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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조사연구집 [☆대전문학의 始原☆]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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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문학의 始源 ]
대전작가회의 조사연구사업팀 / 도서출판 심지(2013.11.30) / 값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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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글
이번 작업은 대전의 원도심을 중심으로 펼쳐진 현대문학의 현장을 탐방하여 지역문인들의 삶과 문학을 살펴보고 이를 구체적으로 서사화<스토리텔링>하여 대전의 문학지형도를 그리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작업에서 근대 이후의 대전 문인에 주목했습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대전역사驛舍가 건립된 뒤 대전은 근대도시로 급성장합니다. 1931년 대전면에서 대전읍으로 승격되고, 다음 해에 충남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대전은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원동, 인동 그리고 대전역과 도청 사이로 중동, 은행동, 삼성동, 선화동이 발전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대전의 근대 문인들이 터를 잡은 것입니다.
해방 이후 대전에서 처음으로 발간된, 정훈을 비롯한 박용래, 박희선이 중심이 된 종합문예지《향토》(1945)와 시전문지《동백》(1946)이 ‘원동’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정훈의 첫시집『머들령』이 중동 계림사에서 발간되었고, 아랑다방(중앙극장 입구)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대흥동에는 정훈 시인이 오랫동안 머문 ‘혜남건재한약’이 있었고, 은행동에는 김관식 시인이 요절하기 전 머물렀던 ‘생문방한약방’의 터가 남아있습니다. 오류동에는 박용래의 ‘청시사靑枾舍’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대전연정국악원(구 시민회관) 앞에는 한성기 시비가 아담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이처럼 대전 원도심은 대전문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대전문학의 시원이자 고향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작업은 이렇듯 대전의 원도심을 중심으로 펼쳐진 문학의 흔적을 찾아 새롭게 복원하고 서사화하여 대전 근현대문학의 형성과정 등을 살펴보고, 대전시민들이 작가별 탐방 코스를 따라 대전문학의 현장을 찾아봄으로 해서 대전문학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나아가 원도심 활성화에도 기여하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대전지역 문학지형도를 그려보는 우리의 작업은 이번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금년의 여섯 분을 시작으로, 내년엔 신채호 ․ 김관식 ․ 최상규 ․ 권선근 ․ 임강빈 ․ 조선작을, 2015년에는 김대현 ․ 박희선 ․ 홍희표 ․ 최원규 ․ 김수남 ․ 이은봉 등의 삶과 문학의 흔적을 탐사할 계획입니다. 이렇게 작고문인과 현역 문인을 균형 있게 안배하여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속에서 대전문학의 과거와 현재를 망라하여 현장 중심의 대중적인 대전현대문학사를 완성해갈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작업이 가능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격려해준 대전문화재단 박상언 대표이사를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3년 11월 30일
대전작가회의 조사연구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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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조사집 [대전문학의 始源]
[ 목차 ] -
• 여는 글
• 청시사에서 시를 노래하다 - 박용래 시인 / 김현정(문학평론가)
• 어느 그리움에 취한 나비일레뇨, 금당 이재복 / 김영호(문학평론가)
• 머들령에서 시인의 길을 엿보다 - 정훈 시인 / 김현정(문학평론가)
• 둑길에서 시의 길을 묻다 - 한성기 시인 / 김현정(문학평론가)
• 만다라를 찾아가는 외로운 영혼, 김성동 / 김영호(문학평론가)
• 삶의 역정이 새겨진 지문 - 유용주의 삶과 문학 / 김희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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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시사에서 시를 노래하다 - 시인 박용래 ◆
김 현 정(문학평론가)
박용래에 대한 평가
대전 충남문학에서 박용래 시인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것은 해방 이후 그가 정훈, 한성기 시인과 함께 대전, 충남 근대문학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과 이 지역의 정서와 기질을 서정시로 잘 승화한 점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지역 곳곳에 그의 삶과 문학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당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그의 시를 통해 시심을 배우고 있는 점도 그의 이러한 위상을 드러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용래 시의 가장 큰 특징은 근원적인 고독의식이라 할 수 있다.〔동백〕이후에서부터 첫 시집『싸락눈』까지 시인은 주로 고독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이러한 고독의식은 현실에 직면하지 못하고 유년시절로의 회귀의식을 가져다준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을 경험하게 된 시인은 좌절과 절망, 슬픔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홍래 누이가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 것도, 대전문화원에 주최한 <동킹멍>의 순회전시를 보며 느낀 현대문명이 가져온 참혹성과 비극성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상상의 어머니’가 존재하는, 행복했던 유년시절에 머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시「땅」「두멧집」「겨울밤」「울타리 밖」등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많은 애착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박용래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작고 하찮은 대상에 애정을 쏟으며 눈길을 보낸다. 고향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대상들, 즉 원두막, 바자울, 쇠죽가마, 횃대, 멍석, 모깃불, 성황당, 목침, 능금, 이끼, 모과 등을 관조하고 응시하여 시적 소재로 차용한다. 그는 누이를 따라 다니며 보아 온 흔하면서도 소중한 대상들을 바탕으로 우리의 토속적 아름다움을 시로서 형상화한 것이다.「하관」「황산메기」「상치꽃 아욱꽃」「그 봄비」등의 시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박용래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고향의식이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은 전원적 농촌 풍경이나 도시의 변두리 등이다. 과거 고향의 아름다운 모습을, 유년시절의 훼손되지 않은 추억의 모습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는 타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근대적 인간의 인식에서 빗겨선 고향의 모습을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이다.「고향」「누가」「황토길」「모일(Ⅱ)」등에 이러한 고향의식이 잘 투영되어 있다.
