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고 김삿갓(蘭皐 金炳淵) 선생 遺蹟址
*위치 : 강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河東面 臥石里) 노루목.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김삿갓 유적지내에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넘쳐흐르고 가을에는 형언각색 단풍으로 인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은자(隱者)의 쉼터라 하겠다.
이처럼 산자수려한 고산준령 풍운속에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방랑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蘭皐 金炳淵 묘소와 주거지가 있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하동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영월읍에서 동강교를 건너,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 상류를 이루는 계곡을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임진왜란 때 고씨 일족이 피난했다는 고씨동굴과 영월발전소를 지나면 대야동(大野洞) 삼거리가 나온다.
첩첩산중인 영월 땅에 무슨 들이 있을까마는 하도 들이 없으니 손바닥만한 들을 보고도 ‘큰들’ 이란다.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가다가 미사리 어구에서 거석골로 접어 들어 4km즘 들어가면 하동면 와석리(河東面 臥石里) 노루목에 방랑시인 김삿갓 묘가 있다.
거기서 2km즘 들어가면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살던 집터가 있고 어머니와 부인, 며느리가 대를 이어가며 고생스럽게 방아를 찧었을 디딜방아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골짜기 해가 짧아 바깥 세상보다 어둠이 먼저 내린다 하여 ‘어둔’ 이라고 불렀다는 곳이다.
김삿갓, 그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 호는 난고(蘭皐), 안동김씨 중에서도 ‘장김’ 이라고 하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장동(壯洞) 김씨 세도 가문의 후손이다.
그런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순조 11년(1811)에 일어났던 홍경래난(洪景來亂)이 끝난 후 그의 할아버지가 죄를 입어 처형되고 겨우 멸문의 화는 면했지만 역신(逆臣)의 자손이라는 지탄을 받아 아버지 마저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한 후였다.
그렇게 자랐으면서도 천재시인 김병연은 20세에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白日場)에 나가 장원급제를 했건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던가.
하필이면 그 백일장의 시제(詩題)는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았음을 탄하라” (論鄭嘉山忠節死 歎金益淳罪通于天)는 것이었다.
홍경래난 때 가산군수 정시(嘉山郡守 鄭蓍)가 충절을 지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것과, 선천부사 김익순(宣川府使 金益淳)이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여 적에게 협조하다가 전세가 역전되자 홍경래의 참모였던 김창시(金昌始)의 머리를 돈 일천량을 주고 사서 자기의 공으로 위장하려 했던 죄를 논하라는 것이다.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 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김병연은 단종 이래 유난히 충절을 숭상하던 고을 영월에서 자라면서 배우고 익혀 키워 온 소신대로 한껏 정가산을 치켜 세우고 김익순을 준엄하게 매도해 나갔다.
“대대로 신하라고 일컬어 오던 너 김익순아” (曰爾世臣金益淳)로 시작한 김병연은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 그의 죄를 추상같이 밝히면서, 너는 “가문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김씨로서 항렬은 장안에 소문난 순(淳)자 돌임이 아니더냐”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고 꼬집고, “임금 앞에 꿇었던 무름을 흉적에게도 꿇었느냐” 고 꾸짖은 후에 마지막 결구(結句)를 이렇게 맺었다.
"忘君是日又忘親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一死猶輕萬死宜 한번 죽어 부족하고 만번 죽어 마땅하다
春秋筆法爾知否 춘추의 필법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此事流傳東國史 치욕스런 이사실은 이 나라 역사에 길이 전하리라 "
아들의 장원소식을 듣고 기뻐했던 어머니는 아들의 시를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그제서야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였음을 안 김병연은 천하의 죄인임을 자처하여 삿갓을 쓰고 집을 나섰다.
그 후로 방방곡곡을 방랑하면서 풍자와 해학으로 숫한 일화와 명시를 남기고 57세로 일생을 마감한 한국의 시선(詩仙) 김삿갓, 그가 지금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깊은 산골 맑게 흐르는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한 이 묘에는 상석도 비석도 모두 자연석 그대로여서 과시 풍류시인의 무덤다운 운치를 자아낸다.
빗돌에는 “시선 난고 김병연의 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고 새겨 있고 묘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나는 청산을 향하여 가는데, 푸른 물 너는 어디로부터 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라고 읊은 그의 절구(絶句)를 새긴 작은 빗돌이 서 있어서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보다 먼저 그 아래 묘역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그의 시비와 만난다.
"二十樹下三十客 (스무나무 아래에서 설은 나그네가)
四十村中五十飯 (망할 놈의 마을에서 쉰 밥을 먹는다)
人間豈有七十事 (인간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
不如歸家三十飯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으리)"
널이 알려진 시 이기는 하지만 문자의 기교로 세상을 풍자했을 뿐인 이 시를, 왜 그 많은 명작들을 다 제쳐두고 맨 앞에 간판처럼 내 세웠을까? 자유분방했던 그의 생활과 성격처럼 격식에 억매이지 않고 다양하게 문자와 어휘를 구사하여 서민문학으로 승화시켰던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일반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닦아가기 위해서 였으리라.
