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골의 성지, 조문국 召文國
신라 초기 당시,
지금의 경북 의성군에 조문국 召文國이란 독립된 나라가 있었다.
도읍지 都邑地는 의성군 義城郡 금성면 金城面 일대 一帶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서는 기원 185년(신라 벌휴왕 2년)에 조문국이 신라에 병합 倂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 185년에 신라에 병합된 이후, 이 지역은 흉노족의 또 다른 근거지 根據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조문국 지역이 흉노의 영역이었던 하서회랑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 기련산의 흉노족처럼,
신라 왕실의 왕비를 지속적으로 배출 輩出 해 온, 중요한 성지 聖地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니 대륙의 하서회랑 기련산 출신, 흉노의 호연씨 부족의 후손이 조문국 터에 자리 잡았다고 보면 된다.
호연씨 부족 중에서도 이미 검정 檢定된, 정통성이 입증된 부족이 의성의 조문국에 입성 入城한 것이다.
지질 地質이 화산 폭발로 이루어져 물이 잘 빠져 예로부터 물이 귀한 고을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는 몽골 초원과 가장 유사한 지질이라고 보면 된다.
중세 中世 신라 왕실에서는 이 조문국 출신으로 밝혀진 왕비들이 많다.
지소태후, 미실태후, 등등
그리고 몇 몇의 왕비와 태후들은 이성 異姓 간의 교류가 자유분방 自由奔放하여,
현대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이성 간의 교제나 성적 문란 性的 紊亂함을 보여준다.
위의 두 명의 태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신라 왕실에서는 이에 대하여 따지거나, 어떠한 문책 問責도 하지 아니하고 별다른 제지가 없다.
이는,
왕비 王妃들의 권세가 막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소불위 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왕비나 태후의 뒷배경이 든든하다는 얘기다.
그렇다.
왕비들의 배후에는 친정 親庭인 조문국이 있었다.
이는 신라 왕궁에서는 조문국 지역의 왕족 王族을 우대하고 있었다는 한 증거다.
신라 왕실에서는 조문국 출신 왕비를 성골 聖骨의 모태 母胎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엄격한 신분 사회 체제에서 왕비나 태후의 ‘어긋난 행실’을 언급하는,
자신의 소신 所信을 가감 加減 없이 밝히는 용감한 신하는 곧바로 반역도로 내몰려 자신은 물론,
그의 가문 자체가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감히,
어느 누가 성골의 모태 母胎인 조문국 출신 왕비의 거취나 그 행보에 대하여
함부로 입에 올리거나 왈가왈부 曰可曰否할 수 있었을까?.
조문국 터,
의성군 금성면에는 현재도 200여 기 이상의 고분 古墳들이 즐비하다.
몇 기의 고분 古墳(왕릉)을 발굴하였는데, 무덤의 축조 방법이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왕족 고분인 목곽 적석분과 같다.
고분의 조성 시기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으로 여겨진다는 학계 學界의 보고다.
의성군 금성면에 가면 큰 무덤 앞에 ‘조문국 경덕왕릉’ ‘召文國 景德王陵’이라고 커다란 비석이 서있다.
높다란 무덤과 선명한 묘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사진 - 조문국 경덕왕릉.
지역명이 금성 金城이다.
금성면 동쪽에 홀로 우뚝 솟아있는 높은 산, 그 산 이름이 금성산 金城山이다.
* 사진 - 금성산 정상
* 금성산 金城山
금성산은 숱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의성을 대표하는 명산 名山이다.
해발 531m의 높이로 태백산맥 남쪽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 死火山이며 또한, 백악기의 자루형 칼데라 (caldera)를 가진 화산암 복합체이기도 하다. 산의 정상은 평편하다. 옛 삼한시대 부족 국가인 조문국 시대에 조성한 길이 2,730m,
높이 4m의 금성산성을 배경으로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산성을 따라가면서
흔들바위, 조문 전망암, 아들딸 바위, 동굴, 솟대 바위 등의 경관을 자랑한다.
금성산은 산정에 무덤을 쓰면 삼 년 동안 지역에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당대 當代에 운수 대통 運數大通하여 큰 부자가 된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도 가뭄이 심하면 동네 사람들은 각자 괭이를 들고,
금성산에 올라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는 실정이다.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 수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경주를 금성 金城이라 불렸듯이, 이곳 지명 역시 금성 金城이다.
고서 古書에는 수도 경주를 계림 鷄林, 또는 월성 月城으로 호칭하였으나,
14대 유례 儒禮 이질금(재위; 286~298)부터 금성 金城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신라는 이때부터 흉노 출신의 김씨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전통을 되살려 자신들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 14대 유례왕 재위 14년(279년)에 이서고국 伊西古國이 금성 金城으로 쳐들어왔다.
- 삼국유사
신라의 수도 경주와 의성군의 금성은 비슷한 시기에 동일 同一한 명칭 名稱인,
<금성, 金城>이란 지명을 같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금성 金城은 쉽게 이야기하자면, 김씨 金氏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성 城이라는 뜻이다.
즉, 알타이(金山)산맥 출신, 흉노족들의 관할 거주지 居住地라는 이야기이다.
신라의 수도 경주와 동격 同格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조문국의 부족장을 왕으로 인정하고 대우하였다.
조문 국왕의 딸은 알지(왕비)가 될 수 있는 신분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신라 왕자와 조문 국왕의 딸이 결혼하면 그 자녀들은 성골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경주 금성의 왕자와 조문국 금성의 공주,
두 가문 즉, 양 금성 兩 金城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
태어난 2세들은 왕이 될수 있는 완벽한 자격을 갖춘 고귀한 ‘금수저’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부연 敷衍하자면,
성골 출신의 2세 世가 비록,
연약한 신체로 태어난 여아 女兒(공주 公主)라고 하더라도,
진골 출신의 강건한 남아 男兒(왕자)보다는
품격 品格이 한 단계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왕 女王이 탄생할 수 있었다.
중기 中期 신라 골품제의 핵심 核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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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봤으요.^^
잘 봤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내요.
감사...
이런 숨은 사실이 있었다니.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