박용래 시인은 대전, 충남의 근대문학과 해방 이후의 문학의 단초를 마련하고, 이 지역의 문학을 일군 진정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의 리리시즘의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박용래의 삶과 문학
강경, 문학적 자양분이 되다
박용래 시인이 떠난 지도 33년, 그 사이 그의 시의 배경이 된 것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강경의 옛 모습도, 욕쟁이 할머니도 사라졌고, 많은 문인들이 드나들던, 박용래의 집인 ‘청시사靑枾舍’도 헐려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을 기리기 위해 보문산 사정공원에 세운 시비만이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외롭지 않다. 그의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많고, 대전 보문산 자락에 대한민국의 기인奇人 김관식의 시비와 한 평생 독립을 위해 살다 간 한용운의 시비가 벗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용래 시인은 1925년 1월 14일(음)에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 본정리本町里에서 아버지 박원태朴元泰와 어머니 김정자金正子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호적에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면 관북리 70번지에서 8월 14일 출생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아버지가 출생 신고할 당시 주소와 날짜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소지주이자 유생이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강경으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강경은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의 하나로, 육운과 수운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로이자 내포평야에서 나온 농산물과 새로운 문물의 교역을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전국에 있는 수재들이 모인다는 강경상업학교가 있었다. 당시 한학과 한시에 능통하고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소유했던 아버지는 한적한 부여보다는 신흥도시인 강경에서 자녀들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박용래 시인은 노을이 유난히 진하여 놀뫼[黃山]라 부른 채운산彩雲山을 비롯하여 서편의 옥녀봉, 황산천과 황산교 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곁에는 항상 늦동이인 자신을 끔찍이도 보살펴 준 홍래 누이가 있었다.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시인에게 누나는 더 이상 누가가 아니었다.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누이를 따라 외진 곳을 자주 돌아다녔다. 채운산 너머에 있는 부투골, 낭청이, 까치말 등과 채운들 저편의 용답급, 돌꽃메, 두테골, 거름실 등을 말이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들이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대싸리, 능금, 이끼, 모과, 달개비, 민들레, 엉겅퀴, 괭이풀, 모과다래, 상수리, 수수이삭, 원두막, 바자울, 쇠죽가마, 잉앗대, 햇대, 멍석, 모깃불, 성황당, 옹배기, 목침, 베잠방이, 얼레빗, 실타래, 옥양목, 까마귀, 동박새, 반딧불, 베짱이, 물방개, 소금쟁이, 버들붕어, 메기 등이다. 그는 누이를 따라 다니며 보아 온 흔하면서도 소중한 대상들을 아름답게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강경상업학교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박용래는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학업뿐만 아니라 품행에서도 그러했고, 특히 미슬에서도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홍래 누이의 따뜻하고 섬세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경상업학교 2학년 여름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읍내 황산교 너머로 출가했던 홍래 누이가 산고産苦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죽은 누이를 묻으면서 생긴 시인의 허무감 짙은 면모는 “梧桐꽃 우러르면 함부로 怒한 일 뉘우쳐진다/잊었던 무덤 생각난다/검정 치마, 흰 저고리, 옆가르마, 젊어 죽은 鴻來누이 생각도 난다/梧桐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遠雷”(「담장」)라고 한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충격으로 박용래 시인은 이때부터 세상을 바라볼 때 정면으로, 창문을 활짝 열고 직시하지 못하고 반쯤 닫힌 상태에서 사물을 관찰하게 된다.
