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회 백일장 - 장원 이름(학년) : 류채연(11) 제목 : 어머니
그 날은 지독히도 무더운 날이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며 짐을 챙기시는 아버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짐을 어깨에 멘 채 우리는 공항 밖으로 나왔다. ‘우리’. 아버지, 동생, 그리고 나. 공항 밖으로 나오니 몇 시간째 우리를 하염없이 기다려주신 기사 아저씨가 우릴 반긴다. 그러나 우린 침묵 속에 잠겨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15분. 서로 적막함에 잠겨 창문 너머 먼 산을 바라볼 뿐이다. 이토록 조용한 날이 있었으랴. 이토록 모두가 침묵 속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 아무도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한 채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맡지 못한 그리운 집냄새를 맡으며 우린 모두 분위기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데도 부족한 한 가지, 우리는 아늑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러한 조화도 없었을 것이다. 아늑한 집과 적막한 공기라니. 방에 들어섰다. 옷가지와 침구가 널브러져 있는 나의 방. 누가 그것들을 치우겠냐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그때였을까, 창문 너머 어렴풋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어 널찍이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그 익숙한 목소리는 옆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리운 마음이 사무쳐 혹시나 어머니의 목소리일까 짐작했던 나는 곧, 창문을 굳게 닫고 또 생각에 잠긴다. 나는 늘 집안의 골칫덩어리였다. 어렸을 적 나는 내 자신의 이기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항상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곤 하였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내 원활한 사교생활을 위하여 무엇이든 해주시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덕분이었을까. 나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곧 진정한 친구 사귀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나는 밤낮을 지새우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궁금했었다. 선생님인 어머니께서 왜 나를 놀게 내버려 두셨을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내가 좀 더 넓은 세상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경험해보고 교류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깊은 생각조차 모른 채, 그 때의 나는 친구들에게 전념하기에 바빴다. 항상 외로우셨을 어머니. 그 때의 나는 너무 어렸었나보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이학년을 마칠 무렵,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것 또한 나와 동생의 미래를 위한 투자였을 것이요. 갑작스럽게 국제학교 생활을 시작한 나는 많은 어려움을 겪곤 하였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과, 나와 다른 정서를 갖고 있는 한국 친구들. 항상 친구들과 함께 지내곤 한 나는 이 새로운 환경이 지독히도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굳게 먹으라며 용기를 주신 어머니. 그 때의 나는 왠지 모르게 그 한마디 한마디가 잔소리로 들렸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여기 와서 줄곧 있었던 원활하지 않던 인간관계에서 온 스트레스가 가시가 되어 어머니의 가슴을 쿡쿡 쑤시곤 하였다. 철없고 어리던 나. 나는 하염없이 이런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을 뿐이다. 머지않아 나는 내 나약한 마음에 굴복하여 우울증에 시달리곤 하였다. 항상 어머니를 원망하며 내 삶을 비탄하기만 하였다. 그리도 철없었던 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울부짖으며 다시 한 번 어머니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이기적인 성격 어디 못 가랴. 나는 매순간 남들을 비판하며 내 처지에 대해 불평만 늘어뜨렸다. 그런 나를 끝까지 넓은 아량으로 보듬어 주신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누가 보듬어주랴. 어머니도 한 인간, 한 여성으로서 힘들었던 시간이 분명히 있었으리라. 다만 나는 너무 어리고 무지하여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간은 금세 흘러 또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다시 한 번 내 오랜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설레어 밤을 지새곤 하였다. 기나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우리 가족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친구들과 노는데 전념해 집을 자주 들어가지 않고는 했다. 어머니가 어딜 가시는지 신경도 안 쓴 채. 그런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같이 병원에 진단을 받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심심했던 찰나 나는 흔쾌히 수락하였다. 병원으로 가는 길,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졸리셔서 그러시구나 생각한 나는 차 안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우리는 진검실로 향하였다. 그런데 웬걸, 어머니는 나와 다른 진검실로 향하셨다. 굵고 붉은 단어 ‘암 진단센터’. 그때까지도 난 한 명의 철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병원에 갔다 온 며칠 뒤, 나는 작년에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미국 수능을 준비하기 위해 기숙사 학원에 들어갔다. 며칠이 지났을까. 기숙사 친구들과 친해지고 어울려 지낼 무렵, 원장님을 통하여 전화 한 통이 왔다. 전화 통화가 끝날 무렵, 나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암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따뜻하게 나를 보듬어주시던 나의 어머니가 암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숙사 학원에 있던 두 달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보통 드라마에서만 보던 비극이 나에게 실제로 찾아왔던 것이다. 일주일간은 하염없이 슬프기만 하였다. 울기도 하고 밤도 지새우며 이 상황을 부정하였다. 다음 일주일동안은 걱정만 하였다. 다시 우즈베키스탄에 돌아가면 어떻게 생활해야 할까. 또 다음 일주일은 고찰을 하였다. 그토록 굳세 보이시던 어머니께서 왜 암에 걸리셨을까 생각을 할 무렵, 지난 세월의 내 행동들이 머리 속에 하나하나 스쳐간다. 항상 울며 어머니께 하소연하는 나의 모습. 그토록 지우고 싶은 기억들. 모든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내 마음을 쿡쿡 쑤신다. 어머니를 한국에 두고 온 채 우리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에 돌아왔다. 모든 게 달라졌다. 나는 내 동생에게 제 2의 어머니다. 나는 더 이상 울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남에게 의지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어머니의 그늘에 숨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책임감을 짊어진 채 나는 뒤를 돌아본다. 환히 웃고 계시는 우리 어머니. 항상 나를 위해 고생하신 우리 어머니. 비로소야 나는 어머니를 보기 시작하였다. 나의 그리운 어머니. 떨어져 있는 만큼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나의 어머니. 나는 오늘도 창문을 굳게 닫고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생각에 잠긴다. 보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소감 및 심사평
