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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6일(주일) 주일설교 출35:20~29 '거룩한 회막을 잘 지으려면' 새찬송가 215장 내 죄 속해 주신 주께
오늘 본문을 통해서 ‘거룩한 회막을 잘 지으려면’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을 통틀어 145번 나오는 이 ‘회막’이라는 말은 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에 주로 나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21절에 나오는 ‘회막’이란 어떤 곳입니까? 회막은 한자로 모일 회에 장막 막 자를 써서 會幕 이라고 쓰는데요, 이는 ‘모이는 장막’, ‘만나는 장막’이라는 뜻입니. 영어로는 ‘the Tent of Meeting’이고 히브리어로는 ‘오헬 모에드’라고 합니다. 현대어 성경에도 ‘만남의 장막’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회막에서는 어떤 만남이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찌라”(출애굽기 29:43/개역한글) 회막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모일지라도 모여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거기 모인 성도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왜 모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의 회막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입니다. 이런 거룩한 회막을 잘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룩한 회막을 잘 지으려면 첫째, 마음에 감동을 받아 기쁨으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20~21절)
출애굽기 35장 4절에서 9절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회막을 짓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4절~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자 20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다가 21절에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곳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막을 짓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마음이 감동되고 자원함으로 예물을 드리는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22절에 보니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라고 말씀합니다. 헌신하는 데는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마음’이라는 표현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21절에 ‘마음이 감동된’이란 표현, 22절에도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라는 표현, 그리고 29절에도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감동되었고, ‘마음’에 원하며, ‘마음’에 자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감동된 자’와 ‘자원하는’자는 같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컫는 것으로 마음의 자원함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의 결과로 나타났음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자원하여 회막 건축을 위한 예물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드릴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이 역사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감동으로 자원함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감사하며 또한 앞으로도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을 믿고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회막에 짓는데 필요한 것과 그 안에 쓸 것과 거룩한 옷을 만들라고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예물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자원함의 중요성에 대한 예화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도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했으나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지동설이라는 천문학의 신기원을 세웠던 코페르니쿠스는 IQ가 105밖에 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천문학의 큰 획을 긋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하고 지능이 특별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원함으로 열심히 하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의 감격 속에서 주의 일을 하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은혜가 없고 자원함도 없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힘만 들고 능률도 없고 열심히 할 수도 없을 뿐더러 결과물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감동으로부터 시작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그래야 열심히 하고 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만이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반대로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아무리 큰 성과를 올린다고 해도 그 일이 당신을 위한 일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하나님께 헌금드릴 때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다"고 칭찬했습니다(고후 8:3).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에도 아까워서 절절매거나 억지로 드려서는 안됩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봉사할 때에도 마지 못해서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전도도 항상 자원하여 부활의 증인된 사명으로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과 섬김이 될 수 있습니다. 자원함에는 ‘즐거움’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29절에 개역한글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예물을 ‘즐거이’ 드렸다고 표현합니다. 29절(개역한글)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재산을 불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그런 즐거움은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드림으로 얻는 즐거움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즐거움은 하늘에 속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마 6:19~20)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헌금을 드리거나 봉사할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위축되거나 우월해 질 때가 누구나 있습니다. 바라기는 주님께 드릴 때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감동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적용)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감동함과 자원함으로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둘째로 거룩한 회막을 잘 지으려면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27,28절) 오늘 본문 27절에서 특이한 점은 모든 족장이 예물을 드리는데, 이들에게는 감동되거나 자원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족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지도자로서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 헌신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먼저 믿은 자로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나 장로, 권사를 예로 들수 있는데요. 우리교회는 실행위원들이 그러한 지도자들입니다. 세상에서도 강력한 지도자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장교들은 절대 하지 않는 말이 있는데, “돌격 앞으로!”라고 명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에 그들은 언제나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 장군 역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포탄이 날아오는 적진 속으로, 말을 타고 앞장서서 돌진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속한 보병들이 우루루 그를 뒤따라 돌격하는 용맹성을 발휘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런 지도자들에게는, 훈장(상처)이 당연히 뒤따릅니다. 