그 무렵 나는 늘상 방안 아이였다.(……)그 후 육친인 홍래(鴻來)누님과의 사별은 더더욱 나를 늘상 방안 아이로 만들었지만, 사정이야 어쨌든 지금도 나는 방안 아이, 더없이 어깨가 좁은 늙은 방안 아이. 반의 반쯤만 창문을 열고 본다(박용래,『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 문학 세계사, 1985)
이처럼 시인은 ‘반쯤만 창문을 열고’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개방된 공간 속에서가 아닌 조금은 닫힌 공간 속에서 시인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적 태도는 다음 구절, 즉 “나는 사물을 구태여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언제까지나 조용히 응시할 뿐, 그러나 설핏 비치는 구름 그림자 같은 것을 애써 포착하면 나의 촉수는 움직이기 마련이다. 사물은 대개의 경우 언제나 잡을 수 없는 혼돈”(박용래,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이라고 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물에 대한 관찰력의 토대를 형성하며, 그러한 사물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니까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생긴 시인의 반쯤 닫힌 관찰은 “전교의 수석 졸업생, 학교를 대표하던 정구선수, 구형 한 마디로 전교생을 거느렸던 대대장”이라는 화려한 학생 경력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 문학을 지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도 모른 사이 “삶에 대한 회의, 신불神佛에의 불신임, 그리고 개체적인 고독과 사사로운 우수의 늪”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이문구,「박용래 약전,」『먼 바다』, 창작과 비평사, 1984) 누님이 죽은 뒤 박용래 시인이 무덤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데, 하늘이 너무 파랬다고, 그래서 그때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그의 넷째 딸 진아는 전한다. (이희중,「박용래 시인이 딸과 호박잎이 모이는 빗소리」《시안》1권 2호, 시안사, 1998) 박용래 시인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녀에게 “숨은 꽃으로 살아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단다. 박용래 시인이 화려하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시적인 삶을 살아온 것처럼, 딸에게도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훗날 강경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인 강경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아버지의 소박한 삶과 시를 좋아하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려는 그녀의 작은 꿈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해방, 대전문학이 형성되다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시인은 조선은행 면접을 마친 뒤 서울 본점으로 발령받는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금융이나 재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소각장으로 갈 헌 돈을 고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점점 은행 업무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이후 수표, 전표 어음을 다루는 일을 하게 되지만, 그 회의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서울 생활에 대해 시인은 “서울은 단순하게만 자란, 그래도 조금은 행복한 나에게 처음으로 고독을 알게 했다. 달개비의 보랏빛이 그립고 황토빛이 그리웠다.”(이문구,「박용래 약전」)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 시기 조선은행 대전지점이 개설된다. 그는 그곳으로 발령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의 숨통을 틔워주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은행 일에 대한 회의감이라든지 서울에서의 비정함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그는 남몰래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은행 업무에 대한 회의감을 떨치지 못하고 사직하고 만다. 그러자 곧 징집영장이 나와 그해 7월 보국대 노릇을 하였고. 이후 ‘총알받이’로 전장에 가는 도중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15해방은 그에게 자유의 실체를 맛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가 계룡의숙鷄龍義塾에서 국어와 상업을 담당하는 교편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시기 박용래는 정훈과 박희선 등과 함께 ‘동백시회冬柏詩會’를 결성한 뒤 《동백冬柏》이라는 대전 지역 최초의 순수시지를 발간한다. 여기에서 박용래는 시「새벽」을 발표한다.
