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를 거닐며
바다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듯 끊임없는 출렁거린다. 그래야 맑고 푸르고 생동감 있게 하는가 보다. 넓디넓은 바다에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축축하게 젖어 물결을 타면서 반짝반짝 윤슬로 구슬이 된다. 그때그때 걸맞은 생각으로 담아두지 않으면 없어지고 만다. 저 물결은 지금 지켜보지 않으면 모두 사라진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새 물결은 새로운 모습을 만든다.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야 한다. 그래도 두고두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갈매기가 파도를 즐긴다. 바다는 수많은 흔적을 삼켜버리고 지워버린다. 아무 일 없었던 일상이다. 바지런함은 크고 작은 물결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해이해지는 영혼이라도 일깨우며 다독다독 챙기고 있다.
저쪽에 심술궂은 바람을 피하고 간간이 햇살을 받아 보랏빛 별꽃이 피고 샛노란 민들레꽃이 얼굴 내밀었다. 몇몇 송이 꽃피었다고 봄이라 하기엔 좀 쌀랑한 날이다. 개구리가 산속 잔잔한 웅덩이에 알을 낳아놓고 도롱뇽 알집이 차디찬 물속에 팔찌처럼 놓여있다. 파도가 출렁거린다. 바다가 출렁거린다. 햇살이 출렁거린다. 봄이 출렁거린다. 내가 출렁거린다.
배는 거침없이 그 출렁거림을 헤집으며 내닫는다. 물살을 바삐 헤집고 남쪽으로 간다. 제주도로 간다. 봄을 찾아간다. 겨울은 북쪽에서 서둘러 내려오면서 꽁꽁 얼어붙게 한다. 봄은 남쪽에서 답답하리만치 꾸물꾸물 오락가락하며 느릿느릿 올라오다 찔끔찔끔 온기를 불어넣는다. 바다와 함께 걷는다. 봄을 그려보면서 걷는다. 바다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있다.
누가 저 넓고 넓은 바다를 저토록 팽팽하게 당길 수 있으랴. 그 누가 감히 광활한 바다를 하나의 거대한 다리미가 있어 저만큼이라도 다림질할 수 있으랴. 예전에 할머니는 광목천을 당겨 손질했다. 출렁거림이 멈추는 날 바다의 신비도 멈추리라. 바다가 울부짖어 토해내는 해조음이 깊어가는 밤이면 명곡이 되어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가슴을 후벼 파기도 한다.
받아들이는 가슴마다 새로운 해석으로 감동에 젖는다. 바다에서 빠뜨릴 수 없는 파도 소리는 태곳적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명곡이다. 오래된 아픈 가슴을 치유하며 웃기도 하고, 이미 잊었던 아픔을 들쑤시면서 되짚어 후회의 눈물에 젖어 들게 한다.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앞만 보고 부지런히 왔는데 어쩌다 앙금을 가슴에 묻어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따금 지난날이 불현듯 되돌려보는 토막 난 필름이 되었다.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춰보면서 회한에 젖는다. 오래 묵은 술맛처럼 은은한 맛이 묻어나는가 하면 전혀 낯설어서 갸웃갸웃 그냥 쉽게 추억이라 하면서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자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추억을 만들고 간직했다 즐거워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추억은 좋았던 일만 있는 것이다. 오히려 좋은 것은 지워지고 힘들면서 쓰라렸던 일이 억척스레 남아서 지났어도 미안한지 갈고 닦아 아름답게 빚어내면서 뒤늦게라도 미소 짓게 한다. 되살아나는 추억만큼 새롭고 아름다운 것도 드물다. 진즉 이랬으면 오죽 좋으랴만, 부족한 것을 정리하고 채워 곱고 고운 옷에 멋지게 단장해 추억이란 이름으로 즐겁게 한다.
뜬금없이 떠오르는 추억이 입가에 살며시 미소로 배어난다. 그 추억을 머금으면서 한층 성숙해지기도 한다. 추억만큼 자부심이 넘치도록 자랑스러운 것이 없다. 나도 한때는 이랬는데 하며 자긍심과 위안을 받기도 한다. 막상 저 바다 물결은 아무리 요란스러워도 스스로 추억을 만들지 못해 사라지면 그뿐이지만 바라보는 사람은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다.
처음에 왔을 때는 바다가 나를 마구 흔들어 대면서 정신을 못 차리게 했는데 이제는 내가 봄과 함께 바다를 흔들고 있다. 단순히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풀어놓고 함께 노닐며 즐기고 있다. 햇볕도 한 줌, 바람도 한 줌, 바다도 한 줌, 움켜잡아 본다. 비록 손에는 뭉클하게 잡히는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넘치도록 차올라서 출렁거리고 있다.
삶 자체가 수없는 부대낌이면서 견뎌내고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밀쳐내면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보다는 내일에 꿈을 싣고서 희망을 담는 것이다. 힘에 겨워도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에서 끊임없는 도전이다. 걸음마 익히듯 반복하다 보면 다듬어지고 단단해져 모양새를 갖춰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투를 수밖에 없다. 잘못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서투름에서 익숙함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보람을 찾는 것이다.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삶으로 어려움도 힘이 되고 서러움도 기쁨으로 바꿔 가는 것이다. 서둘기보다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다. 혼자 아닌 함께 더불어 듬직하다. 이웃과 소통하며 토닥토닥 가는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