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행품, 선용기심 한 권 내드려
“이번에 여기 안 갔지?”
하고 큰스님이 용학스님이 법문하신 녹야원 화엄산림에 갔었느냐고 물으셨다.
“네. 큰스님이 계시면 가는데.”
“아이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직감으로 크게 잘못한 것 같아서 얼른 사과를 드렸다.
“‘내 개인 일이 있어서 못 갔습니다’ 그래야지.”
하고 큰스님께서 정행품의 한 장면처럼 일러 주셨다.
하루 전날 경주 보탑사에 내려와서 묵은 것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반가워하셨다.
문수선원에서 용학스님을 만나서 이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 녹야원 이번 법회에 작년보다 사람들이 두 배로 왔었다고 하셨다.
*
이날 큰스님은 아직 전집이 내려오지 않아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다.
“여기 불광지에 광고 나온 거 봤어?”
하고 화중연화(火中蓮華) 광고 문안을 보여주셨다.
*
경산 묘법사 지묘스님이 뾰족감을 사가지고 오셨다. 부산에서는 동이감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혜명화, 여기 선용기심 한 권 내서 스님 드려. 용학스님이 만든 책 정행품.”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는 사이에 지혜월님이 감을 잘라 오셨다.
“자 한 조각씩 드세요.”
큰스님께서 권하셨다. 감이 달고 맛있어서 다들 즐거워 하셨다.
큰스님께서 자꾸만 감을 더 잘라 오라고 주문하셨다.
조금 크게 잘라 온 감은 더 잘라 사등분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먹고 또 먹지. 여기 또 먹을 사람들 있어. 사등분은 열 번도 먹는데 통째로 주면 한 번도 못 먹어져.”
‘자투리 시간을 아껴야지 공부할 수 있다’고 늘 법문에서 말씀하셨던 생각이 났다. 한참 사경을 강조하실 때도 사경책을 한쪽에 늘 펼쳐놓고 오고 가며 한 글자씩이라도 쓰라고 일러 주셨었다.
그렇게 모으신 시간과 공력으로 이름만 들어봤던 중요한 경전마다 해설을 붙이시고, 그 흩어졌던 책들이 다시 전집으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전집 허락한 것을 좀 후회도 하셨다고 했는데,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계셨다.
발문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쓸 사람이 혜거스님밖에 없어서 혜거스님께 부탁을 했다고 하셨다.
*
이날 오전에 혜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걸 모두 오후에서야 알았다.
*
다음날 큰스님께서 유튜브 화엄법문 중에 ‘서울에 있는 분들은 인사드리러 가보라’고 말씀하셨다.
탄허기념불교박물관에 무비스님의 부촉으로 찾아왔다는 방명록 글씨를 쓰자 금강선원 신도분들께서 합장하며 큰스님 안부를 물으셨다. 23일 봉정법회에 오신다고 하셨다.
용학스님이 봉정식날 오신 이 보살님들에게 말씀하셨다.
“화엄전에 책이 온 날이 다비식 날이었잖아요. 어른스님도 우시고 나도 울었어요.”
금강선원 보살님들이 또 합장을 하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말씀하신 날 저녁에 재무스님의 배려로 화엄전에 갈 수 있었다.
장갑을 끼고, 겨울모자를 쓰고 뜨락의 평상에 오똑하니 앉아 계신 큰스님을 뵙자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절부터 올렸다.
몇 초 후에 들어오신 재무스님이 인사를 하시자 영원의 순간 같았던 큰스님의 침묵이 파해졌다.
다시 평소와 같이 다정하게 인사 건네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실내로 들어와 화중연화 전집을 구경하고 소감을 여쭤보았다.
“나는 오늘 이 책들을 안고 잘 거야.”
이 소감은 인터뷰 때마다 한결같은 대답이셨다.
*
<무비스님 이야기>도 초판 1쇄를 다 소진하여 대선스님이 2쇄를 찍으셨다. 두고두고 기억하려고 전집 봉정식이 있는 11월 23일을 발행일로 적었다.
프로필 사진도 생신날 용학스님이 ‘내가 찍은 사진 중에 마음에 든다’라고 보여주신 사진으로 바꿨다.
이 작은 책에도 용학스님이 만드신 QR코드가 들어가 있다.
대선스님은 ‘이렇게 큰 선지식과 동시대를 살고 있어서 너무나 자부심을 느낀다’고 스님들께 인사를 많이 받으셨다고 했다. 수좌이신 도반스님들께서는 무비스님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들을 모르셔서 이번에 반응이 무척 뜨겁다고 하셨다. ‘정말 칼칼하고 멋진’ 젊은 시절의 사진 두 장을 내었으니, 혹시 3쇄를 찍게 되면 최근의 큰스님 편안하신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보자고도 제안하셨다.
이 책 2쇄 첫 장에 큰스님의 최신 근황을 급하게 덧붙였다. 그러면 개정판이 되는 건지는 정식으로 배운 바도, 경험한 바도 없어서 알 수 없었다.
3쇄가 들어간다면 ‘세네카’라고 하는 책등이 조금 두꺼워져서 표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대선스님께 말씀드렸다. ‘큰스님의 오늘’은 늘 새로우시기 때문이다.
*
-『무비스님 이야기』2쇄를 준비하는 동안 全文-
2024년 11월 23일에,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을 제외한 저서 총25권을 망라하여 『여천무비스님全集』이 발행되어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정식이 있을 예정이다.
이 전집의 주제는 ‘화중연화(火中蓮華)’다.
봉정식에 앞에 2024년 11월 9일 범어사 선문화관 대강당에서 『금정불교대학 無比큰스님 초청 특별법회』가 있었다. 21개월만의 대면법회였다.
1시간 14분의 설법 마지막에 무비스님은 선문화관을 꽉 채운 청중에게 물었다.
“불교는 결국은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어떤 말로 표현한다?”
그리고 답했다.
“불꽃 속에서 연꽃이 피다.”
청중의 박수 소리와 빙그레 웃는 무비스님의 얼굴과 합장으로 이날 법회가 마쳐졌는데, 대기실 앞 의자에 돌아와 숨 고르는 스승 앞에서 모두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무비스님의 오늘은 화엄행자와 함께 날마다 새롭다.
-『무비스님 이야기』 中에서 -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五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三
四 . 普賢菩薩의 二千答
3. 三十門의 十行答
반갑다.
오늘은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55권 제38품 이세간품 중에 세 번째 단락 들어간다.
지난 시간까지 보현보살이 답하시는 와중에 십행품을 답 하고 계신다. 십행 보살의 수행을 답하고 계시는 와중에서 제일 마지막 열 번째 꼭지 진실행(眞實行)을 하고 있다.
진실행 중에 오늘 뒤에 한 서너 꼭지를 끝내면 십회향 문답으로 넘어간다.
아직 진실행(眞實行)의 마지막 세 꼭지 남은 것을 하도록 하겠다.
*
강의에 앞서서 이번 달에 우리가 맞이해야 될 큰 행사 하나 말씀드리겠다.
여기 유인물 두 장이 보일 것이다.
문수강당에서 우리가 모시고 공부하고 있는 어른스님은 평생 경전연구에 진력하셔서 이 시대, 시대를 초월해서라도 가장 존경받으실 대강백 스님이시다.
여천 무비대종사 스님께서 펼쳐놓으신 이 장대한 교학의 바다를 전집으로 묶었다. 그 책을 싸가게 하려고 요번에 도장을 보자기에 새겼고 불광출판사에 드리는 감사패에도 새겼다. 원효스님으로부터 내려 온다고 하는 범어사의 보물 중에 보물 ‘장대교망(張大敎網) 녹인천지어(漉人天之魚)라’ 그것은 60화엄경 중에 미륵보살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도장으로 새겨 놓은 것이다.
장대교망(張大敎網) 녹인천지어(漉人天之魚)라. 대교망을 펼쳐서 인천의, 생사바다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다. 그런 뜻으로 담았다.
뒷 페이지에 보면 어른스님의 일생을 화중연화(火中蓮華)라고 해서 이야기가 좀 자세하게 나온다.