새벽 하늘
무한한
초원이다
가는 구름은
안개속에 꿈을 깨인
산양山羊의 군단群團
그들의 길목에는
효성曉星이
단애斷崖위에 백합송이 만양
이슬 품고 진주모색眞珠母色으로
머얼리
밤을 흔들다
-「새벽」전문
박용래 시인이 처음으로 지면에 발표한 작품이다. ‘새벽 하늘’을 무한한 초원으로, ‘구름’을 산양의 무리로 보는 모습에서, 낭떠러지라는 불안함 속에서도 ‘진주모색’으로 빛나는 별빛의 모습에서 평화로움을 엿볼 수 있다. 내용의 완성도라든지 시적 긴장감 면에서 다소 떨어지지만 시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후 8집에도 그는 「달밤에 가랑잎」을 싣는다.(박명용 편,『대전문학사』,한국예총대전광역시지회,2000) 그러나 ≪동백≫이라는 동인지를 구할 수 없어 작품을 확인할 길이 없다. 이문구도 박용래 시인이「5월의 아침」「성자와 제자」등을《동백》지에 발표하여 “감각적이며 참신한 작품으로 동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받았다고 하고 있으나, 이 또한 확인할 방도가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방 이후 대전문학의 지형도를 확인할 자료의 발굴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이후 박용래는 1950년 <동방신문>에 시를 발표한다. 이 신문은 종전 직전 충남의 유일한 일문日文이었던 <중앙일보>의 영업부장인 곽철수가 해방 이후 대전에서 발간한 신문이다. 그러나 이 신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시설 일체가 소실되면서 자연 폐간되었다.(윤덕영,「해방 직후 신문자료 현황」.『역사와 현실』제16권, 한국역사연구회,1995.6)이 신문의 ‘신춘향토시선’에 그의 시「까마귀처럼」이 실린 것이다. 이 시는 지금까지 발굴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언제든
거리에 나스면
발자욱이 있었다
나라루(?)짝을 지어
종종 지줄대며 지나가는 발자욱
방금 육깐을 나와
가슴피고 똑바로 거러오는 발자욱
비스름히 반엔(半円)을 글여
멋지게 굽으러지는 발자욱
신사 숙녀발자욱 고무신 짚신 지가다비
오가는 발자욱들이
장마때의 강줄기처럼
범람하는 것이 였으나
직職을 찾어 굶주린 간肝을 안고
움트는 삼월 풀냄새에 취해
울며 헤매이든 무렵
아무리 굽어 보아도
나의 발자욱은 없었다
패군의 노마老馬처럼
야위여 가는 간肝이
둥둥 풍선처럼 도주하는 것만 같애
아……나는
이뿌지 못한 간肝을 따라
갈래 갈래 까마귀처럼
하늘 날으고 있었는지도
몰라……………………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거리에는 “신사 숙녀발자욱 고무신 짚신 지가다비/오가는 발자욱”들이 많은데 정작 내 발자욱은 없는 것이다. “직職을 찾아 굶주린 간肝을 안고/움트는 삼월 풀냄새에 취해/울며 헤매”여도 내 발자국이 없음을 한탄조로 읊조리고 있다. 당시 시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나름대로 당시 자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을 잘 토로하고 있으나 감정이 덜 절제되고 형상화가 덜 세련되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한국전쟁 직전의 암울하고 답답한 시인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조재훈 시인이 발굴한「슬픈 지형도」「이것은 쓰디 쓴 담뱃재」「검은 밤의 그림자」들은 6․ 25를 전후하여 어떤 문학의 모임에서 낭독용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애상적인 서정이나 섬세한 비유 등으로 보아 그의 작품임에 틀림없다.(《시와 시학》,1991년 봄호) 이처럼 박용래 시인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습작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등단과 청시사, 문학의 집을 마련하다
모든 전쟁은 불행을 수반하게 된다. 박용래 시인도 한국전쟁 중에 부모와 사별하게 되는 아픔을 맛본다. 그는 6․25직후 <동킹멍>의 순회 전시에 대한 기억으로 전쟁의 참상을 드러낸다. “6․ 25직후던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대전거리, 문화원 한적한 화랑에서 나는 우연히 <동킹멍>의 순회 전시를 본 일이 있다. 그는 일그러진 모습의 마천루, 녹슨 해안선, 벽에 갇힌 운명의 허상 등을 대담한 필치로 묘사함으로써 현대 문명이 빚는 참혹성과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 나는 수백만 마리나 되는 뻐꾸기가 한꺼번에 우는 듯한 이 현대의 고전이랄 수도 있는 그림 앞에서 남 몰래 몸서리 친 일이 있다.”(박용래,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라고 말이다.
이 시기 시인은 논산군 부적면에 있는 김학중 씨의 과수원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가정교사를 하면서도 논산에 거주하는 하유상과 끊임없이 교유한다. 1953년 도서출판 창조사創造社에서 편집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이듬해에 대전으로 내려온다. 1950년에 초등학교 채용시험에 합격한 바 있는 박용래는 1955년에는 중학교 국어과 준교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대전철도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이 시기 친구 원영한의 중매로 간호사인 이태준李台俊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훗날 홍희표 시인은 그녀에 대한 시를 짓는다.
