항복하자. 그리고 밥 좀 달라 그러자> 아마 십 리 밖에서 바깥에서도 두 손 들고 찾아왔겠지. 근데 가까이 와서 봤는데 적진 가까이 와서 봤는데 조용해요. 아무도 없어 그러고 들어가 봤더니, 먹을 게 가득 가득 있어요. 항복은 둘째고 우선 먹기부터 하고 보자 실컷 잡수셨어요. 실컷 먹고 나니까 눈이 조금 뜨여요. 그제서야 염치가 조금 생기죠. 그니까 배고프면 염치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요. 우리는 문둥이 주제에 이렇게 배부르게 먹었는데 성 안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다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이거 어쩌면 좋으냐, 이 기쁜 소식을 가서 전하자, 그래가지고 성문으로 달려가가지고 소리소리 지르잖아요. <여보쇼~ 나와 보쇼. 적군들이 다 물러가고 하나도 없습니다>
정탐병을 보내서 사실인가 아닌가 나가 보고 봤더니, 진짜로 적군은 얼마나 멀리 가버렸는지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고 양식이 가득가득 쌓여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돌아와서 이 정탐병들이 보고를 하니까 드디어 문을 열고 군사들이 다 몰려나와 양식을 다 가져갔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죠. 성경에서 말해요. 그날 밤에 적군들이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래요. 무슨 소리 병거소리 말소리 뭐 전쟁하는 소리 이런 소리가 들리니까 자다가 말고 깜짝 놀라서 깨어난 거예요. 그래갖고 양식 같은 건 물론이고 이 병장기도 다 두고 도망가고 자기 몸뚱이 하나 살아서 도망갔단 말이에요.
그때에 문둥이들이 찾아왔거든요. 10리 밖, 20리 밖, 30리 밖은 가봐도 적군은 그림자도 안 보여요. 복병이 있습니까? 누가 복병이죠. 하나님이 이런 소리를 듣게 하셨어요. 병거 소리 싸움하는 소리 말달리는 소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설교 제목이 복병입니다. 여호와의 복병을 찾아야지. 물론 쫄병도 복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조금 더 깊이 보면 그냥 졸병이 복병인 게 아니라, 진짜 복병은 속에 있었어요. 사람 속에 숨어 있었어요. 여러분 마음속에도 복병을 두셨어요.
(51) 참 이스라엘 사람
[요1:47-51]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실 때에 첫 말씀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또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 이스라엘이 있으면 거짓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씀이겠죠. 그러니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말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사람 노릇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에 있어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칭찬하셨는데 이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나다나엘을 통해서 몇 가지를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 창세기 3장 1절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간교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뱀은 결국 마귀에게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란 놈이 뱀 속에 들어가 역사합니다. 우리 신약성경에서는 마귀는 누구냐? 그게 바로 옛 뱀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옛날 에덴 동산에 있던 뱀이, 하와를 유혹하던 뱀이 바로 마귀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실은 진짜 옛 뱀, 그건 마귀의 형상이겠죠. 마귀가 뱀의 형상을 가지고 존재하겠죠. 그런데 이놈이 뱀 속에 들어가 하와를 유혹하고 아담을 타락시키는 이런 짓을 하고야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째로 찾으시는 사람은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 바꿔 말하면 뭐가 됩니까? 진실한 사람, 사기성이 없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남을 속이려고 하는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
항상 우리는 진실한 사람이 돼야겠다. 이 세상 많은 민족 가운데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들어 쓰실 때 <이 백성들이 내가 택한 백성이다. 이들이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첫째가는 특징이 뭐냐, 그것은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데 내 속에 간사한 것을 가지고 그것을 품고 있으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셨어요. 우리가 이 믿음 하나를 가지고 살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이렇게 히브리서 11장 6절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하는 것을 믿어라. 상을 주신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바꿔서 복을 주신다 그렇게 말씀할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내려주시더라.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잘 찾고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복을 받는 사람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누구냐?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나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나온 거는 창세기 32장입니다. 이제 날이 새면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야 되는데 에서가 군대를 끌고 와 야곱을 죽이겠다고 이렇게 온다는 소문을 듣고서 야곱은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그날 밤 얍복 강에서 밤새 기도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더라> 이런 말로 설명은 했어요. 실제로 어떤 사람이 나타났겠죠. 그래 가지고 야곱을 붙잡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무엇이냐? 