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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12:1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어느 노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반응이 도무지 시원치 않았습니다. 더러는 졸기도 하며, 시계를 보기도 하며 , 성경책을 여기저기 들쳐보기도 하는 둥 대부분은 딴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점점 맥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앞 좌석을 보니 할머니 권사님이 계속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은 용기를 얻어 설교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은 할머니 권사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권사님, 오늘 설교 말씀은 정말 권사님을 위한 말씀이었던 것 같군요
그런데 어떤 말씀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요?"
권사님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대답했다.
.
"말씀은 잘 모르겠구요.
목사님. 며칠 전에 제가 오랫동안 키우던 염소가 죽었어요.
목사님의 수염을 보니까 자꾸만 그 염소 생각이 나서...
그만 흑흑흑...
H. G 웰스라는 역사가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실패와 비극이 오늘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다고 분명하게 믿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라가 평화롭고 그리고 왕으로 힘을 얻고 모든 것을 가진 자처럼 살아가는 것을 체험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다윗과 솔로몬을 조상으로 둔 후손들이라면, 다윗 자손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계속해서 차지했는데 말입니다. 그것 자체가 역사 아닙니까?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그것 자체가 증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순종보다는 불순종이 훨씬 많습니다.
성경은 왕의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를 이야기합니다.
12:1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솔로몬 왕이 잘못해서 나라가 둘로 나뉘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께 가장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가장 강력한 책임도 물었습니다. 그로 인해 나라가 둘로 나뉘었습니다. 둘로 나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다윗의 유다 지파와 수도가 있었던 예루살렘을 주변에 살았던 베냐민 지파를 남기고 다 빼앗은 것입니다.
그렇게 나뉜 유다에 첫 번째 왕이 르호보암입니다. 17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다음의 그의 아들 아비야입니다. 3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다음이 아사입니다. 왕으로 41년 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3명의 왕들의 이야기를 역대하에서 만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왕이 된 후에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르호보암 왕 제 오 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그때 온 군대가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고 애굽에서 온 병사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때 이 일로 인해 왕과 신하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의논을 하는 중에 선지자 스마야가 등장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하셨다 한지라
이때에 르호보암과 백성들은 겸손하게 회개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스마야를 통해 그들을 조금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여러분 그다음에 왕과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어려웠을 때에 가졌던 그 마음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왕은 아비야입니다. 그에게도 비슷한 일이 생깁니다.
르호보암이 죽은 후에 아비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옵니다. 이때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비야 40 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이야기하며 이 싸움에서 물러나길 청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비야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하13:1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
이 전쟁에서 남유다의 아비야는 대승을 거둡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철저하게 백성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힘을 쏟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들 때, 모든 것을 빼앗기기 될 때 지켜주신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섬기며 순종하며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욕되게 배신한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통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아들 아사가 왕이 된 것입니다.
그는 정말 처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샬롬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우상을 파괴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로 열심을 내었는가 하면 자신의 어머니가 아세라를 섬기자 그것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태후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그 정도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당연히 그는 강한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고 주변 나라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으로 얼마 있지 않아 애굽의 100만 대군이 쳐들어 왔습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용사 58만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의 행사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도와 애굽의 100만 대군을 물리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35년 동안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그가 변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영원할 것 같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더 뜨겁고 대단할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36년째 왕의 자리에 있어 통치를 하던 그때 북이스라엘에 바아사 왕이 베냐민 땅 라마에 쳐들어와 그곳에 성을 쌓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아사 왕은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았습니다. 왜 불행한 생각은 어느 때 너무도 정확하게 맞는지 말입니다.
그는 아람 왕에게 사신을 보내 북이스라엘 바아사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자신들이 더 많은 은과 금을 줄 것이니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더 많이 금과 은을 받고 군대가 남유다로 집중하고 있는 북이스라엘을 쳐서 몇 개의 성을 빼앗습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외교적 승리입니다. 덕분에 은, 금을 내어 주었지만 위기에서 오히려 라마에 성읍을 짓기 위해 가져다 놓은 재료들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능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장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니는 과거에 백만 대군의 애굽의 손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겼는데 어찌하여 아람 왕을 의지하였는지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선언했습니다.