딸 네엣에서
큰 딸만 시집 보내고
겨우 겨우 돈
외아들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박용래 백수 가장
벌써 천당에 가서
지금도 술추렴 하고
계실까?
아니 그런 생각할
여유 없지
서른 넘어가는
환쟁이 둘째딸
시집 보내야지
아참, 홍시인!
떡두꺼비 같은 신랑감
어디 어디 없나요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 공부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남동생은……
그러다 그러다
늙으신 간호부
진눈깨비 휘나리는데
백수 가장 뒤따라
북망산천 찾아가네
어하아 어하아
어허이 어히오!
-「이태준 여사」전문
박용래 시인이 작고한 후 10여년이 흘러 이태준 여사마저 세상을 하직하자 시인이 평소 여사가 했던 말을 상기하여 그를 추모하고 있는 시이다. 여하튼 이 여사는 평생 시인으로 사는 남편을 위해, 가족을 위해 간호일을 했던 것이다. 뒤에 그녀의 사인이 ‘과로사’라는 것을 들었을 때 시인은 그녀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한 평생 시인을 대신해 가족을 위해 헌신했을 그녀의 고달팠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태준 여사는 박용래 시인이 소개받은 첫날부터 술을 많이 먹고 토했을 때 간호사의 본능이 작동하였는지 그를 많이 걱정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으며, 시 쓰는 남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1956년은 박용래 시인에게 아주 특별한 해이다. 1955년부터《현대문학》에「가을의 노래」를 시작으로 박두진에게 추천을 받기 시작한 그가 이듬해에「황토길」「땅」으로 3회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인으로 정식 데뷔한 것이다.
나 하나
나 하나 뿐 생각했을 때
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
어슴프레 燈皮처럼 흐리는 黃昏
나 하나
나 하나만도 아니랬을 때
머리위엔
은하
우러러 황시 나는 엎드려 우는건가
언제까지나 作別을 아니 생각할 수는 없고
다시 기다리는 위치에선 오늘이 서려
아득히 어긋남을 이어오는 고요한 사랑
헤알리 수 없는 상처를 지워
찬연히 쏟아지는 빛을 주워 모은다
-「땅」전문
위 시는 땅과 하늘은 서로 맞닿을 수 없는, 서로 “어긋남을 이어오는 고요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것이 만날 때는 “어슴프레 燈皮처럼 흐리는 黃昏”일 때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어둠이 찾아오면 어긋난 사랑으로 전환된다. 땅은 상처난 “쏟아지는 빛”을 치유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을 비유적으로 노래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에 대해 박두진은 “당신의 가늘고 섬세하고 치밀한 감각적 리리시즘은 차라리 천성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가봅니다. 삼엄미三嚴美까지를 느낀다면 이것은 지나친 과장일는지요”라고 추천사를 적고 있다. 시인의 섬세하고 치밀한 감각적 서정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박용래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힌다. “언덕에 누워 흐르는 물을 굽어다 보면 물결 속에는 잔잔히 흔들리우는 작은 꽃들,언제 본 것인지 까마득한 어느날의 무심한 점경點景이 내가 시를 생각할 때마다 늘 떠오르곤 한다. 꽃은 지상에 핀다. 아름다운 지상의 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다. 어찌 하필이면 水沫속에 피고 지는 이 꽃의 마음을 뭣이라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라고 말이다. 지상에 피는 꽃이 아닌 물결 속에 흔들리는 작은 꽃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 시기 박용래는 평생의 지기인 임강빈 시인을 만난다. 동년, 같은 잡지에, 같은 추천인에게 추천을 받은 인연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는 조각을 하듯이 시를 썼다. 낱말 하나하나에 대한 정성은 비길 데가 없었다. 한 자 한 획도 소홀히 다룬 적이 없고, 그는 또 누구보다도 미의식이 강했다. 행간마다 무한한 침묵의 공간미空間美를 깔아놓았고, 따라서 그의 시는 한결같이 응축되어 있고, 대담한 생략법으로 짧은 시형을 택했다.”(이문구,「박용래 약전」)는 임강빈의 평은 박용래 시인의 시세계를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압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57년에 장녀 노아魯雅가, 이듬해에 차녀 연燕이 출생한다. 그러자 박용래는 생계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한밭중학교에서 당진에 소재한 송악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것은 객지생활을 통해 전원생활도 하고, 술도 줄여보자는 요량이었다. “여기는 唐津 松岳面 佳鶴里/ 가차이 牙山灣이 빛나 보인다/발밑에 싸리꽃은 지천으로 지고”(「佳鶴里」)라고 노래한 시에서 당시 가학리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싸리꽃’이 지는 모습을 보며, 시인은 고향을, 대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1961년에는 셋째딸 수명이가 태어나고 같은 해에 제5회 충남문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1965년 봄에 박용래 시인은 처음으로 대전 오류동 17번지의 15호에 대지 55평짜리 초가삼간을 마련한다. 그는 버섯만한 지붕 밑에 ‘청시사靑柿舍’라는 당호를 짓는다. 시인은 이곳에서 시를 쓰며 다섯 아이를 길렀다. 그는 누구보다도 어질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이듬해에 넷째 딸 진아가 태어난다.
