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임하시는 날에 있을 일을 두 남자와 두 여자의 비유로 가르침
마태복음 24장 40-42절 /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인자의 날에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임
예수님은 노아 홍수 때의 일과 함께 또 하나의 다른 비유(24:40-41)를 들어서 역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아무도 준비하고 깨어 있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자체를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아버지와 아들일 수도 있고 장인과 사위일 수도 있으며 주인과 종일 수도 있는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또한 어머니와 딸일 수도 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일 수도 있으며 여주인과 여종일 수도 있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데려감을 당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인 자신은 버림을 받고 있는 기막힌 일이 일어나는데도 이렇게 되기까지 전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버림받음 속에서 있게 되는 데려감에 있는 사람
이 비유는 앞에서의 노아의 때와 같을 것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만 육체일 뿐임으로 죄악이 관영하는 것에서 노아의 때에 있은 홍수 심판에서 보는 것과 같이 멸망의 버림을 당하는 것에서 주님에 의해서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임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는 것에서, 또는 맷돌을 갈고 있는 것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할 것이나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합니다. 이것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할 것에서 데려감을 당할 사람이 그래도 절반은 되는 확률적으로 50%는 될 것이란 사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데려감을 당할 사람이 적어도 50% 안에는 들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는 것으로 하시고 있는 비유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노아의 때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중에 홍수 심판을 당하여 멸망을 당하면서도(마 24:37-39), 또는 롯의 때에서 보는 것과 같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으며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는 상황에서도 지금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서 멸망의 때를 맞이하여 버림을 당한 것을 들어서(눅 17:26-29) 세상 마지막 때에 있을 일을 알려주시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버리고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감으로 사람들에게서 인자가 버려진 것처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인자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유 1:7). 그러한 때에 인자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에게 구원의 능력을 베푸셔서 자신의 나라에 함께 데려가시는 일을 하실 것을 예수님은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또한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고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버려지고 또한 데려가지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당하다’의 수동태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힘을 행사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버림을 당하는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있게 되며, 데려감을 당하는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있게 됩니다.
인자의 임하심을 예비함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자세를 생각함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이 갖는 관심은 단지 자신들이 육체인 것에서 육체를 따라 사는 것, 곧 육체가 품고 있는 욕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곳곳에 있는 온 땅에서 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성령의 생각을 따라 성령의 일을 도모하며 삽니다. 이제는 몇 개월이 지난 과거의 일입니다만, 지난 대선에 이어서 2년 만에 치러지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4월에 있었습니다. 선거 결과에 의해서 대통령도 영원하지 못하고 바뀌며, 국회의원도 영원하지 못하고 바뀌며, 여당이며 야당인 정당도 바뀌기도 하고 지키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국민의 일부는 환호하고 또 다른 일부는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 그리고 한 해 두 해가 지나며 지지하고 믿었던 정부에 낙심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국민들의 마음 모두를 충족시키는 정권도, 국회도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언제든지 대선 후에도, 국회의원 선거 후에도 다음 선거 때까지 충돌을 갖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은 시시비비를 가지며 희희낙락하는지요. 그리스도인은 여당인이고 야당인인지요. 예수께서는 생명 없는 일은 생명 없는 자에게 맡기고, 생명에 관심 있는 자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세상에서 힘 있는 자들이 펼쳐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이며, 마지막에는 먼지처럼 사라짐으로 그 끝을 볼 것입니다. 그런 그들은 주의 나라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주의 나라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주의 나라는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해 가십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품음에 있게 해서 입니다. 교회에 와서 듣는 것이 이것이니 이 마음을 품음에 있어야겠습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서 사람들 속에 세워져 있으면서 이 마음을 품음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자로 있어야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는 그것으로 말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거에 목사가 출마하는 것을 보며, 선거철에 교회에서 성도들이 여당의 지지에 있고 야당의 지지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만,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목사는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직분으로 임직되었으니 정치에 나서는 것이 아닌 교회에 전념하여 그 직무를 수행하여야 하며, 성도는 여당인으로서의 지지도 야당인으로서의 지지도 아닌 선거 기간이 되면 자신의 지역구에서 여당이든 야당이든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을 위한 정책에 가장 신뢰하는 자를 선택하여 투표에 임할 뿐이며, 그 결과에 승복하고 올바르게 정책을 시행하는지를 판단하며 그 분별에 있으며 다음 선거에서 이를 적용하여 보다 나은 후보자를 뽑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한 것이지, 목사도 성도도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은 시대의 이 세상에 있으면서 주께로부터 받은 바인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사는 믿음의 의에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주께로부터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으니 말입니다. 하여, 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