기도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가지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씨름을 해서 이기면 기도가 형통하고 승리하는 것이고. 씨름을 해서 못 이기면 실패자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야곱은 밤에 나타난 사람을 붙잡고 밤새도록 씨름을 했는데 얼마나 끈질기게 얼마나 지독하게 열심히 씨름을 했는지 나중에 이 사람이 <제발 좀 놔라, 날이 새려고 하는데 내가 빨리 가야 되겠다> 그랬더니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실 수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래 너의 이름이 뭐냐> <너의 소원이 뭐냐 하고 물어보질 않고 너의 이름이 뭐냐> 하고 물어봐요. 그랬더니,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이라고 하지 마라. 너의 이름은 이제부터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고 사람과 겨루어서도 이겼다 이런 뜻이라고 성경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는데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워 씨름해 가지고 이김으로 드디어 받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기도해서 이긴 사람이라야 이스라엘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지면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누구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말씀했더니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가지고 <아니 주여 내가 주님 만나는 게 오늘 초면인데 언제 나를 보셨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예수님 대답하시죠.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 이 말에 나다나엘이 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내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나를 보셨다고요> 그는 밤에 몰래 이 무화과 나무 밑에 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아셨다고 하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하나님은 누구를 아시느냐, 사람들 몰래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을 보시고 아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냐,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다 보라고 기도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은 다 보지 못해도 하나님만 아시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그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인 것입니다. 야곱은 기도할 때에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기도할 때에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참 이스라엘이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
로마서 2장 28절 29절 보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하고 설명을 해요. 그러면 표면적 유대인은 뭐고 이면적 유대인은 뭡니까? 표면적 유대인은 육신에 혈통적으로 야곱의 자손으로 태어난 야곱의 열두 아들들과 그들의 후손들, 이것을 우리는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다 표면적 유대인들이죠. 표면적 유대인으로서 합격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을 찾으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만 유대인 혈통을 받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영적인 변화를 받은 새 사람이 되어야만 참 이스라엘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또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다>라는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이면적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누구냐, 이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신령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8장 11절-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마지막 넷째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누구냐?
이사야 41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야곱을 부르실 때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이렇게 부르십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그렇게 부르세요. 그러시면서 이 지렁이 같은 야곱이를 변화시켜 놓으시는데, 고 다음엔 이어서 <너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스라엘 사람들아> 라고 부르세요. 야곱이라는 이름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같이 나와요. 그런데 야곱이는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다음에는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만들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참 이스라엘이란 누구냐, 지렁이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와 같은 이런 사람으로 변화받은 사람이 참 이스라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는 신령한 사람, 능력의 사람, 지혜의 사람, 진리의 사람들로 변화시켜주시고 인도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거짓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 이스라엘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진실한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52)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