1969년에 그의 처녀시집『싸락눈』(삼애사)이 발간된다. 같은 해에「저녁눈」으로 제1회 현대시학상을 수상한다. 장녀 노아는 아버지와 겪은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크게 꾸중을 들은 뒤 닭장(당시 집에서 닭을 키웠다고 함) 속으로 숨게 되었고, 그곳에 깜박 잠이 든 사이 아버지가 막대기로 찌르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가 “노아야, 내가 오늘 상을 탔어. 오늘 내가 특별히 용서해주겠다.”고 했단다. 문학상 받은 것을 이처럼 무척 좋아했다고 노아는 전한다.
그의 대표작이자 보문산에 있는 시비에도 새겨진「저녁눈」을 보기로 한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저녁눈」전문
위 시는 늦은 저녁에 눈이 오는 풍경을 관조하듯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지금은 아파트가 생겨 사라진 대전 오류동의 말집을 배경으로 눈이 ‘붐비는’ 모습을 속도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말집 호롱불”과 “조랑말 발굽” 밑에, 그리고 “변두리 빈터”에 눈이 오르내리는 풍경 등 다양한 모습들이 표출되고 있다. ‘붐비다’라는 종결형 어미가 이 시의 긴장미를 더해주고 있다. 강태근 소설가는「저녁눈」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어느해 겨울 MBC방송국(중구 선화동) 근처 말집 옆에 있는 선술 집에서 박용래 시인과 막걸리를 마시는데 갑자기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박용래 시인이 즉홍적으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인은 그 시를 특유의 제스처와 함께 “강, 한번 들어봐라”라고 하며 낭송을 하게 되는데, 그 시가 바로 시인을 유명하게 만든「저녁눈」이라고 한다. 차녀 박연에 의하면 이「저녁눈」이 발표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거의 매일 50여통의 우편물이 배달되었고, 그 많은 우편물 때문에 우편함에 들어가지 못한 편지가 밑에 떨어지기도 했단다. 그녀는「저녁눈」이 박용래 시인을 무명과 유명으로 가른 작품이라고 말했다. 1971년에는 시인의 아들 노성이 태어난다.
청와집과 두 시집, 그리고 귀천
『싸락눈』이후에 공동시집『청와집靑蛙集』을 펴낸다. 박용래 시인을 비롯하여 한성기, 임강빈, 최원규, 조남익, 홍희표 등 총 6인이 참여한다. 박용래는「고도古都」「공산空山」「고월古月」「하관下官」「낙차落差」등 5편을 수록한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정한모는 “향토적인 사물들을 눈물겹도록 사랑하는 마음이 이들 사물들을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미시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하고, 이러한 관찰은 미세한 구석 구석에 편재偏在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에스프리를 깔끔하게 간추려 놓은 것이 바로 박용래의 시다”라고 언급하여 향토적인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드려내고 있다고 호평한다.
