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이달의 훈화
연중 제29주간 - 연중 제32주간박용욱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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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용욱 미카엘 신부는 사제 서품 후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 조직신학과 기초신학을 공부하였고, 포항 효자성당과 이동성당에서 본당 신부로 신자들과 행복한 날을 보냈다.현재 교구 사목연구소장의 소임을 맡는 한편,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고 있다.
연중 제29주간(10월 22-28일)
묵주기도가 이루는 기적
로사리오 성월은 1571년 레판토 해전의 기적적인 승리를 계기로 제정되었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의 오스만 군대가 침공해 오자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연합 함대로 맞섰지만,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였습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던 그때, 교황 비오 5세 교황은 한마음으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며 위기를 극복하자고 권고했습니다. 결국 오스만 함대의 침공을 막아냈지요. 이후로 묵주기도는 기적적인 도움이 필요한 때 바치는 기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묵주기도는 승리의 영광이 필요할 때만 바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에 올랐던 승객 중에 동생 결혼 때문에 미국으로 향하던 마흔두 살의 본당 신부 토마스 바일스가 있었습니다. 북대서양 찬 바다에서 빙산을 들이받은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기 시작할 때, 바일스 신부는 갑판에서 성무일도를 바치던 중이었습니다. 위험을 감지하고 구명정에 타기에 딱 좋은 자리였지요.
하지만 불과 두 시간 반 만에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 가라앉는 아수라장 속에서, 바일스 신부는 구명정에 탑승하라는 권고를 두 번이나 물리치고 다른 승객들에게 살 기회를 양보합니다. 그는 가난한 승객들이 모여 있던 삼등실로 내려가 구조를 돕다가 마지막 구명정이 떠났을 때, 배 위에 남은 승객들과 운명을 함께 합니다. 실로 영웅적인 활약이었습니다.
백 명 넘는 승객들의 고백성사를 듣고 사죄경을 외며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남겨진 승객들도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최후를 맞았는데, 여기에는 개신교 신자들, 심지어 유대교 신자들까지 동참했다고 합니다. 이 기도의 힘 덕분에, 남겨진 승객들은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킬 수 있었지요.
묵주기도 성월을 보내면서,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뜻을 깊이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형제자매들의 실패와 좌절, 고통도 함께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 품격을 드높이는 방법임을 기억합시다.
연중 제30주간(10월 29일 – 11월 4일)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나아가는 문이라고 믿으며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11월 2일 위령의 날, 또 11월 전체를 위령성월로 지내면서 우리는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신비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죽음을 일컫는 가톨릭 고유의 어휘에서도 드러납니다. 인간의 문화가 다양한 만큼, 죽음을 일컫는 말도 다양합니다. 귀천, 별세, 산화, 서거, 입멸, 타계 같은 말들은 고유한 배경과 뜻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톨릭 신앙인들은 ‘선종(善終)’이라는 말로 죽음을 표현합니다.
선종은 중국에서 활동했던 예수회 선교사 로벨리 신부가 쓴 책에서 비롯된 말인데,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를 줄인 말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하게 살다가 복된 죽음을 맞는 바른 삶의 길이라는 뜻이지요. 선한 삶과 복된 죽음, 이 둘은 떼어낼 수 없는 인생의 두 국면인 까닭에 우리는 죽음을 묵상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 겸손하고 신중한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매일 선종을 위한 기도를 바쳐왔다는 한 신부님의 경험담을 들었는데, 평소 큰 책임을 맡아 부담감과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던 그 신부님은 이 기도를 통해 좀 더 긴 호흡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안달복달하던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령성월을 보내면서 가톨릭 기도서에 실린 ‘선종을 위한 기도’를 한 번쯤은 바쳐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을 생각하면서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좀 더 긴 안목으로 헤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저에게 선종하는 은혜를 주시어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영원한 천상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31주간(11월 5-11일)
마르티노 성인의 착하고 겸손한 마음
우리가 한가위에 송편을 먹고 설날에 떡국을 먹듯, 유럽의 그리스도인들도 절기에 맞춰서 특정한 음식을 먹는 풍습을 지킵니다. 예컨대 11월 11일은 거위 요리를 먹는 날인데, 이것은 투르의 마르티노 성인의 착하고 겸손한 마음을 기억하려는 뜻입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로마 제국의 군인이면서 세례를 준비하던 예비 신자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말을 타고 길을 나서던 마르티노는 아미앵의 성문 앞에서 추위에 떠는 걸인을 보고 가엾게 여긴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자기 망토를 반으로 잘라 나눠 줍니다. 그날 밤 꿈에서 마르티노는 자신이 걸인에게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뵙습니다. 환시 속의 예수님은 천사들에게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 신자인데도 나에게 이 옷을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마르티노는 이 환시를 체험한 다음 신심이 더욱 깊어져서 마침내 세례를 받고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되지요.
그러던 371년, 투르의 주교 자리가 공석이 되자 사람들은 착하고 겸손하며 거룩한 마르티노가 그 직분을 맡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제 서품도 받지 않은 데다가 지극히 겸손한 성품의 마르티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거위를 가둔 헛간에 숨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마르티노 때문에 낙담하던 찰나, 헛간의 거위들이 시끄럽게 우는 바람에 결국 뭇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사제로 서품되고 곧이어 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 마르티노의 축일인 11월 11일에 거위 요리를 먹으면서 착하고 겸손한 삶을 생각하는 풍습을 지킵니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착하다’는 말이 제 뜻을 잃어 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착하다’는 말이 오히려 비난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착하고 겸손한 삶보다 하나도 손해를 안 보겠다는 영악함이 두드러지는 시대에, 우리 레지오 단원들부터 ‘착하고 겸손한 삶’을 높이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중 제32주간(11월 12-18일)
평신도 사도직의 자리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무대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맹활약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긍지를 줍니다. 하지만 대표 선수들이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고 해서 국민들의 건강이 그만큼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수의 좋은 성적과 별개로, 내 건강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따로 있는 법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세상에 교회를 드러내는 얼굴과 같은 역할을 해왔습니다.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 가톨릭하면 생각나는 분들은 거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호감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필두로,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 또 김수환 추기경님 같은 분들이 가톨릭교회 하면 떠오르는 분들이었습니다.
또 과거에는 성직자들이 이른바 ‘배운 사람’으로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성직자들은 신학이나 철학 같은 고유 분야는 물론이고, 교육,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 신부, 멘델의 유전 법칙으로 유명한 그레고어 멘델 신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신부, 바로크 음악의 대가 안토니오 비발디 신부 같은 분들이 그 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더 이상 성직자들의 탁월한 모범이나 능력에만 기댈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합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 교령 1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의 정세는 보다 활발하고 보다 광범한 평신도 활동을 요청한다. 날로 격증하는 인구, 과학과 기술의 발달, 보다 긴밀해지는 인간관계 등은 평신도 사도직의 무대를 무한히 확대하였고 그 활동 분야의 대부분은 평신도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의 건강이 대표선수의 금메달에 달린 것이 아니듯, 교회의 영적인 건강도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분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교회의 얼굴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