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박재순
부안저널 발행인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57학번
010-3781-1877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평안하고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특히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고 곧 인생을 마감하게 될지 모르는 처지에서는 쾌적한 환경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멋있고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지금 살아가는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내 뜻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서 쫓기듯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옷이 날개라는데 집안에서는 개량 한복이나 청바지 한 벌이면 편히 잘 지낼 것 같은데 개량한복은 절의 스님처럼 보이고 청바지를 위아래 세트로 입으면 지금 20대로 알고 경망스럽게 군다고 지청구다.
나도 젊었을 때는 충무로나 소공동의 ‘잉글랜드’나 ‘GQ’ 같은 일류(一流) 양복점에서 땡볕을 부른 강진 같은 콘티낸탈스타일로 타이트하게 멋을 내기도 하고 최희준 같은 아이비스타일로 중후(重厚)한 멋을 내기도 하며 ‘하숙생’이나 ‘길 잃은 철새’ 같은 노래도 곧잘 좋아 했었다.
지금은 나이들어 시골에 박혀 파크랜드나 아웃토반 같은 기성복 일색이지만 오래전 전주에서 롯데백화점을 개관할 때는 곧바로 달려가서 수입품인 ‘Lee’ 청바지와 단풍잎 색깔과 재색 Lee 점퍼 두 벌을 사서 지금도 즐겨 입는데 10대인줄 알고 경망스럽게 차려 입는다는 지청구에 1년에 한두 번 야외에 갈 때나 꺼내 입는다.
‘옷이 날개’라는데 살아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다니면서 살지 못하면 이처럼 큰 비극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큰소리치기에는 나이가 들고 가정의 평화와 신문쟁이라는 하는 일의 비중을 생각해서 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평화로운 조화를 위해서 쥐 죽은 듯이 잠자코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도 먹고 싶은 것을 내가 가꾸어 먹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늘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알고 다만 입고 싶은 것은 사회의 이목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도 오늘은 일요일이니 청바지에 입고 싶은 셔츠를 걸치고 싼 장난감처럼 작지만 내 분신 같은 차를 가까운 바닷가로 몰고 나가서 가슴을 펴고 심호흡이나 한번 크게 하고 와야겠다.
슬기롭게 신문 만들기
슬기롭게 신문 만들기
이순(耳順)에 들어 주위의 간청으로 그러니까 환갑에 완전히 타의에 의해 전혀 생소한 뜻밖의 일인 ‘부안저널’을 창간한지 어언(於焉) 25년이 되었다.
창간호는 1만부를 발행하고 이후 5천부를 발행하면서 5년을 지나고 보니 창업자금으로 받은 5천만 원이 바닥이 나서 암담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깜냥에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오기로 다시 발 벗고 나섰다.
TV도 프로가 재미없으면 끄거나 채널을 돌려버리는데 지역신문도 볼 것이 없으면 거들떠 펴 보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용을 재미있게 하고 특히 지면 구성을 다양하게 해서 꾸준히 하다 보니 매호 5천부 가까이 발행하여 군(郡)단위에서는 제일 많이 읽히는 지역신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사옥도 마련하고 비록 작기는 하지만 저렴하게 산 i30 승용차도 굴리고 창간 때부터 벼르던 도서실 겸 자료실에는 구입하거나 기증받은 신간 서적과 고서로 가득 쌓이고 우리고장의 향토 민속품 역시 기증 받고 수집한 것이 1000여점이 넘어 또다른 볼거리로 군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도록 늘 벼른 것이 큰 자산이 되어가고 있다.
창간때는 ‘사설’과 ‘종소리’, ‘웃음마당’ 그리고 ‘만화’등 다양하게 지면을 구성했는데, 지금은 기사와 좋은 글인 ‘기고문’과 ‘발행인칼럼’그리고 낙수(落穗) 코너인 ‘중언부언’을 읽고 많은 독자들이 도움말로 격려를 해주고 있다.
오래전에는 서울에서 전화로 자기는 집을 사서 이사를 했는데 전에 살던 사람한테 부안저널이 계속 우송이 되어 무심코 읽다보니 자신이 계속 보고 싶다며 자기명의로 발송을 부탁하며 지대(紙代)를 송금하겠다고 해서 무척 기뻤다.
부안저널을 발행하면서 취재 편집 그리고 배달까지 고생도 많았지만 보람도 느끼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특히 어두운 기사보다 밝고 기쁜 소식들을 게재하려 애쓰다보니 격려와 칭찬이 이어진다.
수년전에는 시골에서 목사로서 어렵게 지내던 고등학교 일년 후배가 찾아와서 함께 바지락 칼국수를 먹으면서 ‘부안저널’에 글을 게재하고 싶은데 돈을 얼마를 내야 되느냐고 해서 내가 오히려 고료(稿料)를 드려야 된다고 했더니 헤어지면서 짧은 글이 아니고 자신이 쓴 소설책 상·하 두 권을 연재하고 싶은데 양이 많다고 해서 나는 글감이 많아 더 좋다고 했다.
후배는 며칠 후 책 두 권을 보내며 연재를 부탁하고 부안저널 운영에 보태 쓰라며 거금 3천만 원을 송금했는데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일을 창업했는데 성공해서 대박이 났다고 했다.
신문사 운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데 부안저널은 창간 당시 5천만 원과 부안핵패기장 사태 때 그간 전국에서 열다섯 번이 넘게 핵폐기장 유치를 많은 지역신문들이 모두 반대했는데 오직 부안저널만이 찬성했다며 많은 홍보비를 지원해주고 핵폐기장이 있는 일본은 많은 군민들과 함께 수차례 그리고 프랑스, 스웨덴 등 유럽에 있는 핵폐기장을 기자들과 함께 견학했는데 나는 연장자로 앞장서 다함께 견학을 잘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좋은 글을 기고해주시는데 그치지 않고 도움말을 주시고 또한 성원해주시는데 나는 발행인으로서 많은 분들의 기대와 성원에 어긋나지 않도록 알찬 부안저널을 만들어야 한다고 스스로 늘 다짐하고 있다.
끝으로 덤이기는 하지만 가장 즐겁고 보람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망구십(望九拾)에 무료히 먼 산을 바라보며 유유(悠悠)하지 않고 늘 글을 쓰고 다듬으며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무척 감사하고 즐겁다.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 있고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小富는 在勤이요. 大富는 在天)고 알뜰한 신문사 운영으로 편집일 외는 퇴근은 오후 3시로 하고 분리수거로 폐지 등을 정성껏 모아 10㎏ 묶음 열 개인 100㎏ 넘게 매달 사 가는데 몇 푼 안 된다. 대외적인 문서 이외는 한번 사용한 A4용지의 이면지를 사용하며 근검절약(勤儉節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끝으로 나는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부안저널을 좋은 지역식문을 만들기 위해 날마다 중앙일간지 2개, 지방일간지 10여개 그리고 우리 지역은 물론 시군지역 지역신문을 다 받아 보고 있는데 나도 꼭 부안저널을 우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