박용래 시인과 이문구 작가 사이는 각별하다. 이문구의 출세작『관촌수필』(「공산토월」)에 박용래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도 하고,『박용래 시전집』에 박용래 약전」을 쓸 정도로도 둘 사이의 친밀함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73년 8월, 이문구는 옥천에 사는 이 모씨가 자신의 고향이 좋다고 하여 유광우와 함께 옥천에 가다가 대전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문구는 목척교 옆의 허름한 탁배기집으로 박용래 시인을 불렀다. 이문구가 이 씨와 유 씨를 박 시인에게 소개하자 박 시인은 옥천같이 빼어난 고장을 다 둘러보게 되었냐고 여간 기특해하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이 씨는 옥천의 산수를 더 자랑했다고 한다. 그때 박 시인이 내가 옥천을 기억하는 것은 시인 정지용이 낳은 땅이기 때문이라고 하자 이 모씨는 물정도 모르고 새퉁스럽게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 옥천인 줄 몰랐다고 대답했다. 이에 박 시인은 “야, 이문구 너 정말 한심하구나. 너는 이런 것밖에 친구가 읎네? 정지용이 제 고향 선배인 줄두 모르는 이런 무녀리두 명색이 시인이라구 하냥 댕기는겨? 이런 것도 사람이라구 마주 앉어 술 마시네?”라고 호
통을 쳤다. 그는 술잔을 벽에 던져 박살내고도 성이 안 풀렸는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한다.(이문구, 「박용래 약전」)이처럼 박용래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이 강한 시인이었다.
1975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장에 피선되어 임기 2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한다. 같은 해에 제2시집이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의 하나로 출간된다. 송재영 평론가가「동화 혹은 자기소멸」이라는 해설을 추가하여 박용래 시의 이해를 도왔다. 해설 중 시「탁배기」에 대한 분석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굴렁쇠 아이들의 달
자치기 아이들의 달
땅뺏기 아이들의 달
공깃돌 아이들의 달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달아, 달아
어느덧
半白이 된 달아
수염이 까슬한 달아
濁盃器 속 달아
덧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리고 또한 잊혀진 어린 시절의 자화상, 시인은 이 버릴 수 없는 자기의 분신을 탁배기 속을 기웃거리며 찾아 헤매고 있다. 굴렁쇠, 자치기, 땅뺏기 등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들의 모습이 시인 자신의 모습과 함께 탁배기 속에 겹친다. 그러나 그것은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은 것.(송재영) 말하자면 이 시는 시인의 자화상을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1978년《문학사상》에 수필「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를 연재하게 된다. 이 수필이 발표된 후 시인은 강태근 소설가와 수침교 옆에 앉아 술을 마시며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이 수필에 대한 내용도 뛰어나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아지자 당시《문학사상》주간이었던 이어령 평론가가 이 수필을 더 연장해서 연재하고자 했을 때 박용래 시인이 고사했다고 한다. 1979년에는 제3시집『백발의 꽃대궁』(문학예술사)를 출간한다. 그는「시인은 말한다」에서 “고향은 언제나 白鷺가 외다리로 섰는 위치에 있다. 마음의 고향까지도, 이 먹물처럼 번지는 고향을 향토어린 능선을 달팽이가 등에 짐을 업듯 업고 왔다. 먼 길을 터벅터벅 왔다. 비오는 날은 오히려 날 듯했을까.” 라고 언급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의 고향은 두 곳이다. 조재훈 시인은 이에 대해 “부여가 그의 시의 胎盤이라고 한다면 강경은 그의 육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고향을 노래한 시편들을 보기로 한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겨울밤」전문
시인은 유년시절의 고향을 그리는 꿈을 꾼다. 돌아갈 수 없는 공간으로의 회귀는 꿈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마늘밭과 추녀 밑에 눈이 쌓이는 곳이고, 물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로, 시인의 꿈과 이상이 영근 곳이다. 그래서 시인은 현실 속에서의 고향의 흔적을 찾아내어 그것을 유년시절의 고향의 모습으로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박용래는 일제의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에서 두 가지의 고통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근대화의 논리가 이후 조선인에 의해 계속 개진되고 있는 점, 또 하나는 근대화의 논리, 개발의 논리에 의해 자신의 꿈과 희망을 주던 고향의 모습이 훼손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다음 시는 이러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갯벌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혀
목이 메는 白江下流
노을 밴 黃山메기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黃山메기」전문
위 시는 산업공해에 오염되어 ‘애꾸눈’이 된 ‘黃山메기’, 즉 생태계의 변화에 의해 사라지게 될 고향의 특산물에 대해 안타깝게 목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산업문명에 의해 고향이 황폐화되어 가는 것을 고발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박용래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기억 속에 있는 고향의 유년시절의 풍경을 따뜻한 인간미로 부각시킨다. 유년시절의 고향풍경을 현실 속의 고향 속에 포갠다.