‘사부대중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고’ 또 제대로 걸음도 못 걷고 뒤뚱거리는 우리의 걸음걸이에 힘을 실어주신 ‘모든 불자나 또 비불자들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서로 생명의 인연이 있는 사람들끼리 환희의 마음으로 부처님을 찾아서 정토 연화세계에 다가설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일대쾌거’라고 불광출판사에서 말씀하셨다.
어른스님께서는 그동안에 책을 상당히 많이 출간하셨다.
조계종 출판사라든지, 민족사라든지, 이런 데서 출간하셨는데 불광출판사에서 좀 많이 해서 불광출판사가 주도가 되어서 스님의 전집을 모아서 스물다섯 권으로 구성된 전집이 이번에 나오게 된다.
스승의 그늘은 강동십만리라.
스님의 그늘 아래서 우리가 무슨 불사를 하든지, 포교를 하든지, 수행을 하든지 하면, 어디가든지 간에 어른스님 회상에서 공부했다고 하면 대접을 잘 받는다.
저는 피부로 느낀다. 시자로 있다 보니까 어른스님 덕분에, 어른스님 그늘이 강동십만리라는 것을 늘 느낀다.
이 책은 스님께서 우리가 다 아시다시피 한 20여년 동안 병석에 계시면서도 정말로 용광로 속에서 피워낸 연꽃이다. 어느 정도의 그냥 불길이 아니고 용광로 속에서 피워낸 연꽃이다. 화중연화(火中蓮華)라 해서 책 전체에 깔려있지 않은가.
표지에 새겨진 화중연화라는 그 글씨는 강맥으로 이어오는 경허스님의 글씨다.
여러분께서는 11월 23일 토요일 오후 2시 범어사 보제루에서 열리는 봉정법회에 모두 참석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스님께서 강주하실 때 가르쳤던 첫 제자들의 모임인 ‘명심회’가 있다. 그 제자 스님들이 주축하시고 또 범어사의 방장스님과 주지스님 이하 범어사 주관으로 해서 범어사 보제루에서 성대하게 전집 봉정식을 한다.
전집 봉정식을 하는 날 오셔서 책도 받아가시기 바란다.
아마 트럭을 한 트럭 몰고 오셔야 될 것 같다.
전부 책을 한 짐씩 지고 가시고, 그리고 스님께서 이제까지 책을 내신 화엄경강설도 그날 삼영음반에서 USB 작업을 한다. 전집 스물 다섯 권과 화엄경 81권 강설집을 합하면 백 권이 넘지 않는가? 거기에 매달 받아보는 염화실지 173권이 USB 한 개에 다 담긴다. 공짜다.
오후 두 시 14시다.
USB 앞부분에는 스님 동영상도 하나 살짝 들어 간다.중간에 스님 사진도 한 200장 정도 들어간다. 스님께서 이제까지 필생에 수행해 오셨던 그림자는 USB에 다 실릴 것 같다. 여담이지만 수월관세음보살이나 백의관세음보살은 많다. 또 잘 아시는 어람(魚籃)관세음보살님도 있잖은가. 광주리 람(籃)자, 광주리에 고기를 담고 들고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이 계신다.
제가 조금 전에 가만히 생각하면서 여기 한두 글자를 쓰면서 보니까 USB 작은 칩 하나에 스님의 필생이 다 담긴다. 어람(魚籃)이 아니고 보람 같다.
방금 제가 지어냈다.
보람관세음보살이라고, 보람무비라고 못 들어 보셨을 것이다. 보배 보(寶)자에 광주리 람(籃)자, 이 USB가 보람(寶籃) 광주리가 될 것 같다.
무게로 따지자면 강설 81권 하고, 전집 스물다섯 권 하고, 지게를 하나 가지고 와야 한 짐 가득히 지고 간다.
173권의 염화실지도 있잖은가. 혜명화보살이 얼마나 녹취 잘해주셨는가.
이제까지 스님께서 우리 후학들을 위해서 남겨주신 여러 가지 전철들, 궤철을 이번에 다시 우리가 밟고 수월하게 갈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것 같다.
너무너무 감사드린다.
11월 23일에 꼭 오셔서 그 용광로에서 피어난 연꽃이 다시 녹아서 용광로에서 금그릇이 되어서, 크고 작은 그릇, 접시도 되고 사발도 되고 국그릇도 된 스님의 전집 스물 다섯 개의 금그릇을 받아가시기 바란다.
작은 반야심경부터, 큰 함지박만한 화엄경까지 양껏 금그릇을 받아가셔서 활용해 쓰시기 바란다.
금이 불의 희롱을 당하지 않으면, 용광로의 희롱을 당하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 어떤 병고와 어려움과 남에게 질타를 받는 와중에도 그것을 무아상으로 참고 이겨내어 업장이 즉득소멸 되고, 우리 자신의 불성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불방일하면서 쉬지 않고 정진해야 된다, 이런 사실을 어른스님께서 우리들에게 몸소 가르침으로 보여 주시지 않으셨나 이런 생각이 든다.
11월 23일 오후 2시다.
빠지시는 것은 도저히 안 되고 다 참석하셔야 된다.
거기에 또, 다른 분들에게 차비까지 대서 한 두 분씩 더 모시고 오시기 바란다. 그래서 오시는 분들은 전부 다 전집 한 질씩을 받아가시기 바란다.
*
오늘 수업 들어가기 전에 또 책, 옆에 조그마한 것 한 권 있다. 이것은 제가 어제 1박2일 동안 세종의 녹야원에서 화엄산림을 했다.
여기 공부하러 늘 참석하시는 우리 총무스님 대성암 도감스님의 상좌이신 녹연스님께서 세종 녹야원이라는 데서 아주 아름다운 절을 하나 지었다.
그 절에서 해마다 화엄경 살림을 한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했다. 성대하게 된 것 같다. 어제 BTN도 생중계도 하고, 목어TV도 생중계도 했다. 올해 주제는 정행품이었다.
교재가 된 책표지에 ‘선용기심(善用其心) 이라고 써놨다.
문수보살의 마음을 선용기심(善用其心)이라고 감산 덕청스님이나 청량국사가 말씀을 하시는데, 정행품의 주제가 선용기심(善用其心)이다.
칠불통계의 주제가 중선봉행(衆善奉行)인데 그것이 바로 선용기심이다. 어른스님께서도 선용기심을 항상 주장하셔서, 오늘 여러분께 선용기심(善用其心)이라는 정행품 책을 나눠드린다.
정행품 책을 잠깐 소개시켜 드리면 앞 표지의 QR코드가 있는 것을 찍어보시면 어제까지 제가 강의했던 대목이 그대로 나온다.
뒤에 QR코드는 어른스님께서 이제까지 살아오신 포영, 그림자들이 사진이나 여러 가지 스님의 모습으로 보실 수가 있다. 항상 제 책을 찍는 데마다 이렇게 QR코드를 넣어 놓는다. 참고하시기 바란다.
*
정행품은 화엄경을 통해서 수행하는 기초를 배운다. 화장실 가는 것부터, 양치하는 것, 오르막길 내리막길 내려가는 것, 집에 있을 때나, 출가했을 때나, 이와 같은 내용 들을 문수보살의 141가지 게송을 통해서 아주 치밀하게 잘 정리한다.
이것이 작은 보현행원품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지금도 공히 화엄행자가 매일 수지 독송해야 되는 필독서 중에, 반야심경 같은 필독서가 정행품이다.
이 정행품을 ‘작은 화엄경’이라고도 하고, 조선시대에는 언해본으로 상당히 많이 출간하였다.
제 눈으로도 확인해 본 바가 있다.
정행품이 화엄경 몇 회차 설법인가? 2회차 설법이다.
2회차 설법은 여래명호품 사성제품 광명각품 보살문명품 정행품 현수품 이 여섯 가지다. 이 여섯 품은 십신(十信)에 대해서 설명한다.
여래명호라고 하는 것, 부처님의 명호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이름을 통해서 불보에 대한 확신을 가져라.
사성제는 불법에 대한, 법보에 대한 확신을 가져라.