철종14년(1863)에 전남 화순에서 객사한 김삿갓의 시신을 그의 둘째 아들 익균(翼均)이 이곳으로 옮겨 장사 지냈으나 그 후 후손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돌보는 사람 없이 세상에서 잊혀 져 가고 있었는데 영월의 한 향토사학자에 의하여 지난 1982년에 확인되고 영월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가꾸고 시비를 세웠다고 한다.
김삿갓은 맏아들 학균이 태어난 직후인 22세때 가출을 단행했다.
"九萬里長天擧頭難(구만리장천거두난)구만리 장천 높다 해도 머리 들기 힘들고
三千里地間未足宜(삼천리지간미족의)삼천리 땅 넓다 해도 발뻗기 힘들구나"
그렇게 주유천하하던 김삿갓은 2년뒤 잠깐 집에 돌아와 후사 없이 죽은 형 병하에게 자신의 맏이 학균을 양자로 입양시키고,둘째 翼均(익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둘째아들이 성장하여 양자로 간 학균 대신 집안의 대를 이은 익균은 아비를 찾으려 전국 각지를 돌며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있는 곳을 세 번이나 찾아가 귀가를 간청했지만 김삿갓은 그때마다 교묘히 몸을 피해 거절하였다.
훗날 익균은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객사하여 가매장되어 있던 아버지의 유골을 집 근처인 영월로 이장하여 장사지냈다.
지금도 화순군 동복면에는 김삿갓이 3년간 매장 되어 있던 '김삿갓 初葬址(초장지)'가 남아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 풍자와 대담으로 가득한 노래는 100년이 넘게 회자되었건만, 소문으로만 떠돌던 시인의 묘소는 20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영월의 향토사학자 고 박영국 선생이 영월 마대산(1,052m) 기슭의 와석골에서 찾아낸 것이다.
1982년 박영국 선생은 '김삿갓 무덤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양백지간, 영월과 영춘 어간에 있다'는 고문서 기록 하나에 의지했다고 한다.
김삿갓 유적지가 있는 김삿갓계곡의 원래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딴 와석계곡. 그런데 김삿갓 시인의 묘소가 세상에 알려지면서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계곡 이름도 자연스레 김삿갓계곡으로 바뀌었다.
현재 예술인촌, 조선민화박물관, 묵산미술관 등이 자리잡고 있는 김삿갓계곡은 최근 문화와 예술을 아우르는 테마관광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자연의 순리에 의존하는 김삿갓의 風水觀>
이 거석골이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의 하나라고도 하고 명종 때 풍수대가였던 격암 남사고(格菴 南師古)가 천하에 둘도 없는 피장처(避藏處)라고 했다하여 ‘죽지 않는 땅’ 미사리(未死里)라는 지명과 함께 전해 오는 피난처였다.
그래서 그랬던지 김삿갓의 어머니 함평이씨가 어린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신분을 숨겨가며 멸문의 화를 피하여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숨어 들어 정착한 곳으로 回龍隱脈의 吉地라고 할까?.
함평李氏 어머니의 看山이 삿갓보다 한수 앞이라 방랑의 영혼이 어머니 덕택에 노루목 언덕에 안치되었으니 이젠 어머니의 恨을 위로하는데 힘쓰길 바라며, 부디 원컨데 위로의 詩를 영워히 吐하시오.
김삿갓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墓所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발견되었으니 좋은 吉地는 자연이 보호해주는 것이다.
맑게 흐르는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한 墓에는 床石도 碑石도 모두 自然石으로 풍류시인의 무덤 다운 운치를 자아낸다. 자연석의 빗돌에는 “시선 난고 김병연의 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1. 嘲地官(조지관)
지관을 놀리다
風水先生本是虛(풍수선생본시허) 풍수 선생은 본래 허망된 말만 하는 사람이라
指南指北舌飜空(지남지북설번공) 남이다 북이다 가리키며 부질없이 혀를 놀리네.
靑山若有公侯地(청산약유공후지) 청산 속에 만약 명당 자리가 있다면
何不當年葬爾翁(하불당년장이옹) 어찌 네 아비를 파묻지 않았나.
2. 嘲地師(조지사)
지사를 조롱함
可笑龍山林處士(가소용산임처사) 가소롭구나 용산에 사는 임처사여
暮年何學李淳風(모년하학이순풍) 늘그막에 어찌하여 이순풍을 배웠나.
雙眸能貫千峰脈(쌍모능관천봉맥) 두 눈으로 산줄기를 꿰뚫어 본다면서
兩足徒行萬壑空(양족도행만학공) 두 다리로 헛되이 골짜기를 헤매네.
顯顯天文猶未達(현현천문유미달) 환하게 드러난 천문도 오히려 모르면서
漠漠地理豈能通(막막지리기능통) 보이지 않는 땅 속 일을 어찌 통달했으랴.
不如歸飮重陽酒(불여귀음중양주) 차라리 집에 돌아가 중양절 술이나 마시고
醉抱瘦妻明月中(취포수처명월중) 달빛 속에서 취하여 여윈 아내나 안아 주시게.
끝으로 김삿갓의 시 한 구절을 더 소개하면서 끝내려고 한다.
"萬事皆有定 (만사개유정) 세상 만사 이미 정해져 있거늘
浮生空自忙(부생공자망)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생 공연히 서두르고만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