수수밭
수수밭 사이로
기우는
고향
가까운
山자락
보릿재
내는
사람들
歸鄕列車
뒤칸에
매달린
노을
맨드라미 꽃물
-「꽃물」전문
이 시도 고향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이 좋아하는 대상인 ‘수수밭’, ‘보릿재’, ‘노을’, ‘맨드라미 꽃물’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한 폭의 고향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선명하고 완전히 개방된 모습으로 사물을 가까이에서가 아닌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있으며, 앞에서 시인이 세상을 반의 반쯤만 창문을 열고 본다고 했듯 수수밭 사이로 관찰한다. 그리고 여기에 묘사된 고향풍경을 밝고 역동적인 일출에 비유하기보다는 밝기의 기운이 좀 떨어진 늦은 오후의 정적인 노을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의 모습이 상업도시로서의 성황을 이루던 강경의 모습보다는 그 이면에 내재해 있는 쓸쓸하고 허전한 느낌을 주는 고향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느낌을 농도 짙게 채색하기 위해 그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불러 모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이문구,「박용래 약전」) 등을 말이다. 사실 그의 시를 보면, 우리가 유년시절부터 익히 보아왔던, 흔해서 천덕꾸러기로 신세로 전락한, 그러나 결코 밉지 않는 사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사소하고 하찮은 모든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러 그에게 ‘눈물의 시인’이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눈물’은 인간의 ‘눈’을 정화시켜주는 일종의 크리너이다. 이러한 눈물로 시인은 눈을 말갛게 씻어 본래 가졌던 순수한 상태로 회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한 욕망의 실현방법으로 시인은 사소하고 하찮은 사물을 마치 점묘하듯 이미지화 해나갔던 것이다.
시인 박용래는 현실 속에서의 고향과 기억 속에 있는 유년 시절의 고향 사이에서 유토피아적인 고향상을 그리되,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적 정서를 배제한 이미지 중심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1980년 11월 21일 오후 1시에 시인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한다. 진잠에 있는 한성기 시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진아는 전한다. 마치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나듯, 시인은 대전문학의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한, 선의의 경쟁자인 한성기 시인을 만나고 온 것이다. 55세의 그리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충남문인협회장으로 영결한 뒤 대전 산내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안장된다. 그해 12월에《한국문학》제정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84년 10월에 박용래 시전집《먼 바다》(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고, 10월 27일에는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시비가 세워진다. 이듬해에는 그의 수필을 모은 수필집『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문학세계사)이 발간된다.
박용래 시인이 사랑을 쏟았던 둘째 딸 연燕이 술회하는 대목은 시인의 진면목을 요령있게 보여준다. “시에 대한 정열만은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강하셨던 아버지, 어쩌다 동창회에 다녀오신 날에는 밤새워 괴로워하셨지만, 끝내 아버지께서는 몇 구절의 시에 생애를 걸고, 평생 시인이라는 명분 이외에는 그 어느 직함도 가지려 하지 않으셨다/ 돈 세는 일이 역겨워 은행을 그만두시고, 등록금을 독촉하기가 안쓰러워 결국 교직을 떠나셨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어느 곳에나 얽매이기를 싫어하셨던 자유분방함과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여린 심정으로, 어쩌면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시인으로 운명지워져 있었는지도 모른다.”(『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 이처럼 시인은 천부적으로 시인의 운명을 타고난 듯하다. 시인이 ‘운명’이었기에, 모든 것들을 ‘시’로 응축시킬 수 있었고, 그것을 ‘시’로서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시라는 이름에 종속되는 관념들을 그는 어느 것이든 ‘객관적 상관물’로 만들어 내었다. 때문에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으로 흐르지 않고 ‘지금-이곳’이라는 현실에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다. 유년시절 누이와 읽히고 터득한, 모든 사물들이 ‘지상의 꽃’이라면, 그것들이 시어로 둔갑하면 ‘시의 꽃’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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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이번 작업은 대전의 원도심을 중심으로 펼쳐진 현대문학의 현장을 탐방하여 지역문인들의 삶과 문학을 살펴보고 이를 구체적으로 서사화<스토리텔링>하여 대전의 문학지형도를 그리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작업에서 근대 이후의 대전 문인에 주목했습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대전역사驛舍가 건립된 뒤 대전은 근대도시로 급성장합니다. 1931년 대전면에서 대전읍으로 승격되고, 다음 해에 충남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대전은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원동, 인동 그리고 대전역과 도청 사이로 중동, 은행동, 삼성동, 선화동이 발전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대전의 근대 문인들이 터를 잡은 것입니다. - <여는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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