광명각품의 광명은 수행을 강조한다. 여실지견, 여실수행하는 지견을 통해 부처님의 광명을 받아들여서 내 깨달음으로 승화시켜라.
원효스님께서 화엄경을 해설하는 대목이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는데, 이 광명각품에 시베리아 벌판의 철새 발자국처럼 조금 남아 있다. 해운대 앞바다의 저 많은 모래 중에서 모래 한두 알갱이처럼 그렇게 원효스님의 화엄경을 해석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광명각품이다.
불법승에 대해서 2회차 설법에서 먼저 짚고, 그다음 이 불법승에 대해서는 믿음을 어떻게 잘해나가야 되느냐? 그냥 책만 읽고 많이 보고 듣고만 하면 되겠느냐? 견문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다문은 좋기는 하나 반 조가리밖에 안 돼서 실제적으로 그림의 떡이고, 그림에 북을 그려놓고 북소리 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다.
그림에 종을 커다랗게 그렸다고 아무리 두드려 봤자 종소리는 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보살문명품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여인수타보(如人數他寶)에 자무반전분(自無半錢分)이라 어법(於法)에 불수행(不修行)하면 다문(多聞)도 역여시(亦如是)라’
어떤 사람이 돈을 헤아리는데, 종일토록 돈을 헤아려봤자 자기 돈은 반 푼도 없다.
법에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론만 알고 실참이 없는, 실제 행동에서 보현행원이 없는 사람은 다문(多聞)도 역여시(亦如是)라.
지식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이런 얘기들이 보살문명품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보살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문(問)은 묻는다, 명(明)은 설명한다. 해명한다. 정확하게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실천행을 설명한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정행품이다.
이 정행품에 와서는 어떠한 것이 근본 문수보살의 마음이고, 어떠한 것이 보현보살의 행이냐?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오늘 나눠드린 유인물 1페이지 밑에 보면,
거족하족(擧足下足)이
진문수심(盡文殊心)이요 :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 것. 오고 가는 모든 것이 문수보살의 마음이요. 그래 선용기심(善用其心)을 안에, 원재료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견문각지(見聞覺知)에 : 보고 듣고 안이비설신의로 신구의 삼업을 통해서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개보현행(皆普賢行)이라.
문수심고(文殊心故)로: 문수보살의 마음인 까닭으로
심무탁란(心無濁亂)하고: 마음이 추탁하고 거칠거나 산란스럽지 않고 근본지혜로 돌아가서 후덕지. 그 마음을 아주 교묘하게 잘 씀으로 해서
보현행고(普賢行故)로: 보현행이 있기 때문에 보현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시불왕수(是佛往修)라 : 이것은 부처님께서 과거에 모두 수행하셨던 것이고 그래서 이 보현행이라고 하는 것은
제불보살동소행야(諸佛菩薩同所行也)라 :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걸어가신 바의 길이다.
이것을 일러서 뭐라고 하느냐?
소행(所行)이 즉정(卽淨)이라 : 신구의 삼업으로 행동하는 모든 행위가 청정하다고 한다.
이래서 정행품이다. 이렇게 해놨다.
우리 마음의 땟국물이나 모든 허물을 떠나서 공덕을 이루는 것을 청정, 정(淨)이라고 하고 정행이라 하고, 그리고 자비와 지혜가 둘로, 이렇게 항상 자비롭게 지혜롭게 사는 이 마음을 행(行)이라고 한다.
자비쌍행을 행이라고 한다. 이래서 정행이다.
이렇게 해놨다.
오늘 나눠드린 유인물은 감산 덕청스님이 청량국사의 소를 바탕으로 해서 감산스님께서 화엄경 39품 대의를 써 놓은 것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것을 전체적으로 39품 대의를 제가 정리 다 해놓은 것이 있으니까 따로 나눠드리겠다.
*
정행품은 삶이 쓸쓸하고 외롭고 비 오고 이런 날 찌짐을 구워놓고 한 번씩 보시면 된다.
정행품 들어가기 전에 광명각품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봉행불교(奉行佛敎)는 불교를 봉행 받들어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상섭심(常攝心)이다, 항상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 섭심위계(攝心爲戒)라, 마음을 잘 간추려 포섭해서 수습해야 된다.
이것이 광명각품에 나오고 우리 어른스님께서도 늘 주장하시는 ‘봉행불교(奉行佛敎)는 상섭심(常攝心)이다’ 마음을 잘 써야된다. ‘선용기심(善用其心)’이다.
선용기심하면 ‘약제보살(若諸菩薩)이 선용기심(善用其心)하면 즉획일체승묘(則獲一切勝妙)’ 경계라.
수승하고 묘한 경계다. 수승하다고 하는 것은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아주 훌륭한 것이고, 묘하다고 하는 것은 악구덩이에 빠지더라도, 악하고 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는 물방개처럼 절대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을 정행품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다.
우리는 묶이면 묶인 대로 자유로와야 되고, 자유를 느껴야 되고, 풀리면 풀린 대로 방종하지 않고 또 자유롭게 살아야 된다. 남이 나를 묶든지 풀든지 그건 그 사람 남의 소관이고, 묶이지 않고 풀리지 않는 것은 내 소관이다.
허공을 묶을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다.
이런 내용을 금강경에서 보자면 정신희유(正信希有)라고 한다. 정말로 바른 믿음 ‘본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은 희유하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라고 해놨다.
그러한 것들을 보현행원으로 실천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라고 해서 이세간품이 모든 실천을 잘 정리해 놓은 것 같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길어졌다.
오늘 공부할 대목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사. 菩薩 十種無下劣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發十種無下劣心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作如是念호대 我當降伏一切天魔와 及其眷屬이 是爲第一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我當悉破一切外道와及其邪法이是爲第二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於一切衆生에 善言開喩하야 皆令歡喜가 是爲第三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成滿徧法界一切波羅蜜行이 是爲第四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積集一切福德藏이 是爲第五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無上菩提의 廣大難成을 我當修行하야 悉令圓滿이 是爲第六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當以無上敎化와 無上調伏으로 敎化調伏一切衆生이 是爲第七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一切世界의 種種不同에 我當以無量身으로 成等正覺이 是爲第八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我修菩薩行時에 若有衆生이 來從我乞手足耳鼻와 血肉骨髓와 妻子象馬와 乃至王位라도 如是一切를 悉皆能捨하야 不生一念憂悔之心하고 但爲利益一切衆生호대 不求果報하야 以大悲爲首하며 大慈究竟이 是爲第九無下劣心이요 又作是念호대 三世所有一切諸佛과 一切佛法과 一切衆生과 一切國土와 一切世界와 一切三世와 一切虛空界와 一切法界와 一切語言施設界와 一切寂滅涅槃界의 如是一切種種諸法을 我當以一念相應慧로 悉知悉覺하며 悉見悉證하며 悉修悉斷호대 然於其中에無分別하며 離分別하며 無種種하며 無差別하며 無功德하며 無境界하야 非有非無며 非一非二니라 以不二智로 知一切二하며 以無相智로 知一切相하며 以無分別智로 知一切分別하며 以無異智로 知一切異하며 以無差別智로 知一切差別하며 以無世間智로 知一切世間하며 以無世智로 知一切世하며 以無衆生智로 知一切衆生하며 以無執着智로 知一切執着하며 以無住處智로 知一切住處하며 以無雜染智로 知一切雜染하며 以無盡智로 知一切盡하며 以究竟法界智로 於一切世界에 示現身하며 以離言音智로 示不可說言音하며 以一自性智로 入於無自性하며 以一境界智로 現種種境界하며 知一切法不可說하야 而現大自在言說하며 證一切智地하야 爲敎化調伏一切衆生故로 於一切世間에 示現大神通變化가 是爲第十無下劣心이니라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發十種無下劣心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心하면 則得一切最上無下劣佛法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하열하지 않은 마음을 발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모든 하늘의 마(魔)와 그 권속들을 항복받으리라.’하나니, 이것이 첫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모든 외도와 그 삿된 법을 깨뜨리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둘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좋은 말로 일러 주어 환희케 하리라.’ 라고 하나니, 이것이 셋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온 법계에 가득하게 모든 바라밀다행을 이루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넷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일체 복덕의 창고를 쌓아 모으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다섯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위없는 보리는 넓고 커서 이루기 어렵지마는 내가 마땅히 수행하여 모두 원만케 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여섯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가장 높은 교화와 가장 높은 조복으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일곱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일체 세계가 갖가지로 같지 않지마는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몸으로 등정각을 이루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여덟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보살의 행을 닦을 적에 만일 어떤 중생이 나에게 와서 손과 발과 귀와 코와 피와 살과 뼈와 골수와 처자와 코끼리와 말과 내지 임금의 자리를 달라고 하거든, 이와 같은 것들을 모두 능히 베풀어서 한 생각도 근심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다만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 할 뿐 과보를 구하지 않으며, 크게 어여삐 여김이 우선이 되며, 크게 인자함으로 끝까지 이르리라.’라고 하나니, 이것이 아홉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세 세상에 있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일체 불법과 일체 중생과 일체 국토와 일체 세간과일체 세 세상과 일체 허공계와 일체 법계와 일체 말로 시설하는 경계와 일체 적멸한 열반계의 이와 같은 모든 갖가지 법을 내가 마땅히 한 생각과 서로 응하는 지혜로 다 알고, 다 깨닫고, 다 보고, 다 증득하고, 다 닦고, 다 끊으리라.’하느니라.