윤란희 KOICA 87기 한국어교육 - 타슈켄트 정보통신대학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한국사이버외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 졸업
채연 양의 글을 읽고 아마 눈시울이 붉어지거나 코끝이 찡해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든 자리는 몰라도 빈자리는 안다고, 우리는 어리석게도 누군가가 떠나야만 그 사람이 나에게 또 내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저도 스무 살 남짓했던 시절의 철없던 제가 떠올랐습니다. 대학도 들어가기 전 이른 회사생활을 시작한 것이 모두 가난한 집안 탓이라 여기며 늘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허비했던 시간들. 아마 집에 돌아오면 제대로 저녁 한 끼도 먹기 힘들만큼 지치신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그저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떠나기로 한 여행에서 cd 플레이어를 챙겨오지 않았다고 생각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제 모습은, 기차표를 손에 꼭 쥐고 아쉬워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평생 마음속에 아파하는 것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철없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어머니께서는 저의 이런 철없던 모습을 모두 기억에서 지우시고, 먼 타국에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제 건강만을 늘 걱정하시며 대견해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마 채연 양의 어머니께서도 이렇게 담담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글로 풀어낼 줄 아는 성인으로 자라난 것을 보시면,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또 그 어머니의 그 딸로서, 앞으로 채연 양도 아름다운 한 가정의 이해심 많고 다정한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한된 시간 안에 빠른 속도로 긴 내용을 써내려가느라 ‘-곤 하였다’, ‘그 때의’라는 문구가 자주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두고 본인이 쓴 글을 검토하며 수정하는 시간들을 조금 더 거친다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한 깔끔한 문장 안에 감동까지 배가하는 작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사프 우즈베키스탄 프로 축구 챔피언 컵 우승
10월 19일 올해의 우즈베키스탄 프로 축구 팀의 챔피언을 가리는 챔피언 컵 결승전인 분요드코르 팀과 나사프 팀의 경기에서 나사프팀이 창단 이래 최초로 우승컵을 차지했다고 축구 협회는 밝혔다. 나사프 팀은 이날 경기에서 2:1로 우즈베키스탄 최강팀 분요드코르 팀 누르고 5번째 우승컵 도전 만에 우즈베키스탄 최강팀으로 우뚝 섰다. (10월 19일 uzreport.uz)
우즈벡, 9개월간 GDP 8% 성장
내무부 통신에 따르면 2015년 1월 ~ 9월까지 우즈베키스탄 GDP 성장은 8%를 기록한 것으로 정기 내각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이중 산업 생산은 7.3% 증가했으며 농업 생산 6.6%, 소비재 10.1%, 소매 15%, 서비스 12.9% 각각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인복지의 해’를 맞아 노인 복지사업에 2조 숨이 투자되었으며 농촌지역 발전 계획에 따라 9,300여 채의 개인주택이 새로이 건설, 보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기간 동안 21,400개의 중소기업이 새로이 창업되었으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 증가한 수치이다. 이 밖에도 국도 정비 및 건설 사업에는 1조 숨이 투자되었다. (10월 19일 gazeta.uz)
야채, 과일 육로 수출 일시 허용
10월 9일 정기 내각 회의에서 지난 8월 28일 결정되어 9월 1일부터 시행해오고 있는 감자, 멜론, 포도 등의 야채, 과일 육로 수출 금지에 대해 새로이 논의하고 이를 일시적으로 해제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지난 8월 28일 결정되어 9월 1일부터 시행해오고 있는 감자, 멜론, 포도 등의 야채, 과일 수출은 수출과정을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철도, 항공으로 만 수출 허용된 바 있다. (10월 19일 gazeta.uz)
라트비아 환경부 장관이 이끄는 정부 대표단 공식 방문
우즈베키스탄 국가위원회에 따르면 라트비아 환경부 장관이 이끄는 정부 대표단이 우즈베키스탄을 공식 방문했다고 밝혔다. 라트비아 정부 대표단은 이번 방문을 통해 녹색화 사업의 협력 유망 분야를 비롯해 청정 기술, 물 처리, 재활용 및 폐기물의 처리뿐만 아니라 무역 경제 협력 관련 사안들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우즈베키스탄 정부측은 우즈베키스탄 철도분야와 관련한 설명회를 개최하고 기타 우즈베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친환경 기술에 관해서도 회의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10월 20일 uzreport.uz)
식품 산업 2020년까지 2배 수출 증가
우즈베키스탄 식품 산업 업계는 2020년까지 수출을 2배로 증가시키고 수입은 80%까지 줄여나가기 위해 4억 1천만 달러 예산으로 300개의 주요 식품 산업 발전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갈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식품산업 발전 대형 투자 프로젝트를 통해 농촌지역 일자리 창출과 10만 톤 이상의 식품을 추가 생산해 나갈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식품산업은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24년 동안 전체 산업 생산량의 17%를 치지할 만큼 큰 성장세를 보여왔다. 한편 2011년 식품산업 분야 중소기업 차지 비율은 16.5%였으며 현재는 40% 까지 늘어난 것으로 조사되었다. (10월 19일 uzdaily.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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