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쿠사 6 - 시모다 온천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도미오카성에 도착하다!
2025년 12월 8일 아마쿠사섬 사키츠 崎津(기진) 마을로 가서 17세기에 아마쿠사섬 주민 70~80 %
가 독교도가 되었다는 오에 천주당과 사키츠 성당 﨑津聖堂 을 보려고....... 혼도 버스
터미널에서 45번 버스를 타니 내륙으로 들어가 10시 03분에 시모다 온센 (下田 溫泉) 에 도착합니다.
승객들이 모두 내리니 버스는 45번에서 48번으로 변경되는지라 다시 올라 타고는
산을 내려가는데 오른쪽 태평양 연안에는 기묘하게 생긴 암초들이 많습니다.
바닷가에 암초들이 보이더니 버스는 이윽고 오에 (大江) 천주당을 지나 40분 만에 사키츠 (崎津 기진) 에
도착하는데..... 돠돌아 가는 버스는 불과 6분 후인 10시 55분에 있고 다음 버스는 12시 55분 입니다.
급히 마을로 달려 들어가서는 사키츠 성당 (カトリック 﨑津聖堂) 을 구경하는데..... 1934년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다미 바닥재가 깔려있는 등 고유의 생활 양식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고 하며....... 숨은 기리시탄 ( 隱れ キリシタン) 흔적들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성당을 뒤로 하고 마을 밖으로 나와서는 바로 도착하는 버스를 타니 우리 버스는
또 암초가 늘어선 바닷가를 달려서..... 산을 올라가서는 시모다 온천에 도착합니다.
이제 우리는 시모다 온천에서 레이호쿠 마을 도미오카 성으로 가야 하는지라 주민에게 물으니 버스가
없답니다? 하아.... 이것 참 어떡한다? 그런데 저만치 관광안내 센타가 보이기로 들어갑니다.
지도등 유인물을 받고는 여직원에게서 버스가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후에....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는, 센타 안에 일본에서 많이 보는 부엉이가 보이기로 일본 말로 무어
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후쿠루” 라고 해서 정확한 발음을 위해 몇 번 물으면서 함께 웃습니다.
택시가 오자면 멀리서 와야 되지 싶어 관광안내센터 밖으로 나오니 바로 앞에 발 모양의 조각상이 보이는데,
세상에나! 여긴 바로 족욕탕인 아시유인지라 양말을 벗고 들어가려는데.... 그만 택시가 도착해 버립니다!
우찌 여기에 이런 훌륭한 족욕탕이 있는 것을 몰랐다는 말인지.... 너무나도 아쉽지만 택시에게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으니 포기하고 그냥 올라 타는데 한 30여분을 달려서
도미오카항을 지나 꼬불꼬불 산을 올라가서는 정상 부근에서 멈추니 택시비는 4,700엔이 나옵니다.
육지에서 반도로 들어가면 도미오카(부강) 공원이고 산을 올라가면 정상 부근에 축성된 것이 도미오카
시로아토 (죠세키) 富岡城跡 Tomioka Castle (도미오카성터) 인데..... 새로 단장된 모습 입니다.
여기 성은 산 정상부에 쌓은지라 4방이 모두 탁 트였으니 전망 하는는 끝내 주는데....
성은 우리 생각 보다도 훨씬 크니 적군이 공격하자면 가파른 경사면을
함겹게 올라야 하는지라 기관총이라도 한, 두정 걸어 두면 가히 난공불락 이겠습니다.
아마쿠사섬의 기독교도 주민들은 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천주교 탄압에 신음하다가 마침내
1637년에 바다 건너 시마바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기독교의 섬
이라는 여기 아마쿠사에서도 천주교도들이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켜 혼도성을 점령합니다.
기세가 오른 천주교도 농어민 반란군은 다시 나가사키로 가는 도미오카항 앞산에 자리한 이 도미오카성을
공격하다가 수없이 죽어나갔는데.... 이 성이 함락됐으면 바로 여기서 배를 타고 나가사키를
점령하려 갈 계획이었지만 함락되지 않으니, 오니케항으로 가서 배를 타고 시마바라로 건너가 합류합니다.
과거 히고국의 아마쿠사군이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 지배하에 있었던 지역이니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로
고니시가 처형된 이후 히젠국의 카라츠번 (현 사가현 카라츠시) 이 해당 영지를 받았으니
카라츠 번주 테라자와 히로타카 (寺沢広高) 는 1605년 토미오카성 (富岡城) 을 쌓고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키리시탄 탄압, 폭정, 가혹한 징세 등으로 인해 영지 내 불만이 고조되었고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 일어났을 때 아마쿠사의 영민들도 다수 동참해 난장판이 벌어졌는데..... 반란 진압후 2대 번주인
테라자와 카타타카 (寺沢堅高) 는 난 발발의 책임을 물어 가이에키 (영지 몰수) 되자 충격으로 자결합니다.