그러나 그 가운데는 분별이 없고 분별을 여의어서 가지가지가 없으며, 차별이 없고 공덕이 없고 경계도 없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니라.
둘이 아닌 지혜로 모든 둘을 알며, 모양이 없는 지혜로 모든 모양을 알며, 분별이 없는 지혜로 모든 분별을 알며, 다름이 없는 지혜로 일체 다름을 알며, 차별이 없는 지혜로써 일체 차별을 아느니라.
세간이 없는 지혜로 일체 세간을 알며, 세상이 없는 지혜로 모든 세상을 알며, 중생이 없는 지혜로 모든 중생을 알며, 집착이 없는 지혜로 모든 집착을 알며, 머무르는 곳이 없는 지혜로 일체 머무르는 곳을 아느니라.
물듦이 없는 지혜로 모든 물듦을 알며, 다함이 없는 지혜로써 모든 다함을 알며, 구경의 법계 지혜로 일체 세계에서 몸을 나타내며, 말을 여읜 지혜로 말할 수 없는 말을 보이며, 하나의 자기 성품 지혜로 자기 성품 없는 데 들어가느니라.
한 경계의 지혜로 갖가지 경계를 나타내며, 일체 법이 말할 수 없음을 알지마는 크게 자유자재한 말을 나타내며, 일체 지혜의 자리를 증득하고도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하기 위하여 모든 세간에서 큰 신통과 변화를 나타내 나니, 이것이 열째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니라.
불자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하열하지 않은 마음을 내는 것이니,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마음에 편안히 머물면 곧 하열하지 않은 최상의 불법(佛法)을 얻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무하열심(十種無下劣心)
*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은
발십종무하열심(發十種無下劣心)하나니 :열 가지 못나지 않은 마음, 하열하지 않은 마음이 있으니
하등(何等)이:무엇이
위십(爲十)고: 열이냐.
하열과 하심은 다르다. 하열하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는 마음을 우리 절에서는 아만(我慢) 중에서도 제일 지저분한 아만이라고 한다.
“아유 나는 이거 못해요.”
이런 사람들은 비만(卑慢)이라고 한다.
‘나 못해요’해놓고 뒤에서 딴짓을 한다.
부처님 제자로서 하열심은 절대 가지면 안 된다.
‘나는 부처님하고 동등해서 위로는 부처님 하고도 모자라는 것이 없고, 아래로는 저 밑에 찌끄러기처럼 밑으로 미끄러지지 않는다’ 라는 뜻이 여기에 나온다.
앞부분에는 중생을 초월한다고 무등(無等)이라고 나왔고, 또 여기는 부처님하고 동등한 것을 무열(無劣)이라고 하였다. 부처님하고 동등하다는 내용을 설하면서 열 구절이 일번 이번, 삼번 사번 이런 식으로 두 구절씩 대(對)를 이뤘다.
*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작여시념(作如是念)호대 :이러한 생각을 짓되
아당항복일체천마(我當降伏一切天魔)와 :내가 마땅히 모든 하늘의 마와
급기권속(及其眷屬)이 :그리고 그 권속들을 항복 받나니,
시위제일무하열심(是爲第一無下劣心)이요: 이것이 첫째 못나지 않은 마음이다.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또 생각하되
아당실파일체외도(我當悉破一切外道)와 : 내가 마땅히 모든 외도와
급기사법(及其邪法)이 :그 삿된 법을 깨뜨리리라 하나니
시위제이무하열심(是爲第二無下劣心)이요:이것이 둘째 못나지 않은 마음이다.
첫 번째는 항마제외대(降魔制外對) 이렇게 제목을 한다.
항마(降魔) 마에 대해서, 외도에 대해서 제압하는 것이다.
*
그다음에는 희타자만대(喜他自滿對)라.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또 생각하기를
아당어일체중생(我當於一切衆生)에: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선언개유(善言開喩)하야: 선언, 좋은 말로 개유라. 확 열어주고,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되도록 탁 일러줘서
개령환희(皆令歡喜)가 :어떻게 기쁘게 살아야 되는지 환 희하게 하나니
시위제삼무하열심(是爲第三無下劣心)이요:이것이 셋째 못나지 않는 마음이니라.
못난 마음은 어떤가?
좀 쪼그라든 사람은 남이 가는 것을 뒤에서 잡아당기고 질투나 한다.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 우작시념하되
아당성만변법계일체바라밀행(我當成滿徧法界一切波羅蜜行)이 :내가 마땅히 법계에 가득하게 모든 바라밀행을 이루리라 하나니
시위제사무하열심(是爲第四無下劣心)이요 :이것이 넷째 못나지 않는 마음이니라.
*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 이러한 생각을 짓되
아당적집일체복덕장(我當積集一切福德藏)이:내가 마땅히 온갖 복덕의 광을 쌓아 모으리라 하나니
시위제오무하열심(是爲第五無下劣心)이요 : 이것이 다섯째 못나지 않는 마음이니라.
이렇게 계속 대구(對句)로 연결되어 있다.
그다음에는 ‘복덕의 창고를 잔뜩 쌓아서 뭐 하겠노?’ 이렇게 나온다.
화엄경은 이렇게 한땀 한땀 순리대로 되어 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작게 열리고 익어가고 열매가 떨어지고 떨어지기까지 바깥에도 익고 안에도 익고 씨까지도 익고 씨 속까지도 익고 그렇게 차근차근 영글어 가듯이 화엄경도 전개가 된다.
계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중닭이 되고, 중닭이 어미닭이 되고 이렇게 착착착 가듯이 경전은 치밀하게 그 순서대로 되어 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정행품을 봤는데 정행품 보기 전에 문명품이 나와야 되고, 정행품 후에는 또 현수품이 나와야 된다.
그렇다면 앞에 신심을 돋우는 데 있어서 불법승 여래명호 사성제 광명각품이 나온다.
‘아 불법승 순서로 되어있네?’
십정(十定) 십통(十通) 십인품(十忍品)도 마찬가지다.
*
‘보살문명을 했구나, 묻고 답하고 했구나, 열 보살이 문수보살하고 지수보살 재수보살 목수보살 이렇게 법문을 답하고 난 뒤에 이것을 어떻게 실천을 할 것인가? 정행을 가지고 논했구나’
정행(淨行) 청정한 행이 되고 나면, 현수품으로 넘어간다. 현수품이라고 하는 것은 현이라고 하는 것은 십주(十住) 앞에를 현수라고 하지 않는가. 십신의 완성을 현수(賢首)라고 한다.
현수 법장스님할 때의 어질 현(賢)자 머리 수(首)자다.
어질다고 하는 것, 현(賢)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삼현 앞에 있는 것이다.