여러분 예수님을 누가 죽였죠? 우리가 죽였다고 하는데 누구죠?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나는 아니죠? 나는 아니죠?> 그랬대요. 그 예수님 누가 죽였느냐? 물어보면 <목사님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안 죽었습니다> 그러는데 우리가 죽였다면 대체 누가 죽였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물어보면 꼭 한 사람씩 나오는데 <제가 죽였습니다> < 정말 당신이 예수님이 죽였어요? 그럼 언제 죽이셨죠? 또 어디서 죽였어요? 어떻게 죽이셨는데? 왜 죽이셨어요?> 이 육하원칙을 가지고 이렇게 물어보면 다 대답 못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일이 없으면 또 어떻게 돼요? 예수님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대>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왜 네가 나를 죽이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위해서 죽었냐> 하는 거예요. 옛날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을 잡았어요. 그러면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이 짐승을 죽였는지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근데 그런 거 모르겠다~ 그런다면 그거는 짐승을 안 죽인 거죠.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가롯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아서 사도에 가입시키는데 조건이 뭡니까? 새로운 사도가 되는 조건이 예수님이 시작할 때부터 이제까지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야 된다, 이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둘째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할 사람을 뽑자. 그러니까 메시지의 내용이 뭐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거잖아요. 그거 안 전하면 메시지가 못 되는 거예요.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 그냥 살아나시기만 한 게 아니지.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
그래서 아마 주님께 물어볼 거예요. <주님 오늘 우리 성도들 흩어져 집에 갈 때 누구하고 같이 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하나 고르시겠지만,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주님 꼭 나와 함께 가셔야 됩니다. 꼭 우리 집에 가셔야 됩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영접하는 사람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래 내가 오늘 너희의 집에 가겠다> 삭개오의 집에 가셨던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보겠다고 모여들었지만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너희의 집에 가서 유해야 되겠다>
우리 사도신경에서는 예수님을 누가 죽였다고 그러죠? 빌라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 보니까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 장로들이 빌라도에게 죽이라고 협박을 하잖아요.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당신이 만약 이 사람 살려준다면 우리가 로마 황제에게 가서 고소할 겁니다. 죽이시오~>
빌라도는 정말 죽이기 싫었어. 아내가 꿈을 꿨다고 하면서까지 와서 말씀을 전달하죠. <저 사람한테 절대로 해롭게 하지 말라> 그러니까 빌라도는 더 겁이 나서 자기가 신문해 본 바로는 죄를 찾을 게 없어요. 그러니까 안 죽이려고 하는데 대제사장들하고 장로들이 막 협박을 해가면서 죽이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죽이긴 죽이는데 대야에다가 물 떠다가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지하니 너희가 당해라>
그래 또 그 사람들 소리소리 질러요. <우리가 다 당할 테니까 걱정 말고 당신은 그냥 죽이기만 해라. 사형 언도만 내려라> 그래서 죽였어요. 근데 왜 빌라도에게 죄를 다 뒤집어 씌워가지고 사도신경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왜 예배 시간마다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 말이 이게 과연 바른 신앙 고백이냐.
제물로 죽으셨다면 성경은 화목 제물이라는 말이 신약 성경에는 제일 많이 나오고, 속죄제, 번죄라는 말도 나와요. 이사야 53장에서는 속건 제물이라는 말이 나와요. 오종 제사인데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게 레위기에 나오는 이 5가지 제물이 다 되시는 거예요.
레위기 4장은 넷으로 나눠져요. 누가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넷으로 나눕니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이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 그다음에 둘째로 등장하는 것이 백성들이 전체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셋째는 족장 중에 나라가 죄를 지었을 때, 넷째 평민이 죄를 지었을 때 이렇게 나눠집니다. 가장 뚜렷하게 달라지는 게 뭐냐? 제물이 달라요.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죠. 속죄의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제물은 내 마음대로 아무거나 드리는 거 아닙니다. 일 년 된 숫송아지를 드립니다. 둘째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는 송아지를 드리고 족장이 죄를 지었을 때 숫송아지, 평민이 죄를 지었을 때는 암 염소, 이렇게 다릅니다.
그러면 내가 죄를 지었어요. 어떤 짐승을 가져와야 하나요? 숫송아지입니다. 그 다음 머리에 손을 얹고 나의 죄를 다 고백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팔을 타고 내 죄가 이 짐승에게 들어갑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이것이 믿어져야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원래는 이놈은 죄가 없는 놈인데 내가 죄를 고백했더니 내 죄가 이 속에 다 들어가 버렸단 말이에요. 그다음에는 이놈 죄덩어리가 되어 죽어야 하고 나는 죄가 다 없어졌으니까 안 죽어도 되는 거예요.