예수교 선교사를 추방하고 강제 개종을 요구하며 탄압하자 천주교도 반란이 일어난 것인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에 아시아의 110개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현지인 기독교도들을 앞세운 유럽 군대의 침략으로 망하고
식민지가 됐으니, 만약 일본이 예수교도들을 탄압하지 않았다면 일본도 독립을 잃고 서양 식민지가 되었을까요?
일본은 17세기에 스페인 침략을 방어했더라도 200여년후 1868년 조슈번과 사쓰마번에 히젠번과 도사번
등 존왕양이론자들이 일으킨 반란인 무진전쟁에서 프랑스는 막부에 군함과 무기를 제공했고
영국은 반란군인 신정부군에 신식 소총과 기관포에 대포를 제공했으니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면...... 일본은 분단되고 두 서양 국가의 괴뢰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문을 생각하는 도중에 문득 조광수씨가 국제신문에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이라는 난에
쓴 “ ‘역사. 권력. 인생’ 함수 관계 풀며 과거와 미래 꿰뚫는 통찰력 ”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바람과 구름과 비’ 10권을 정독하고 재독 (再讀) 한 느낌은 먹먹함이었다. 우선, 역사와 권력과 개인
사이의 오묘한 함수관계를 서사로 풀어주는 ‘사기 (史記)’ 의 감동이다. 나림 이병주는
그 무엇으로도 명쾌하게 해소할수 없는 역사-권력- 인생 간 함수관계를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풀어준다.
실록의 박력에다 허구의 경쾌함이 더해져 이야기는 ‘삼국지’ 나 ‘수호지’ 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흥미롭다. 강호의
자유로움과 은원(恩怨) 의 허망함을 속도감 있게 묘사하는 무협지 풍마저 있다. 통속성과 진지함의
조화가 천의무봉이다. 최천중은 고종을 비롯한 지배층을 비판했으며 동학에 희망을 걸고 새 나라 세우기를 꿈꿨다.
다음, 돌아보기와 내다보기가 겸전한 문학적 안목에 경탄 (敬歎) 했다. 그 힘든 시대 그 무거운 이야기를 규방
의 속삭임 부터 시작하여 뜻 높은 지사의 포부와 좌절한 장부의 탄식을 거쳐 조선을 두고 벌이는 열강의
각축 등 국제관계까지 그렇게 종으로 횡으로 잇는 소설로 쓸 수 있다니 그저 고맙게 흔상 (欣賞)할 따름이다.
나림의 유불도 (儒佛道) 섭렵과 동학 이해 또한 아낌없이 드러난 작품이다. 돌아보기와 내다
보기가 균형을 이루려면 과거· 현재· 미래를 통시 (通視) 하는 것에 더해 약자를
따뜻하게 대하는 문명적 시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바람과 구름과 비’ 에는 나림의
묵중한 휴머니즘과 깊은 인문이 진하고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선명하다.
어느 세대나 자신의 시대가 가장 힘들다고 여긴다. 예민하고 통찰력 있는 사람일수록 그 시대 의식은
더욱 철저하다. 2500년 전 공자는 자신의 시대가 하은주 (夏殷周) 삼대 (三代) 이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난세라고 생각했고, 2000년 전 예수는 자신의 시대에 마지막 날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선지(先知) 들은 한편으론 후생가외 (後生可畏· 미래세대가 기성세대 보다 더 뛰어남) 를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시대가 말세라고 탄식했다. 세상은 언제나 난세이며 자신이 사는 시대는 늘 말세다.
1920년대 이 땅에 태어난 세대는 바로 전 세대에 있었던 망국의 전말과 정서를 들어 알았고,
3·1운동의 후과 (後果) 로 주위 어른들이 고초 겪는 모습을 목도했다.
두보가 ‘춘망 (春望)’ 에서 외던 “국파산하재 (國破山河在)” 를 실감하며, 망국의 현장에 있었다.
‘바람과 구름과 비’ 주인공 최천중은 1920년대 생의 할아버지 세대다. 철종 말년 세상에 나와 고종 시대를 살며
500년 된 나라가 저물어가는 현장에 있었다. 소설은 철종 14년 1862년부터 고종 32년 1895년까지를
망라한다. 그 난세 풍운남 (風雲男) 최천중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막힌 곡절을 겪으며 정면으로 맞선다.
산천운명 (山川運命) 이란게 있다. 이를테면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것이다. 어이없음과 부조리함에
황망할 뿐인 상황. 발버둥 치고 아무리 애써도 어쩌지 못하는 무력감 상황. 한마디로 망연자실.
망국도 그런 맥락이다. 망하는 것은 망하게 두어야 한다. 아니 더 빨리 더 확실하게 망하게 부추겨야 한다.
최천중은 조선이 망하고 있고 이미 망했어야 하며 하루빨리 망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지배자
의 무능이다. “생선은 머리 부터 썩는다” 는 말이 있다. 나라나 민족의 쇠망은 지도층의 부패 무능에서
시작한다. 최천중은 고종의 무능과 매관매직, 나라보다 사직 그보다 사욕을 먼저 챙기는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결정적일 때마다 물러서고 도망가며 자기 안전을 최우선시 하는, 한마디로 겁 많은 혼군 (昏君) 이었다. 내부 권력
투쟁에는 능숙하나 국제정세엔 어두우면서도 집요하게 정국을 좌지우지하려는 민비 또한 준엄하게 평가한다.