삼현은 뭔가? 십주 십향 십회향이다. 이 앞에 현수품이 존재해야 된다.
현수품에서 유명한 게송은 무엇인가?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요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이라’
저는 문수경전 연구회에서 강사라기보다는 중강을 하면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찾아서 여러분한테 일러드릴 뿐이다. 제가 여기서 강의하고 이럴 차원은 아니다.
‘어디에 뭐 있습디다’ 하고 소개시켜 드리고, 공부는 여러분께서 찾아서 하시는 것이다.
현수(賢首)는 십주 앞에 있다. 발심 앞에 십신이 있다.
믿음, 신심이 완전히 성취되어서 무르녹아진 상태를 현수(賢首)라고 한다.
그래서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요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이라. ‘아, 현수라고 하는 것이 삼현 머리맡에 있어서 현수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아시면 되겠다.
특히 이세간품을 잡아서 정리하든지, 십회향품을 잡아서 정리하든지 할 때 현수 법장스님은 60화엄경을 정리하면서 딱 그렇게 정리한다.
현수(賢首)는 십신 자리에 딱 두고서, 십신이라 안 하고, ‘현수, 십주, 십행, 십회향’ 이렇게 삼현 앞에 현수를 둔다. 삼현이 끝나면 그다음에는 십성이 나온다. 십지보살부터는 오온이 개공이 되니까 또 다른 분류다.
‘아 이것은 또 다른 타화자재천으로 밀어버리는구나’
60화엄경에서는 십지품 하고, 뒤에 열 품하고를 합해서 타화자재천에서 열 한 품이 설해진다.
그런데 80화엄경에서는 십지품만 타화자재품으로 빼고 60화엄경에는 없는 십정품을 7회차 설법으로 밑으로 내린다.
60화엄 80화엄 구성이 그렇게 다르다.
80화엄에는 6회차가 한 품이지만, 60화엄에서는 6회차 설법이 열 한 품이다. 십정품은 60화엄에는 없다. 십통, 십인품, 아승지품, 여래수량, 여래출현품까지 열 품과 십지품이 들어있다.
가만히 보면 십지에 증득하는 이론과 부처님의 결과물이 이렇게 십정품부터 나온다.
80화엄에는 그런 것이 더 잘 정리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이세간품에서 공부하면서 보면, 사람이 자비로워지면 청정해지고, 또 사람이 자비로워지면 삼매에 고요해진다. 고요해지면 발보리심이 된다.
그것은 입법계품에 항순중생편에 보면 자세히 나온다.
사람이 자비로워지면 삼매에 들 개연성이 굉장히 많아진다. 탐진치가 많은 사람은 삼매에 못 들어간다.
자비로워지면 탐심도 잦아들고, 화나는 것도 잦아들고, 삿된 소견도 점점 없어지니까 탐진치만의견(貪瞋痴慢疑見) 교만 같은 것이 없어진다.
점점 발심을 하게 되고, 발심이 부풀어 오르면서 나중에
정각심(正覺心)이 된다.
자비심이 충만해야 보리심이 되고 보리심이 충만해야 정각심(正覺心)이 되고 부처님을 이루게 된다.
이런 것이 순서대로 되어있다.
이런 순서, 이런 흐름대로 보면 다 아시겠지만 제가 강의 중에 늘 말씀드리는 것이 ‘주지신(主地神)이 나왔네’ 땅이 딱딱하다. 좀 물렁한 것 ‘주수신(主水神)이 나왔네. 좀 말랑하네’ 주수신이 나오면 그다음에 ‘보이기는 하는데 더 부드럽네’ 주화신((主火神)이 나오고 ‘불이 보이네’ 불은 보이기라도 하지만, 바람은 안 보이니까 ‘주풍신((主風神)이 나오네’ 바람은 느낌이라도 있는데, ‘느낌마저 없네’ 주공신(主空神)이 나온다. 주공신이 나오고 공(空)보다 더 치밀하게 들어가면 ‘주방신(主方神)이 나오네’ 방향을 다 이야기하고, 공간 방향을 이야기했으면 그다음에는 뭐가 나오겠는가?
주야신(主夜神)이 나온다. 그리고 주주신(主晝神)이 나온다. ‘아 시간을 얘기하네, 공간 시간 아, 흐름이 이렇게 돼 있구나’ 이렇게 금방 파악할 수가 있을 것이다.
큰 것부터 작은 것으로 가든지, 작은 것부터 큰 것으로 가든지, 무른 것부터 단단한 것으로 가든지, 단단한 것부터 무른 것으로 가든지, 이런 이치를 화엄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이치는 본래 없는데 인연 따라서 이치나 법칙을 세우고,법칙, 설계에 따라서 사물이 형성된다.
‘아 그래서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인데, 물이 많이 장마철에 쏟아지는 과일은 물컹하구나’
지금처럼 가을에 익는 과일은 ‘대추나 밤은 전부 다 단단하구나. 아, 흐름이 그렇게 되어있네’ 하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고기도 큰놈 작은놈 ‘저 고기는 지느러미가 왜 작지? 멸치는 왜 그런가?’ 그런 것도 짐작할 수가 있다. 멸치에 고래 지느러미 달아놓으면 갈 수가 있겠는가?
메뚜기한테 코끼리 다리를 붙여놓으면 못 가지 않는가.
‘아, 이것을 각득기소(各得其所)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송곳니 있을 자리에는 송곳니가 있고, 앞니 있을 자리에는 앞니가 있다.
제가 전에도 뭐라고 했는가?
붉은 꽃 피는 매화나무는 자르면 가지가 속이 붉고, 흰꽃 피는 매화나무는 자르면 희다라고 말씀드렸다.
쓴맛이 나는 것은 뿌리까지 쓰다.
야보스님도 금강경 게송에 해놨잖은가?
사(事)를 보고 이(理)를 잡아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이(理)를 알아서 사를 아는 사람도 있다.
‘아 저 사람이 말을 빼딱하게 하는 것을 보니까 자랄 때부터 골치 아팠구만’‘말을 잘하고 예절있게 하는 것을 보니 아 부모에게 본새있게 잘 자랐구만’ 이런 것도 금방 알 수가 있다.
신구의를 통해서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 수 있잖은가.
그런 것들이 어쨌든지 여기도 적용이 된다.
본래 마음 분상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없는 것도 없어야 되는데 하나라고 있겠는가.
무무명진(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다.
다만 여기서는 있다는 가정 아래 다 챙기는 것이다.
아까 설명하다가 제가 중간에 잘라 버렸는데 십행품 처음이 뭔가? 환희행(歡喜行) 요익행(饒益行) 인욕바라밀이잖은가, 참는 것, 무위역행(無違逆行) 무진한행(無瞋恨行)이나 똑같다.
네 번째는 부지런하니까 정진 바라밀이니까 무굴요행(無屈撓行) 다섯 번째는 어지럽지 않으니까, 선정이니까 이치란행(離癡亂行) 무치란행이다.
그 다음에 선현행(善現行)이다.
일곱 번째는 무착행(無着行) 여덟 번째는 난득행(難得行)이다. 신기하다.
그다음은 선법행(善法行)이고 마지막에는 진실행(眞實行)이다.
우리가 지금 십행품을 했잖은가.
이 열 가지 행을 잔뜩하다 보면, 이 열 가지 행을 한 결과로써 뭐가 생기겠는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것을 뭐라고 하는가?
십무진장이라고 한다.
믿음의 창고가 생겨지고, 계율의 창고가 생겨지고, 부끄러운 양심의 창고가 생겨지고, 체면의 창고가 생겨지고, 그리고 내가 부끄러워하고 참회하면서 드디어 법문이 들리기 시작하는 문장(聞藏)이 생겨진다.
잘 들은 사람들은 베풀어주는 시장(施藏) 보시의 창고가 생겨지고, 베풀어주는 사람에겐 서서히 지혜의 창고가 생긴다. 지혜로운 사람에겐 기억의 창고가 생겨져서, 지혜로운 사람은 안 까먹는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돌대가리가 되어서 금방 까먹는다.