총탄에 맞은 어깨, 창에 찔린 장단지, 그가 탄 말도 상처투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상처입니다. 올바른 자녀 교육은 반드시 부모의 삶에서 비롯되어야 하는데요, 자식들은 부모의 일상을 보고 자신이 나아갈 길에 대해 배움을 얻는다고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는 가르침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고 나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내 아이들의 시선이다. 나의 말투, 행동 등 나를 보고 배우고 자라는 내 아이의 시선은 나를 더욱 올바르게 살도록 만들었다. 자녀가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바람일진대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면 먼저 부모가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해야 한다. 자녀의 마음에 새겨진 부모의 뒷모습은 평생 남는다. 또한 성도는 교회 지도자의 장점 뿐 아니라 약점도 그대로 본받게 됩니다. 지도자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인지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연소함을 업신여기게 하지 말고 믿는 자들에 게 본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15절)고 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 신앙의 성장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10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도 도전받는 것이 없고 자기 생각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진보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허물과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약점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 약점을 노출하되 진보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강력했던 이유도, 그가 본을 보이는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면, 40일간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들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며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지도력이었지요. 모세는 백성들에게 “돌격 앞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면하는데 있어서 “나를 따르라!”며 본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을 보여주는 삶이 있고 하나는 본을 받고 사는 삶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을 보이며 살던지 본을 받고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한 일에 본을 보이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며 또 선한 일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님은 본을 보이며 살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본받지 않고 세상을 본받으려는 데 문제입니다. 우리의 본이 되신 예수님은 사랑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사일 뿐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앞에서, 자기보다 무식한 사람 앞에서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마음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먼저 믿은 자로 오늘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같이 헌신의 본을, 믿음의 본을 보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나는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믿음의 본을 보이는 자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믿음의 본을 보이는 부분과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부족한 부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세째로 거룩한 회막을 잘 지으려면, 좋은 중재자가 중요합니다(29절). 오늘 본문 29절말씀을 함께 보시면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손을 빌어’라는 말씀에 우리는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 헌신할 때 내가 스스로 감동하여 자원하여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은 중재자를 통해서 , 오늘날은 목회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감동과 자원함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드릴 때와 회막을 건축하여 드릴 때의 중재자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드릴 때의 지도자는 아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금식하며 40일 동안 보이지 않는 동안에 아론을 중심으로 하여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아론은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왔고,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의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은 제사장 직분을 받았으니 당연히 우상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론은 세상 사람들의 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기쁨을 좋아하며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타협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중심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 받은 회막건축의 명령을 성령의 감동으로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전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전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동됨과 자원함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동받은 지도자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회막을 짓는 재료입니다.
적용) 신앙고백으로 예물을 기쁘게 드릴 수 있도록 나에게 말씀을 들려주는 중재자는 누구입니까? 나는 말씀에 설득되어 즐거워하며 헌신합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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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거룩한 회막은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짓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과 헌신으로 지어집니다. 여기에서 ‘순종’은 나 같은 죄인을 만세전부터 택해주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나타나는 순종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갖고 온 것처럼 우리의 시간과 재물과 건강을 즐거움으로 드리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되어야 하며, 편견과 고정관념과 옳고 그름을 내려놓고 질서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2017년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것처럼 목회자인 저를 통해서 우리 교회에 교회 빚을 갚도록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열두광주리(1억 2천)중 한 광주리(천만원)를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미 준비한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순서대로 말씀을 전하기에 이 말씀을 대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요즘 제가 기도하며 고민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원함과 헌신함으로 이 일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 교회에도 동일하게 행하실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도 이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집으로 돌아가셔서 마음에 감동된 자가 되고, 자원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기)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감동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게 하옵소서. 교회와 가정에서 먼저 믿은 자로서의 본을 보이는 자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회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즐거움으로 헌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