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 동이열전 : 한사군의 설치
원봉(무제) 3년이 되어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 5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 현도를 합쳤는데,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겨졌다.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땅이 너무 넓고 멀다고 해서 다시 영동 7현을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두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한사군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로서 그 위치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정인보 등이 제북설을 주장한 것과 달리, 실증주의자들은 재남설을 주장하였죠.
한사군은 낙랑군을 중심으로 고조선 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중국계 지배계급은 토착민과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차별적인 이중구조였다고 합니다. 또 한사군은 기존 조직을 해체시킴에 있어 읍락단위로 집단적 예속을 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토착세력의 공동체적 유제가 살아남아 훗날 한사군에 대한 반항의 기초가 됩니다.
한사군의 설치는 한 단계 앞선 중국문물의 일반적 침투로 인하여 많은 사회적 변화를 초래합니다. 한인들의 공적인 침탈과 더불어 개인 간 한인들의 수탈적 상거래가 만연하였는데, 염사치 사화 등이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예맥한족들은 이러한 정치적 압박에 대하여 저장과 선진문물 수입이라는 2가지 자구책 속에서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서 지리지 : 한사군 시기 법령 증가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왔는데, 이 관리가 조선 백성들이 문단속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졌다. 지금은 벌금도 많아져서 60여 조목이나 된다.
- 한서 지리지 제 8권-
사료해석 : 초기 고구려는 8조목의 법만 있었고, 풍속이 각박하지 않아 도둑질이 없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사회가 새롭게 개편되는데 그중 하나가 법령 조목의 증가입니다. 법 조목이 증가하였다는 자체가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