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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용미리 마애불 2구. 사진=문화재청 제공 |
파주용미리마애불입상 2구. 고려 10세기. 전체높이 17.7미터.
왼쪽 원형모자상 불두 높이2.5미터. 오른쪽상 불두높이2.4미터
보물 제93호.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파주 장지산 자락에 두 분의 부처가 우뚝 서 있다. 길가에서 보면 낮은 산 능선 솔밭 위로 솟은 흰색의 두 부처가 시선을 압도한다. 또한 마애불에 올라 부처의 시선을 따라가면, 용미리 들녘과 공동묘지가 가까이 다가온다. 두 부처는 바로 발아래 삶터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용미리에는 조선시대부터 공릉·순릉·명릉 등 왕실 무덤들이 들어섰고, 지금도 서울·경기 지역 사람들의 묘장터로 인기 높은 곳이다.
마애불은 높낮이를 달리하여 남남서의 방향으로 나란히 선 이불(二佛) 구조이다. 몸은 바위면을 그대로 살린 얕은 돋을 새김이고, 상호 부분은 두세 개의 돌을 환조로 조각해서 붙여 올렸다. 그 중 왼편의 원형 모자를 쓴 큰 불상은 17미터가 넘으며 한국의 불상 중 가장 크다. 이 불상은 연꽃 가지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투박하면서도 손의 표현은 손톱 묘사까지 세밀한 편이다. 법의는 양쪽 어깨로 걸친 통견의이다. 팔목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수직으로 떨어지고, 전체 의습은 얕은 양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가슴에는 띠매듭이 보인다. 바위의 모양새에 따라 가슴 부분이 불거져 있고, 거구의 몸 전체를 살려내었기에 두 불상 중에서 형님격이다. 비교적 넓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굵직하고 시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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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편에 있는 사각모자를 쓴 불상. |
왼편에 붙어 있는 불상은 사각모를 쓴 네모꼴의 얼굴이다. 긴 눈매가 수평을 이루며, 두상과 몸의 접합 부분인 입을 가로지는 선 때문에 침울한 인상을 준다. 뭉툭한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한 자세이며, 통견의 법의는 옷매무새가 옆의 불상과 유사하다. 아무튼 커다란 암벽의 갈라진 틈을 절묘하게 활용하여 부처의 형상이 조성되었다. 원형 모자를 쓴 불상의 몸과 오른편에 밀린 불상의 왼팔 표현이 그러하다. 특히 두상의 얼굴 옆 모습을 보면, 눈·코·입의 선에 해학미마저 흐른다. 마치 현대 만화에서 희화화된 캐리커처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잡목이 우거진 언덕을 타고 두 부처님 사이에 서보면, 큰 바위의 특이한 얼굴 형상으로 인해 옴짝 못할 위력이 느껴진다. 머리 부분 크기만 해도 보통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 불상의 거대한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연꽃 가지를 든 부처와 키를 낮춰 합장한 이불 구성도 기존의 신라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초기에 제작된 석조거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다운 도상보다 신비스런 바위가 지닌 정령과 괴체의 힘을 믿은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거불에는 이적(異蹟)을 일으키 설화가 있다.
용미리 마애불에는 고려 선종(재위 1083∼1094)과 원신궁주(元信宮主) 사이에서 태어난 한산후(漢山候)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하고 사라져버렸다. 꿈에서 깬 궁주가 왕에게 알렸고, 왕은 곧 장지산에 사람을 보냈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왕은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 균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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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대 이전의 사진에는 왼쪽 불상의 어깨에 사람키 정도의 불상이 1구 더 놓여 있었다. 이승만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훗날 주민들이 없앴다고 한다. |
불상 옆쪽 벽면에는 200여 자의 명문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은 어렵다. 마애불 아래 오래된 암자는 근년 불타고, 용암사(龍岩寺)라는 새로 지은 절집이 들어서 있다. 한편 이 두 불상의 왼편에 사람만한 석불이 있었다. 1980년대 이전 사진을 보면 삼존불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대통령의 안녕을 기원하며 세웠던 것으로 근자에 주민들이 없애버렸다고 한다.
[미디어붓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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