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8. 주일예배설교
하박국 3장 16~19절
소망을 다시 배웁니다.
■ ‘꿈은 이루어진다.’ 이 말 참 많이 듣습니다. 많이 말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여러분은 이 말을 들을 때면 어떤 감정이 생기십니까? ‘그래 맞아.’하고 동의의 감정이 생기십니까? 아니면 시큰둥한 감정이 생기십니까? 아니면 별 흥미 없으십니까?
목표 달성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꿈은 이루어진다’는 이 말은 용기를 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잦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코웃음 거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이 말이 일종의 강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니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에 대한 우리 신앙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할까요? 용기를 주는 말이기도 하고, 강요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이해를 가지면 될까요?
기독교 신앙에서의 ‘꿈’ 개념은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결론이 나는 개념입니다. 꿈은 내 의견이나 내 의지가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꾸는 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꿈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말하는 소망은, 하나님과 하나님 뜻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행동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망>에는 기대와 기다림의 의미를 담은 <기도>라는 신앙 행위가 실과 바늘처럼 함께 합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 그리고 오늘 본문이 속한 하박국 전체,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하박국은 이번 하나님의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 왜요?” 사실 하박국은 질문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기도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제사장이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인 하박국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것도 실망감을 서슴지 않고 토로하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번 결정을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잘못을 체벌하기로 결심하신 것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체벌 도구가 바벨론 군대였습니다. 당시 강력한 군대가 바벨론 군대였기 때문에 선택하셨는지는 모르나, 바벨론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거기에 악하고 무자비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신(神)이었습니다.
1장 16~17절입니다.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사실에서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우상 숭배 행위였습니다.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행위는 악하고 무자비한 행위였습니다. 바벨론은 이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 악 중의 악을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민족의 체벌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에 하박국은 하나님께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에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요?” 하나님답지 않은 결정을 하신 것이라며 따졌습니다. “하나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질문을 속사포처럼 내놓은 이후, 하박국은 자신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대답하시는지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2장 1절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하박국의 질문 태도,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는 태도가 좀 건방져 보이죠? <공동번역개정판>으로 읽으면 확실히 동의를 하실 것입니다. “내가 던진 질문에 무슨 말로 대답하실지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 기다려보리라.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기다려보리라.” 그렇죠?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과하게 읽은 면이 있습니다. 하박국의 질문은 건방진 것이 아니라 심각했습니다. 교만한 것이 아니라 진지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심각하고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건방진 태도로 읽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각하고 진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우리가 예측하는 것과는 달리,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은 모험의 여정입니다. 예측 불허의 삶입니다. 도대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긴장해야 하는 예상 밖의 삶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특별 대우를 받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만사형동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예측 불허의 삶, 긴장된 삶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하박국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요?” “하나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박국과 같은 태도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내가 던진 질문에 무슨 말로 대답하실지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 기다려보리라.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기다려보리라.”
그러자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챙기겠느냐, 악인을 챙기겠느냐?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2장 3~4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무슨 뜻인가요? 바벨론을 이스라엘을 위한 체벌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바벨론의 악을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하박국이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뒤 드린 기도에서 더욱 알 수 있습니다. 3장 13~15절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보셨다시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의로운 삶이지 악한 삶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악인이지 의인이 아닙니다. 13절을 다시 읽어보죠.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악인이지 의인이 아니라는 것을 하박국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3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결국 의인을 챙기시지 악인을 챙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놀라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우리 시대에 이루시옵소서!”
참으로 하박국의 질문은 더 이상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간절한 기다림을 시작했습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이는 실망을 담은 질문을 하는 대신, 두려운 기대감을 고백한 것입니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두려운 기대감을 고백한 뒤 멋진 신앙고백을 잇습니다. 17~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기대한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해도, 그래서 아무것이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만 계시면 완전 만족이라며 고백하는 하박국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그리고 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아주 신나는 확신을 합니다. 19절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의 확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는 확신입니다. 우주의 어떤 힘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시자, 모든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하박국의 힘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박국의 힘과 여러분의 힘이 동일하길 소망합니다. “주 여호와는 조상제의 힘이시다.” 아멘!
또 하나는,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다.”는 확신입니다. 내게 사슴처럼 날랜 다리를 주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달을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확신은 나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고, 나를 구원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고백하는 확신입니다. 이러한 하박국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길 소망합니다. “남경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남경희를 남경희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다.” 아멘!
■ 참으로 하박국이 내내 보여준 확신은 소망이었습니다. 기다림과 기대감을 가득 담은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고, 기도하며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박국이 보여준 소망과 소망의 태도는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지상이 아닌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천국과 천국의 날을 소망하며 오늘을 사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나의 힘이심을 확신하는 중에 그날을 위해 기도하고, 그날을 향해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예측하는 것과는 다른 삶이 펼쳐질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특별 대우가 없을지라도, 만사형통이 아닌 긴장된 삶의 연속일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여러분의 일상이길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비전교회가 이러한 믿음과 소망을 격려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