왕은 화가 나서 선견자를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몇몇 경건한 이들이 왕에게 바른말을 했다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발에 병이 생기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고집하며 의원에게 자신의 병을 맡겼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한 학생이 성적이 불량해서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 왔습니다. 아버지가 담임선생님과 성적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다가 “선생님, 제 아들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역사과목의 성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반문을 합니다. “아버님은 옛날 학교 다니실 때 성적이 어떠셨는데요?” 그러자 아버지가 머리를 긁으면서 “저야 뭐 형편이 없었지요.” 이때 역사 선생님 말씀하십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있지만 뼈가 있는 유머입니다.
3명의 왕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패턴은 비슷했습니다. 거의 똑같았습니다. 왕이 되어 초창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신앙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고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하나님의 뜻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분명 절망의 순간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왜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걸까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간이 지나 국정 운영의 경험이 생기면 자신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아닐까요. 왕의 자리는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자신들의 부하의 목숨을 얼마든지 좌지우지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더 많이 반영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섭으로 여기게 됩니다.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그 이야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학대하며 더 이상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자기를 낮추어 순하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겸손을 뜻하는 영어 단어 가운데 ‘Humility’라는 단어의 어원은 ‘흙’, ‘땅’이라는 뜻하는 ‘휴머스’(humus)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인류의 조상을 뜻하는 아담도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나왔습니다. 라틴어에서 사람이라는 뜻의 humanity(사람)와 겸손이라는 뜻의 humility(겸손)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사람과 겸손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겸손한 모습을 가질 때 하나님의 뜻의 합당한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은 배우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역사에서 배웁니다. 말씀에서 배웁니다. 스스로 자신의 교만에서 오히려 배웁니다. 그 배움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강성한 자가 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잘못을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잘못을 통해 영적 변화를 이루어갑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려고 하는 우리의 죄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역사는 반복입니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장점 혹은 특징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잘못을 하지만 그 잘못을 오히려 이겨내는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억에 대한 실험 연구를 한 최초의 심리학자는 독일의 에빙하우스(1850-1909)였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얼마나 머릿속에 남아 있고, 또 잊혀지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여 발표했습니다. 그것을 그래프로 표시한 것이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입니다. 에빙하우스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문자나 숫자를 암기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마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를 측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잊어버린 단어는 다시 암기했는데 같은 내용을 두 번째 암기할 때 첫 번째 암기할 때보다 시간이 덜 걸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실험을 6년간 연구했던 그는 반복하는 것의 효과, 즉 같은 횟수라면 "한번 종합하여 반복하는 것" 보다 "일정 시간의 범위에 분산 반복"하는 편이 훨씬 더 기억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학습한 내용은 빠른 속도로 망각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학습 뒤 10분 뒤부터 망각이 시작되고, 1시간 뒤에는 학습양의 50%가 지워지고, 한 달이 지나면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어 단어를 아무리 열심히 외워도 금세 잊어버리는 것은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이 망각을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하나, 꾸준한 반복입니다. 반복에서도 주기가 중요합니다. 10분 뒤에 배운 내용을 바로 복습하면 1일, 1주일 뒤 복습하면 한 달, 한 달 뒤 복습하면 6개월 이상 기억이 지속되어 ‘장기기억’으로 전환됩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수업이 끝나면 아주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선생님이 특별히 강조한 내용을 간단히 훑어보고 그날 배운 내용은 반드시 그날 복습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오늘 등장하는 왕들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왕이 되게 한 것을 말입니다.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조건임에도 이기게 하심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기도하고 말씀 안에서 진리를 찾고 그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잡고 그 말씀으로 영적 양식을 삼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없는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받은 은혜를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그 사랑을 반복해서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더 십자가의 은혜가 더 깊어지도록 말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를 자주 드리는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멀리하면 금방 하나님을 잊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배우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을 날마다 사모하며 찾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 같이 내 것처럼 사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어리석은 사람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을 통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다시 이전에 옛사람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말씀을 대적하고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일이 풀린 것을 오히려 자신의 업적이고 지혜이며 그것이 자신을 영화롭게 했다고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를 바로 보고 말씀을 통해 역사가 반복하듯, 죄를 반복하는 나 자신을 정확하게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반복하여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믿음의 자녀가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