특히 신령군이란 무당에게 휘둘리는 대목이 아연하다. 나림은 신령군이 큰 스승으로 모시는 황봉련이
민비와 만나....... “신은 믿으시되 낭비하지는 마소서” 라고 충언하는 장면을 공들여 구성한다.
대원군은 카리스마도 있고 결단력도 있어 일부 개혁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나, 수구적이고 폐쇄적
이어서 당대의 카운터파트 청의 이홍장이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대세를
논하기는 어려웠다. 크리티컬 (critical) 한 시기에 척화비 (斥和碑) 를 세우는등 선견지명은 없었다.
둘째 “여기 인물이 있다” 하며 내세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 불만에 가득차 극적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수람할 영웅이 없었다. 그나마 역동적인 세력이 개혁파였으나 넘치거나
처지거나 약관의 서생들이었다. 민심을 모을줄 몰랐고 조급했으며 외세 (친일파)
의존적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실전 조언이다.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돕지 않는다”.
최천중은 미국 푸트 공사를 여러번 만나 세상 견문을 넓힌다. 시 한수로 위안스카이
의 마음을 산 절세 시인 민하와 청관 (淸館) 관리 소민을 통해
청의 사정을 소상히 듣고 있고, 독일 공사에게서는 영세 중립이란 방책도 배운다.
최천중은 개화파 인사들의 뜻과 기상은 가상히 여기지만 미더워 하지 않는다.
갑신정변 전 거사 자금을 요청하는 김옥균에게 출사표를 확인하고
윤치호를 통해 구상도 듣지만 끓기도 전에 넘치는 경박함과 무모함을 크게 우려한다.
개혁은 목숨 걸고 루비콘강을 건너는 모험이고, 건너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끈기
있게 밀고나가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인품으로 품고 세력으로 몰아
가야 한다. 정치는 언제나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지 의도가 중요한 건 아니다.
김옥균파는 세도 약하고 품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세상을 너무 얕잡아 봤다. 삼일천하라고 할 것도
없는 삼일의 돌풍이었다. 김옥균은 왕을 모시고 대궐 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수다를
떨었을 뿐, 어느 누구한테 호령 한번 못 하고 궁서 (窮鼠 궁한 쥐) 의 몰골로 일본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나림의 김옥균 평가는 냉정하다. “모사 (謀事) 의 재(才) 는 있으나 성사 (成事) 의
능(能) 은 없는 인물” 이다. 다만 김옥균이 부관참시 되고 양화진에 효수되자
최천중은 사흘동안 칩거하며 애도하고 유족에게 거금을 보내 조문하는 정은 보인다.
셋째 ‘조국의 부재’ 에서 백성은 자포자기했다. 최천중은 조정을 내부에서 뒤엎는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백성이
봉기할때 호응할 발판을 마련하려 한다. 외우 (畏友) 곽선우가 이렇게 충고한다. “백성이 모두 썩어 있소.
분토 (糞土) 로 담을 쌓을 수는 없소. 썩은 백성이 난동하고, 썩은 백성이 배신하고, 썩은 백성이 구경하고” - 장자
그래도 동학에 희망이 있었다. 최천중은 기본적으로 장자(莊子) 풍이지만 ‘동경대전’
과 ‘용담유사’ 를 통독하고, 책사 박종태를 통해 최시형과 연락하며
전봉준을 돕는다. 수하 연치성은 정예 별기군을 조직해 공주 전투에도 참전한다.
최천중은 왕재 (王才) 왕문을 중심으로 강원수 김웅서 등 개혁 인사를 신분 구별 없이 탁발한 재능만으로
충원하고 동학의 세와 이념을 더해 망조 든 조선을 기꺼이 버리고 새로운 나라 세우기를 꿈꿨다.
꿈은 아무리 크게 꿔도 괜찮다. 하지만 동학운동은 처참하게 좌절한다. 이유는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배자의 이익을 침범하는 사상은 서학 천주교이든 동학 시천주 사상이든 모두 사악하다.
목을 베거나, 난을 일으킨다면 청병 일군 누구든 불러와 섬멸해야 한다. 기득권은 강고했다. 둘째,
남접과 북접의 대립등 수양 위주냐 보국안민을 위해 봉기해야 하느냐를 두고 동학은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전봉준은 일세의 대인물이었으나 전국적 봉기를 추동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주류
유림이 이단시 했다. 김옥균은 위로부터 혁명하려다 민심을 얻지
못해 실패했고, 동학은 아래로 부터 혁명하려다 상층부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다.
슬픈 일이다. 최천중의 큰 꿈은 17인 지사가 모여 나라 안의 나라 신국 (晨國) 을 세우는
것으로 바뀐다. 새벽이란 이름의 망명정부다. ‘망명’, 나림에겐 의미가 각별한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