레위기 4장 속죄의 제의에 대한 말씀을 읽어나가다가 답을 찾았어요. 그런데 이 네 가지 중에 둘째가 있죠. 둘째 누가 죄 지었을 때 온 회중이 백성 전체가 죄를 지었을 때, 이게 어려워요. 예수님은 누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나 하나를 위한 속죄의 제물도 되시지만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한 재물로 지금 죽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네 가지의 제사 중에 둘째에 해당이 되는 거예요. 온 회중, 백성 전체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제사 드리느냐? 이것이 중요한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둘째는 좀 이상하잖아요. 백성 전부가 죄를 지었는데 누가 죽여야 돼요? 그러면 백성이 전체가 죄를 지었는데 그 백성이 다 와서 죽입니까? 성경에서는 장로들이 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다루는 두 그룹이 있는데 제사장과 장로들이 있어요. 제사장은 종교적 지도자, 장로는 정치적 지도자.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물론 제사장들 책임도 커요. 장로들에게 있다고 보시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사도신경에 유대인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렇게 사도신경을 만들었다면,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될까요? 예수님은 누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건가?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게 이해가 되시죠? 예수님 유대인들만을 위한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은 정치 지도자, 장로 격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유대교 장로들이 이방인 장로인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어가지고 <예수를 죽여라, 예수를 죽여라. 나는 못 죽이겠다. 안 돼. 죽여. 너 안 죽이면 널 황제한테 고발할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쫄아서 사형선고를 내린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물이 되신다, 우리 한국 사람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면 이방인 장로격인 빌라도가 유대인 장로들뿐만 아니라 유대인 제사장들까지 합해서 이 사람들과 같이 협의를 해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답으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한 제물이 되실 수 있겠느냐? 누구를 위한 제물이에요? 온 인류를 위한 제물이죠. 여러분 이해가 되시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 한마디의 고백이 얼마나 엄청난 뜻을 가지고 있는지 이걸 우리가 알지 못하고 그냥 건성으로 치워버렸어요. 심지어는 이게 잘못됐다고 공격을 했어요. 깨닫고 보면 이 고백에 이렇게 깊은 의미가 들어 있구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기에 나 같은 한국 사람들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2천 년이 지난 이제 와서 우리가 새롭게 깨닫고 보니 사도신경을 만드는 그 사람들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장로들이 죽였다고 하지도, 제사장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고백이 진실한 거잖아요.
이 제사법이라는 게 이렇게 우리가 조금 심각하게 생각을 해봐야 돼요. 그런데 제사법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이렇게 입장을 바꾸는, 다윗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내가 다윗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브라함 이야기 건성 읽지 말고 내가 아브라함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성경을 읽어나가야지 깊이 있게 깨달아지는 거예요.
내가 이 염소를 지금 끌고 나와 한마디 하라고 하면 두가지인데 <첫째 너는 죄가 없다. 그런데 너는 죽어야 한다. 왜? 내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 둘째는 내가 너를 죽여야 하는데 내가 미안하다. 네가 죽으면 나는 살아날 수 있어, 만약 네가 안 죽으면 내가 죽어야 한다. 염소야 니가 죽으면 내가 살아날 수 있고, 니가 안 죽겠다고 하면 내가 죽어야 된다. 어떻게하면 좋냐? 니가 내 대신 죽어 줄 수 있겠니?> 그 짐승은 뭐라고 할까요? 소리 지르겠죠. <내가 미쳤냐? 너 대신 왜 내가 죽어, 니가 죄를 지었으면 네가 죽어야지. 왜 내가 너 대신 죽으라고 하느냐?>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제물이 되셔서 죽으시는 거예요. 누가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까? 예수님을 향해서 제가 중요하게 두 가지 얘기했어요. 첫째 너는 죄가 없다. 둘째 미안하다. 적어도 이 두 가지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너는 죄가 없다. 그렇게 말한 사람 있어요? 유대인 장로들 가운데 그렇게 말한 사람 있나요? 제사장들 속에서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근데 누군가 한 사람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죠. 누구예요? 빌라도 뭐라고 그랬어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너희들이 하도 악을 쓰고 죽이라고 하니까 나는 죽이지는 못하겠고 그냥 매 몇 대 때려 석방시켜야 되겠다. 이 사람은 죄가 없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짐승을 죽일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죽여야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신다는 거죠.
첫째는 너는 죄가 없다. 둘째 미안하다. 예수님께 대하여 유대인들, 장로들, 제사장들 미안한 마음 가졌을까요? 이 사람들은 살기가 넘치던 사람들이 <죽여라, 죽여라, 꼴도 보기 싫다, 빨리 죽여라> 그런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면 하나님은 그런 제사 받지도 않으세요.
첫째는 정치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둘째 제사법상으로 볼 때에 누가 예수님을 죽여야 했느냐? 셋째는 죽이는 사람의 심리 상태로 볼 때 누가 죽여야 옳은 것이었느냐? 예수님을 향해서 죄가 없다고 선포하고,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죽여야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시는 거죠.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씀이 이렇게 옳은 말씀이구나. 이거 깨닫게 해주시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럽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거 깨달았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을 보면 이렇게 설명을 해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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