염장(念藏)이 생겨지고, 나한테 완전히 명심되어 있는 사람은 뼛속까지 스며들어서 지장(智藏) 수지(受持)가 된다.
완전히 핏속까지 자기 체취가 체화되어 박힌다.
지장(智藏)이 된 사람은, 손에서 솜씨가 무르익어버린 주방장이라든지 농사꾼은, 눈을 감고도 한석봉이 엄마가 떡을 썰듯이, 법을 설 할 수 있는 무애변재 할 수 있는 변장이 된다.
옷을 한 30년 50년 만든 사람한테 ‘옷 이것 한 번 만들어봐라. 설명 해봐라’ 이러면 잘한다.
야구선수 한 50년 한 사람한테 이종범이한테 ‘야구 설명 한 번 해봐라’ 하면 기똥차게 한다. 이길지 질지는 모르겠지만.
주방장이 칼 쓰는 것을 이렇게 턱 쳐다보면, 칼 타타타닥 썰면 “여기 와서 요리하는 것 강의 좀 해주세요.” 할 수가 있다.
붓글씨 서툴게 쓰는 사람한테 붓글씨 설명 좀 해달라면 안 되잖는가.
붓글씨 잘 쓰면 “여기 와서 우리 좀 해주세요.”
염불소리 한번 딱 들어 보면 “염불 좀 해주세요.”
그런 것에 여지가 없다.
그것이 이를 살피고 사를 살피고 이수사변(理隨事變)이요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
이(理)는 사(事)를 따라서 늘 변하게 되어 있다. 이(理)가 본래 없기 때문이다.
본래 없는 이(理)를 사(事)가 지 형편만큼 따른다. 사(事)인 난초가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 이(理)를 기운이 좋은 것을 만나면 점점 번성하게 된다.
반면에 옆의 생명력 자체가 희미해지면 사(事)도 쪼그러들어서 엔진이 시들시들해진다.
넘어가자.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 보니까 십행품에서 십무진장 공덕이 십무진장품이 아닌가.
무진장창고가 생겨지면 어떨 것 같은가? 십회향이 된다.
회향을 하다 보면 ‘아 본래 없구나’ 무상을 완전히 느끼면, 완전 회향하다 보면 오온개공을 느끼면서 견도분(見道分)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드디어 자기의 심지자리를 발견하면서 초지, 환희지에 들어간다.
그렇게 순서대로 착착착 되어 있다.
그렇듯이 지금 이세간품이 아주 치밀한 조직으로 되어있다. 모눈종이처럼 되어있다.
‘와 어떻게 이만큼 해놨지?’ 제가 어떤 때는 신비로워서, 아까도 어른스님한테 “스님 옛날에 어떻게, 저기 회주에서 소가 풀을 뜯어 먹었는데 두순스님 게송처럼 익주에서 말이 배가 터져 죽었지요? QR코드는 일본 사람이 만들었는데, 우리가 왜 잘 쓰고있지요? 여기서 QR코드 만들었는데 왜 저쪽이 출판사에서 먹고 살지요?”
이런 식으로 묻게 된다.
어른스님께서 “그것 그 사람들 QR코드 알았겠나?”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여전히 신기하다.
옛분들은 QR코드 만든 사람들은 화엄경도 모르고 만들어 놨다. 제가 볼 때는 화엄경을 한 번도 안 읽었다.
여기 불보살도 화엄경 한 번도 안 읽고 화엄경을 강설하신 것 같다. 우리는 화엄경 읽고도 화엄경 강의가 잘 안된다.
우리는 구구단을 모르니 덮어놓고 외우잖는가.
그분들은 구구단 글자 한 글자도 없는데 구구단을 쪼르륵 다 외운다. 하하하.
부처님께서는 화엄경 한 번도 보도 듣도 안 했는데 화엄경을 설할 수가 있다.
왜 그런가?
유명한 의사는 자기 몸이 완전히 의사가 돼버리면 온몸이 약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생전 처음 본 환자도 무조건 낫게 되어 있다. 그런데 돌팔이는 맨날 보는 환자도 의료사고를 낸다.
원효스님께서 일찍이 그랬다.
“네가 기신론을 본다면 옷깃을 잘라다가 소매에 붙일 것이다. 천 번 만 번 봐 봐라. 네 솜씨 가지고는 안된다. 니는 마음이 아상이 많고 악독하기 때문이다.”
6조스님이 그랬다.
“아만이 많은 사람은 무경야라. 마음에 경전이 없다. 무아로 갔을 때 경전이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와 있다.”
은산철벽처럼 꽉 막히게 틀어막아 놓고는 ‘햇빛이 와 안 비치노?’ 한다.
순서는 그렇게 되어 있다. 십지의 이론이 다 갖추어지고, 십정 십통 십인품 여래명호부터 여래출현까지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다.
*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 우작시념하되
무상보리(無上菩提)의 : 무상보리의
광대난성(廣大難成)을 : 크고 어렵지만
아당수행(我當修行)하야 :내가 마땅히 수행하여
실령원만(悉令圓滿)이: 내가 원만케 하리라
시위제육무하열심(是爲第六無下劣心)이요 : 이것이 여섯째 못나지 않은 마음이니라.
그 복덕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복을 쌓는 것, 그 복을 쌓아서 무엇을 하는가? 다섯 번째는 복을 쌓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지혜를 이루는 것이다.
복을 쌓는다고 하는 것은 수행을 해서 쌓는 것이고, 그 수행의 결과로써 지혜가 터진다는 것이다.
*
그다음에는 일곱 번째, 중생을 제도하고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우작시념하되
아당이무상교화(我當以無上敎化)와: 내가 마땅히 위없는 교화와
무상조복(無上調伏)으로: 위없는 무상조복으로
교화조복일체중생(敎化調伏一切衆生)이: 일체중생을 교화 조복함이
시위제칠무하열심(是爲第七無下劣心)이요: 이것이 일곱 번째 못나지 않은 마음이니라.
이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하화중생이다. 하화중생 나오면 반드시 뭐가 나오는가? 상구보리가 나와야 한다.
‘아, 이렇게 되는구나 너무 수월하다’
복을 쌓았으니까 지혜가 생기고, 중생제도 했으니까 내가 성불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런 구조는 너무 비싼데 가르쳐 드리는 것이다.
*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 우작시념호대
일체세계(一切世界)의 : 일체세계가
종종부동(種種不同)에 : 갖가지 같지 않음에
아당이무량신(我當以無量身)으로 : 내가 마땅히 무량한 몸으로써
성등정각(成等正覺)이 : 성등정각이라. ‘아, 이게 상구보리구나’
시위제팔무하열심(是爲第八無下劣心)이요: 시위 제팔 무하열심이니라.
*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또한 이런 생각을 짓되
아수보살행시(我修菩薩行時)에 : 내가 보살행을 닦을 때
약유중생(若有衆生)이: 만일 어떤 중생이
내종아걸수족이비(來從我乞手足耳鼻)와 : 나에게로 와서 손발 귀 코
혈육골수(血肉骨髓)와 : 피 살 뼈 골수
처자상마(妻子象馬)와: 처자 코끼리 말
내지왕위(乃至王位)라도: 내지는 임금의 자리를 달라 할지라도, 상마 코끼리 말 이런 것은 우리 장기판과 같다.
전륜성왕의 사군사가 있다.
장기판에 있는 것처럼 상 코끼리 군사, 말 군사, 보병, 전차병이다. 장기 둘 때 차가 있잖은가.
그런 것이 화엄경에 그대로 나오고 열반경에도 나온다.
상마졸 차 전차병.
그래서 제가 장기는 현장법사가 현장에서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여시일체(如是一切)를: 이와 같이 여시일체를
실개능사(悉皆能捨)하야: 모두 다 버리고
불생일념우회지심(不生一念憂悔之心)하고 : 거기에 대해서 일념이라도 ‘아이고 내 괜히 버렸다’ 하는 후회하는 마음이 없고, 없는 줄 아니까
단위이익일체중생(但爲利益一切衆生)호대 :다만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할 뿐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이익,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지, 일체중생이든 누구든 남이 죽든지 살든지 신경을 안 쓴다. 이런 점이 차이점이다.
