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死後)에 더욱 빛난 우정
임병식rbs1144@daum.net
인간관계에서 우정은 살아 있을 때 빛난다. 전해지는 빛나는 우정은 거의 예외 없이 살았을 때 생겨난 일이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 어찌 후대에 전해지겠는가. 그런데 그런 일이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새롭게 부각 되어 조명을 받는 일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와 국문학자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1922-1982)선생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두 사람 간에는 우정도 우정이지만 한사람은 시를 써서 문집을 만들어 줄만큼 우정이 돈독하고, 또 한사람은 그의 시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서 보관을 해주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딱지는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던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인가. 일제는 특정한 조선인을 불온한 자라고 낙인찍어 감시했다. 불령선인으로 내몰아 끝내는 고문과 생체실험을 하여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남긴 시를 그의 친구는 무탈하게 보관했다. 그런 과정에서 얼마나 가슴 졸이고 불안했을까.
윤동주가 본격적인 감사대상자가 된 것은 마음에 품은 독립의지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아서 몰랐지만 릿꾜대학(立敎大學) 재학시에 교련수업을 거부한 일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시인은 불시에 검속을 당하여 후꾸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그는 형무소에 갇힌 즉시 갖은 고문과 원인모를 주사를 억지로 맞으며 시달리다가 조국이 해방 되기 전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짧은 나이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누구보다 남다른 감수성을 가졌으며 식민지시대를 살아간 청년으로 고뇌를 안고 독립에 대한 소망을 품었으나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아니, 그는 이미 쓰고 싶은 것은 다 쓰고 갔는지 모른다. 일본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건네준 19편의 시에다 일본에서 몇편을 더 써서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관한 친구 정병욱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일본에 끌려가기 전, 전남 광양에 사는 어머니에게 유고집을 잘 보존해 줄것을 부탁했다.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주세요.”
이런 아들의 부탁을 받고 모친은 시 묶음을 명주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항아리에 담아 마룻장 밑에 감추어 두었다. 이것을 나중 아들이 학병에서 살아 돌아오자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나중에 친구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참고로 정병욱은 나중 서울대학교 교수와 박물관장, 국문학자로 활동했다. 학문적으로 고전시가의 초석을 놓았으며 판소리 연구와 진흥에 힘써 판소리학회를 창립하는 등 활동으로 1991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인접 고을에 선생과 윤동주를 함께 기리는 문학관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가보지 못하다가 최근에 함께 글을 쓰는 지인들과 들르게 되었다. 위치한 곳은 광양제철소가 가까운 망덕포구에 있었다. 그곳에서 기념관을 먼저 만난 건 아니었다. 집 뒤 절벽에 시 한 줄을 적어놓아서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시는 윤동주의 대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였다. ‘하늘을 우러러 한전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시구가 대형글씨로 적혀있었다.
기념관은 의외로 소박했다. 단지 ‘보관장소’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인지 마룻장을 들어내고 항아리에 담았던 형상을 노출시켜놓고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두사람은 동연배인 줄 알았는데 나이 차이가 있었다. 윤동주가 2년 선배로 함께 하숙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시인이 다섯 살이 위였다. 그것은 만주 용정에서 살다가 먼 길을 유학 온 바람에 그런 차이가 난 것 같다.
윤동주는 졸업 즈음에 손주 작성한 자선시집을 친구 정병욱에게 증정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친구의 작별한 관심으로 보관이 되어 서 마침내 1948년 유고시집을 낼 때는 모두 31편을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펴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두 사람은 마음을 주고 받는 글벗으로서 친구 정병욱은 ‘또 다른 고향’, ‘별을 헤는 밤’,‘서시’들을 조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곳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느낌이 많았다. 그것을 보관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는가. 지금 우리는 주옥같은 명시를 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우정이전에 사명감과 역사의식이 깊이 느껴지기도 했다.
친구는 윤동주가 주고 간 작품묶음을 처음에는 절실히 보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도 나중에 학병에 끌려간 마당에 친구의 안위도 어떻게 될지를 몰라 특별히 보관을 당부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얼마나 잘한 것인가. 그것이 압수 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서 우리는 식민지 시대의 고뇌의 삶을 살다간 감수성 넘치는 빛나는 시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찾는 날은 가끔씩 눈발까지 날리는 싸늘한 날씨였으나 돌아서는 발길이 마냥 훈훈했다. 그곳은 바로 우정이 빛나는 현장이었다. 나는 잠시 그 생각을 했다. 이미 두 사람은 고인이 되었는데, 서로가 서로를 추켜세워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했다. 분명 천상에서 두 사람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흐뭇해 할 것 같았다.(2024)
첫댓글 광양 망덕포구에 들어서자, 윤동주 대표작 詩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정병욱 가옥 山壁에 쓰여 있어 무엇인가? 했더니, 윤동주님의 귀한 詩가 日帝 殘酷한 시기에 정병욱님 마룻장밑 상자 속에 숨겨 세상에 빛이 나게 되었습니다. 윤동주님의 대표작 19편이 강처중 작품과 함께 유고31편을 묶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간행하여 우리가 보게 된 것입니다. 윤동주 詩를 보관한 정병욱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광양시가 제정한 것은 잘 한 일이라 생각이 됩니다. 윤동주(1917-1845), 정병욱(1922-1982) 자랑스러운 님들이, 저항기의 등불이 된 민족문학을 지켜낸것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死後에 더욱 빛난 友情' 잘 읽었습니다.^^♡
광양만덕포구 정병욱가의 윤동주 시집을 보관한 장소 확인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온전히 보관되지 않았다면 국민들의 애송시가 되어 있는 명시들이 묻히고
말았겠지요.
학창시절의 우정이 그 장소를 확인하면서 사후에도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로 대단한 일을 하신 정병욱 님입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윤동주가 시인이라는 사실조차도 영영 묻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영화화한 '말모이'가 떠오르는 일화입니다.
이번에 들린 정병욱선생의 생가방문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룻장밑에 독에가 넣어 감추었다는데 그것을 재현애 놓았더군요.
한참을 바라 보았습니다.
실로 장한 일을 한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