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南道의 情緖와 서예
남도의 서예는 전국적인 추세와 크게 다를 수 없다. 중국의 서풍이 사신(使臣) 등 왕래자를 통해 수입돼서 유행되는 과정은 예부터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수도로부터 떨어져 있는 지역이자 교통여건도 좋지 않았기에 유행의 바람이 가장 늦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사람들이 서예에 뛰어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는 출사를 위한 노력과 다른 하나는 유배인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대세는 중국의 서풍일 것이다. 이를테면 한나라 유덕승(劉德承), 위의 종요(鍾繇), 원의 조맹부 등의 3체를 완성왕희지(王羲之)와 왕묵지(王黙之)의 서풍도 유행했기 때문이다. 또 송나라 3절(글․그림․해서)인 원장(元章)의 문학과 글 호방한 서풍을 자랑했던 소식(蘇軾) 그리고 선사상(禪思想)을 표현한 장즉지(張卽之), 명나라의 연면체(連綿体), 원나라 조자앙(趙子昻)의 왕희지 고필법도 직․간접으로 유행했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남도 출신 가운데 나라를 대표할 만한 서예의 거장은 나오지 않았다. 2000여년의 서예역사를 거쳤지만 묘갈과 묘지석이 아니면 특별한 기록이 없기에 있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기록에 소홀한 민족이기에 비롯된 결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해방 전후 혼란기에도 소전(素筌) 등의 대가가 나오면서 남도의 서예에 대한 지역의 관심은 분명 적지 않았다.
남도 사람들은 조선이 건국된 후 약 200년간 중앙정계에 활발하게 진출했다. 그러나 당쟁과 정변으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피화를 입으면서 사대부 후손들은 출사를 포기하는 정서가 형성됐다. 정여립의 난 등을 이유로 이 지역출신을 꺼린데다 후배를 이끌어 줄 선배가 없으니 진출의 기회가 더욱 막힌 것이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병자호란 이후부터는 변변한 벼슬자리에 앉은 인재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피화인의 후손과는 달리 사림들은 과거에 희망을 걸었다. 인생의 목표를 급제에 둘 만큼 몰두했다. 지방의 스승으로는 가능성이 부족하다고 여겨 서울과 충청지역까지 유학하는 풍토가 조성되기도 했다. 부유층의 자제들은 여러 스승을 찾아 유학하며 과거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합격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미 정부의 요직에는 특정지역, 특정 인맥으로 인해 전라도 출신의 등용은 사실상 철저하게 막혀있었다.
진출의 기회가 막혀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때는 출세의 길이 벼슬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의 응시자보다 우수하면 합격할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남도 출신들은 남에 비해 몇 갑절 더 노력하고 배웠다. 하지만 급제의 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벼슬을 하기 위한 노력이 지대했기에 남도의 서예수준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남도에는 많은 벼슬아치들이 귀양와서 살았던 고장이다. 왕조시대의 벼슬아치는 시․서․화에 능한 재주꾼들이다. 백성은 농사지어 나라에 세금 바치고 벼슬아치 뒷바라지 하는 것이 의무였다. 출세의 길은 오직 벼슬자리에 오르는 한 길이 있을 뿐이었다. 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으니 상대를 꺾어야 내가 산다. 마치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는 세상이랄 수 있다. 그 정글의 법칙은 문명사회에 와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귀양 온 벼슬아치들은 거의가 서예솜씨를 지닌 인물들이다. 곧 시(詩)․서(書)․화(畵) 3절의 교양을 갖춘 선비였던 것이다. 저마다 시를 짓고, 서예솜씨와 문인화를 그리는 능력을 지녔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당시의 선비들은 일가견(一家見)이 있다. 그런 솜씨를 가지고 있는 유배인들에게 글을 배운 제자들도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배인 가운데는 조선을 대표할 만한 서예가도 있었다.
시군별 유배자수는 △강진 16(5,24%) △고금도(강진) 9 △옥과 1 △광양 11(3,93%) △광주 5 △구례 1 △나로도 3 △나주 4 △낙안 1 △남평 4 △녹도 1 △담양 3 △돌산 1 △무안 3 △발포 1 △보성 4 △사도(여천) 4 △순천 11(3,60%) △신지 9 △여도(여수) 3 △영암 11(3,60%) △임자도 4 △장성 2 △장흥 13(4,26%) 제주도 53(17,37%) △지도 6 △진도 44(14,42%) △창평 1 △추자도 8 △함평 2 △해남 33(10,81%) △흑산도 16(5,24%) △흥양 10(3,27%) △지역불명 2 계 32개소 293명
유배자와 시서화의 전수는 남도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세밀한 분석과 정서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도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소전이라면 진도출신 손재형씨가 아닌가 싶네요.
원래는 추사 김정희 세한도의 쥔이었다고 합니다만 국회의원인가 나온다고 해서 세한도를 당시 돈 3500만원에 현 소유자 집안한테 저당잡히고는 결국 넘어갔다고 하네요.
이 분이 소전체로 일가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위이환 몇년전에 찍은건데...이거죠?...소전체...^^
소전 손재형 글씨입니다
저도 약간 달리 써본 글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