불구과보(不求果報)하야 : 불구과보하야. 한 푼 내놓고 많이 얻으려는 마음 있잖은가. 그렇지만
이대비위수(以大悲爲首)하며 : 대비로 위수라. 대비로 위수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가라앉거나 들뜨거나 하지 않고 삼매심으로 갈 수 있는 자리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의 가피를 받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리다.
‘어여삐 머리’가 되어서, 입법계품 근본법회에 이 대목이 자세하게 그대로 똑같이 나온다.
입법계품 근본법회에 부처님이 사자빈신삼매에 드시지 않는가. 대비로 위치하고 딱 요렇게 나온다.
대자구경(大慈究竟)이: 크게 자비함으로 끝까지 완벽하게 할 것이라 하니
시위제구무하열심(是爲第九無下劣心)이요: 이것이 아홉 번째 무하열심이라.
자비가 충분해지니까 그다음에는 뭐가 따라오겠는가?
지혜가 따라와야 한다.
아까 자비쌍행이라고 정행품에서 배웠잖은가.
정행품을 읽었는데 이세간품이 툭 하고 나온다.
정행품을 제대로 안 읽어 놓으면 이세간품도 잘 모른다.
옷 단추를 처음부터 삐딱하게 끼어놓으니까 끝까지 가도 삐딱한 것이다.
*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우작시념호대
삼세소유일체제불(三世所有一切諸佛)과:삼세에 있는 모든 부처님과
일체불법(一切佛法)과: 일체 불법과
일체중생(一切衆生)과:일체 중생과
일체국토(一切國土)와:일체 국토와
일체세계(一切世界)와:일체 세계와
일체삼세(一切三世)와: 일체 삼세와
일체허공계(一切虛空界)와: 일체의 허공계와
일체법계(一切法界)와:일체의 법계와
일체어언시설계(一切語言施設界)와: 일체 어언 시설계와
일체적멸열반계(一切寂滅涅槃界)의: 일체 적멸 열반계와, 생사든지 열반이든지 상관없다. 전체 다 뭉뚱그려서
여시일체종종제법(如是一切種種諸法)을: 여시 일체 종종 제법, 유위법이 됐든 무위법이 됐든 다 포함한 것이다.
유위법과 무위법 둘을 합치면 무슨 법인가? 일체제법, 일체종종제법이다.
아당이일념상응혜(我當以一念相應慧)로 : 내 현전일념으로 딱 맞아떨어진 지혜로, 딱 맞아떨어진 지혜로 다 알고 다 깨닫고
실지실각(悉知悉覺)하며: 실지 실각
실견실증(悉見悉證)하며: 실견 실증
실수실단(悉修悉斷)호대: 실수 실단하되,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이야기할 때는 뭐라고 하는가? 무불지 무불통지 부처님은 ‘무불지(無不知)나 이사(已捨)다’라고 한다. 무불지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지만 이사라.
안다는 데 떨어지지 않고 다 버려버린다 이랬다.
선어록에는 어떻게 되어있는가?
‘지허노호지(只許老胡知)나 다만 안다고는 하지만, 불허노호회(不許老胡會)로다. 아는 데 떨어지지 않는다’
금강경 종경(宗鏡)스님 해석에 그렇게 나온다. ‘원래불허노호지(元來不許老胡知)라’ 이렇게 나오지 않는가.
연어기중(然於其中)에:그러나 그 가운데는
무분별(無分別)하며:무분별하며
이분별(離分別)하며 : 이분별하며
무분별하고 이분별하고 어느 게 수준이 높은가?
똑같다 하지 말고 한번 따져 보자.
어느 것이 높겠는가?
무분별이 높은가? 그럼 이분별은 왜 나오는가?
우리가 어릴 때 대총상법문들을 보지 않았는가. 거기에 자세하게 규봉종밀 화엄 5조가 정확하게 정리해 놓았다.
쭉쭉쭉쭉 가다가 이상(離相) 상을 떠난다 해 놨잖은가.
사람을 자꾸 멀리 해서 떨어져 있다보면 나중에는 생각이 안난다. 이상 다음에는 무상(無相)이라. 다 똑같은 것이다.
금강경의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과 같다.
이상이나 무상이나 똑같은 것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떠날 이자는 아직도 발에 물이 덜 마른 것이고, 무상은 발에 물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흔적도 없는 것이다.
이상은 아직도 조금 신발 벗은 상태라면 무상쯤 되면 신발도 없고 발도 없고 이런 정도 된 거 같다.
이렇게 천착해 보는 것이다. 이분별 무분별 그다음에
무종종(無種種)하며: 무종종하며 갖가지도 없고
무차별(無差別)하며 :무차별하며, 차별도 없으며. 부처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공덕(無功德)하며: 공덕도 없다.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환과 같은 약으로 환과 같은 병을 치료한다.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중생, 즉비중생(卽非衆生) 시명중생(是名衆生)이요, 반야바라밀,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蜜) 시명반야바라밀(是名般若波羅蜜)이다.
무반야바라밀이다.
그러니까 여래의 종자는 무종자라고 한다. 종자가 없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자성이 본래 없다. 무성이고 무상이다.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여래는 이름이 없다. ‘여래십호 아닌가?’ ‘니나 십호하라’ 여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부르는 게 다 여래다.
여래명호, 사성제 하더니, 사성제품에도 가면 네 개가 사성제가 아니고 이와 같은 사성제가 형편에 따라서 수두루 빽빽하다고 나온다.
무경계(無境界)하야 :경계도 없느니라.
공덕도 없고 경계도 없고 이런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진여 자성에 대해서 경계도 없다는 말을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로 표현한다.
나중에 가면 뭔가?
반야도 없다. 반야바라밀 하면서 무지역무득 반야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고 보살은 반야바라밀이 없는 반야바라밀로, 그러면서 이무소득고로 행심반야바라밀하신다 이렇게 나오잖는가.
처음 출발도 없고 과정도 없고 결과도 없지만 중생을 위해서는 처음 출발과 과정과 결과가 분명하게 있다.
중생을 건져야 되기 때문이다, 라고 해놨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어릴 때는 이런 글을 읽으면 신경질이 났다. 배배 꼬이고 이해가 안 가고 하니까. 지금도 이해 안 가지만.
비유비무(非有非無)며 : 있다 했다가 없다 했다가
비일비이(非一非二)니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했다가, 말을 갖다 빼딱하게 하니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거든
*
이불이지(以不二智)로 : 만약에 둘이 아닌 지혜로써
지일체이(知一切二)하며 :모든 둘을 알고, 일체의 두 개를 안다.
이무상지(以無相智)로 : 모양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상(知一切相)하며 : 일체의 상을 알고
이무분별지(以無分別智)로 : 무분별지로써
지일체분별(知一切分別)하며: 일체의 분별을 알고
여기서부터는 이제 읽다 보면 그 뜻을 알려다 보면 허파가 ‘뒤벼’진다.
이무이지(以無異智)로 : 다름이 없는 없는 지혜로서
지일체이(知一切異)하며 : 일체 다름을 알고
이무차별지(以無差別智)로: 차별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차별(知一切差別)하며:일체 차별을 알고
*
이무세간지(以無世間智)로 : 세간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세간(知一切世間)하며:일체 세간을 알고
이무세지(以無世智)로:세상에 없는 지혜로써 세가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세(知一切世)하며 : 모든 세상을 알고
이무중생지(以無衆生智)로:중생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중생(知一切衆生)하며: 모든 중생을 알고
이무집착지(以無執着智)로: 집착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집착(知一切執着)하며:일체 집착을 알고
이무주처지(以無住處智)로: 머무르는 곳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주처(知一切住處)하며: 모든 머무르는 곳을 알고
*
이무잡염지(以無雜染智)로: 잡염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잡염(知一切雜染)하며: 모든 물듦을 알고
이무진지(以無盡智)로: 다함이 없는 지혜로써
지일체진(知一切盡)하며:일체 다함이 없음을 아느니라.
