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자랐고 대학서부터는 군생활을 하던 기간을제외하고 잠시 제일 모직을 몇년동안 근무하는 일외에는 서울 포일리 안산등 수도권에 살았다.
대구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여러 이유로 사년남짓 냉담기간을 거쳐 서울역근처직장을 다닐때 포일리공소에서 견진교리를 준비할즈음 냉담을 풀었다.
수도원과 젊은이의 천주교친목모임에 함께하였고 그곳에서 청년성서모이을 아주 열성적으로 하였고 여러 신부님과 수녀니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지나고보면 신앙성장에는 큰도움을 주지는 못하였으니
제가 신앙의 전환점을 맞이한것은 금융대란으로 직장을 잃고 세상의 어려움을 겪은 이후였다. 고난을 경험한자만이 이들을 이해할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과 떨어져 포철에서 근무한 일년은 서로를 소중함을 깨닫게된다. 집에 생활비를 한푼이라도 더 보내기위해 서울집으로 가는 횟수를 최대한으로 줄였고생활비를 아끼가위해 곤로를 사다가 속옷을 쌈는것과 라면에 순두부를 넣어 저녁으로 떼우기도 하였고 가급적이면 공장식당을 이용했다.
아내가 옷장사를 시작했지만 겨우 밥먹을정도였고 빚만늘어나서 서울시대를 접고 안산시대를 열었다.
그때만난사람들은 대부분 다단계회사였다. 평촌에서 가게를임대할때 그주인이 개업기념으로 선물을사왔다. 그들은 암웨이라는 국내에서 가장큰다단계회사에서 회 원제 사업가였다. 그리고 몇사람을 비슷한업체의 사람을 만나서 부지런히다녔지만 원래 가진것이 없어서 그것마저 지속할수가 없었다.
아무런방향없이 뛰어든 성령기도회는기댈것없는 나에게 큰힘이 되었다.
사실 지금은 그어려운시기보다 형편이 더 나쁘고건강도 좋지않지만 복음을 맛보고 경험하였기에 희망이라도 남아있기에 굳세게 나아가려는 미련이라도 있음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지그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제말을 듣고 용기를 얻기를 바라는 맘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이글을 씁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