이구경법계지(以究竟法界智)로: 구경법계지로써 흔히 일체종지라고 한다. 모든 법계가 끝나는 지혜, 육조스님은 딱 잘라서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본래무일물’이라 이렇게 정확하게 말씀해 놓으셨다.
어일체세계(於一切世界)에: 모든 세계에서 그러면서 모든 세계에서
시현신(示現身)하며: 지현신한다. 천백억화신이다.
비로자나 부처님 입장에서는 한 몸도 없고 ‘청정법신 비로자나 천백억화신 석가모니 원만보신 노사나불’ 아 이 마음의 심체 본체에 대해서는 비로자나라고 인격체로 부여했구나. 그러나 이 마음이 가지고 있는 무한 자비와 지혜의 능력을 원만하다, 원만보신 노사나불로 표현하셨구나.
비로자나불이 바로 노사나불이다.
다시 백억화신 비로자나불 정확하게 이렇다.
‘청정법신 석가모니불 원만보신 석가모니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또 바꿔 말하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비로자나불 천백억화신 비로자나불’ 그런데 중생들이 좀 알아듣기 힘드니까 살살살 돌려 놓은 것이다.다만 말씀을 단어의 반복을 피하려고 틀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헷갈려서 설명할 때 가만 들어 보면 ‘ 화신이 있고 보신이 있고 법신이 있다’라고 한다면 꿀밤 한 대다. 그런 게 어디 있는가. 있는 것도 없다고 해야 된다.
단원공제소유(但願空諸所有)언정 절물실제소무(切勿實諸所無)라. 방거사가 있는 것도 없다고 해야 되는데 없는 걸 왜 자꾸 있다고 거짓말 살살 하느냐,라고 하였다.
뱀에다가 자꾸 사족을 붙여서 그리면 좋은 줄 알고 뱀 다리를 자꾸 그린다. 왜 자꾸 이자를 붙이느냐 본전도 없는데. 본전도 없는데 왜 자꾸 이자를 붙이는가.
본래 무일물 아닌가. 본래 무일물이다.
법계가 끝나는 지혜로 모든 법계에서 몸을 다 나타내어서
이이언음지(以離言音智)로 : 말을 여읜 지혜로
시불가설언음(示不可說言音)하며 : 불가설 언음을 보인다.
이런 것도 기신론 진여문에서 이렇게 해 놓았다.
‘이심연상(離心緣相) 이언설상(離言說相) 이명자상(離名字相)’거기에도 이심연상 제일 가는 것부터 이언설상 조금 흔적이 있는 것까지, 그다음 완전히 흔적 있는 것 이명자상으로 이어진다.
명자 다음에는 뭐가 붙어야겠는가? 상. 유상, 모양있는 것까지 다 떠나야 할 것이다, 라고 나온다.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렇게 하게 된다. 그다음에
이일자성지(以一自性智)로: 하나의 자성지로써, 자성의 성품으로써 이 자성은 무자성이다. 일자성의 성품으로써
입어무자성(入於無自性)하며: 무자성에 들어가고
*
이일경계지(以一境界智)로: 하나의 경계를 지혜로써
현종종경계(現種種境界)하며: 갖가지의 경계를 나타내고
지일체법불가설(知一切法不可說)하야: 하나의 일체법 불가설하야 모든 법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일체법이 말할 수 없음을 알지만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현대자재언설(而現大自在言說)하며 :크게 자유자재한 말을 나타낸다. 이런 내용이 금강경에는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고 나온다.
무득무설이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설하신 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래께서 소설법야 설하신 바 법이 있느냐?”
“불야니이다.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 법이 연등불전에 있느냐?”
“유소득법부아. 얻은 바 법이 없습니다.”
“설하신 법이 있느냐?”
“없습니다.”
금강경을 읽을 때마다 그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생각을 안 하고 막 건성으로 읽어버린다.
증일체지지(證一切智地)하야 : 온갖 지혜의 자리를 증득하고도 온갖 일체지 근본지를 딱 증득했으면 끝나 버려야 되는데 그러나 중생이 남아 있으니까
위교화조복일체중생고(爲敎化調伏一切衆生故)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조복시키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도 깨닫고 나서 조용히 사라지시려고 했지만 “중생이 남아 있잖아요. 당신이 말씀하실 필요 없는 줄 알지만 좀 해주세요.”그래서 설법을 하셨다.
어일체세간(於一切世間)에: 모든 세간에서
시현대신통변화(示現大神通變化)가: 큰 신통과 변화를 나타내나니
시위제십무하열심(是爲第十無下劣心)이니라: 이것이 열 번째 못나지 않는 무하열심이니라.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발심종무하열심(發十種無下劣心)이니: 발십종무하열심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모든 보살이
안주차심(安住此心)하면: 안주차심하면 마음에 머물면
즉득일체최상무하열불법(則得一切最上無下劣佛法)이니라 :
즉득일체 최상무하열불법이니라.
*
여러분들 오늘 나눠드린 책 <화엄경 정행품 善用其心> 한 번 보겠다. 39페이지를 보시기 바란다.
‘불자(佛子)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선용기심(善用其心)하면 기심즉획일체승묘공덕(則獲一切勝妙功德)하리라’
이렇게 나와 있지 않은가?
지금 제가 읽은 것은 정행품이다.
그러면 이세간품 읽겠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안주차심(安住此心)하면 즉득일체최상무하열불법(則得一切最上無下劣佛法)’
글자 구절이 비슷하지 않은가?
약제보살이 선용기심이라 안주차심이라
즉획이나 즉득이니나. 획득이나 다 같다.
화엄경에 왜 이리 써놨나?
‘아, 전부 보현행원이 이런 패턴으로 다 되어 있구나’
요런 패턴으로 되어 있다.
이 정행품하고 지금 보는 이세간품하고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지만 정행품을 이렇게 야무지게 읽어버리고 나면 이세간품에 올 때 그 흐름이라든지 가늠을 타는 것이 수월하다.
꼬부랑길 몇 번 다닌 사람은 바른길 가는 것은 일 같지도 않다. 눈 감고도 간다.
자전거 선수도 처음에는 자전거를 비틀비틀 거리고 누가 잡아줘야 탔겠지만, 벨로드롬 경기장 몇 바퀴 타면 자전거 선수들은 막 손을 들고 이렇게 탄다. 사이클은 허리 꼬부리고 탄다.
와 저걸 어떻게 타나 싶다.
이세간품하고 정행품은 얼마나 먼 거리가 떨어져 있는가?
그런데 문장구조가 똑같다.
‘아, 이것이 화엄경의 패턴이구나’ 이렇게 보면 된다.
어떤 것이 먼저 됐고 나중 됐고 간에 다 요렇게 되어 있다.
|
첫댓글 🙏🏻🙏🏻🙏🏻
_()()()_
환희로운 법회 모든 것이 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_()()()_
_()()()_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혜명화님, 이번달에는 행사가 많아 힘드셨겠어요. 고맙습니다. _()()()_
스승님께는 살아계실 때 잘 공경할 것! 돌아가시고 나니 후회가 막급입니다. 어제는 혜거스님 3재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봉정법회에 오셨던 금강선원 여래장보살님이 많은 사람중에 저를 찾는 듯 했습니다. 23일에 이어 24일이 3재일이라, 우리는 두 사람은 서로 보니 눈이 퉁퉁 부어 있더라고요. ' 어제 많이 힘드셨지요. 고맙습니다. ' 감사의 인사를 했고... 또 슬픔에 손을 마주하고 화이팅! 외치며 반은 울고 반은 웃었습니다.
발문에 쓰신 탄허스님의 무비스님 향한 '나의 작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또 얼마나 우셨을지, 저도 탄허큰스님 건강하실 때 왜 다같이 가서 인사하자고 못했을까, 이제사 알게된 스님 성품이라면 얼마나 우리를 반기고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셨을까! 그저 계속해서 '탄허기념관 가자'고 건물타령만 했을까, 후회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없다고 다른 절 안간다 소리 마라하신 큰스님 말씀이 너무나 커다란 자비, 사랑으로 느껴졌습니다. 잘 전달할 수 없어서 그것도 안타깝지만요! 우리도 자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