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외 4편 이수환 네가 밑줄을 치고 해질 때까지 읽은 책들이 전부 거짓말이라면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네가 삶의 초원에서 발견했다고 고이 간직한 붉은빛의 구슬들이 전부 사람의 피가 철과 함께 굳은 둥근 칼날 조각이라면 너는 어떡할 거니 저 먼 마천루들이 수직의 거대한 감옥이라면 너라는 사람이 양이 멸종된 세계의 양치기 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조상의 대체품이라면 붉은 구슬들이 무참하게 깨진 초원에서 나는 여린 발을 가진 네가 도대체 어떻게 이곳을 걸어갈지 모르겠다 너의 발에 박힐 유리들은 어느 날 너의 심장까지 올라갈 텐데 그것들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 앞에서 널 찌를 텐데 그러나 가장 날카로운 조각을 집어들며 너는 말했다 감옥에게 감옥의 진짜 이름을 물어볼 것이라고 양의 화석에게 물을 주고 기다릴 것이라고 모르는 척하기엔 이 붉은빛은 너무 아름답다고 내 말은 전부 나의 상냥한 거짓말이라고 그렇게 너는 멀리멀리 걷기 시작한다 어린 붉은 구두가 네 발을 감싼다 내가 듣고 싶던 말을 네가 했다 부활절 그래도 부활이 가장 큰 기적 아닐까요 라는 당신의 말을 당신과 다음 생도 함께하고 싶어요 라는 고백으로 바꿔 들어도 될까 2인용 식탁 위 막 삶은 달걀들의 날개 같은 김을 보고 이 밤 우리 사이 천사가 머무르고 있다 생각해도 될까 어둡게 저문 바람이 동굴이고 18평짜리 복도식 아파트가 세상일 때 죽음의 이란성쌍둥이 같은 잠에서 깨면, 눈을 뜨면 가장 처음 당신이 보일 때 하룻밤 하룻밤 하룻밤 하룻밤마다의 부활과 또 하루 또 하루 또 하루 또 하루란 기도 사이를 서성이는 나의 매일에 당신의 매일도 닮았을 것이라고 믿어도 될까 부활하는 기분은 이미 알 것 같지만 그래도 부활은 없어도 괜찮아요 포도향이 나는 초록색 사인펜을 한 손에 쥔 채 달걀을 빤히 쳐다보며 내가 원하는 생은 여기 이미 다 있어요 말해도 될까 천사의 날개에서 깃털 하나를 훔쳐 무엇이든지 알 수 없는 미래의 껍질에 그림을 그리는 마음들 그러나 이것으론 부족해요 누군가를 그려 넣는 사람들 생들이 다시 시작되는 밤 입 발린 말 그는 천천히 말하는 사람 너무 천천히 말해 그와 인사를 주고 받을 때 그가 입과 목의 모든 근육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 저작근 협근 구륜근 대관골근 설근 말해보는 것도 낯선 근육들의 이름을 말하기 전 그는 하나하나 떠올린다 백여 개의 미세한 우리의 일부가 우리가 소리를 낼 때 잠에서 깨어난다 오래 혹은 순간 우리는 그걸 너무 자주 잊어 어떤 말을 쏟아붓지만 그리고 후회하고 되뇌지만 그는 천천히 말하는 사람 모든 단어의 굴곡에 자신의 입술을 발라 보내는 사람 그의 말은 푸른 잔디밭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신랑이 빛나는 결혼반지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고 그와 말을 나눈 사람들은 모두 천천히 말한다 포식자의 눈 내가 입을 열었다 생각 없이 갑자기 이상한 것들 있잖아 늑대들 사이의 개처럼 개들 사이의 늑대처럼 눈을 마주치기 전까진 이질적이지 않은 BBQ의 Q KTX의 X Q와 X가 뭐의 약자지? O와 X가 아닌 Q와 X로 시작하는 단어는 오래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고
더 오래 생각해도 오답처럼 모르겠다는 문장을 머릿속으로 쓸 때
BBQ의 Q는 Barbeque 약자가 아니고 KTX의 X는 Express KTE는 이상하지 않니?
네가 말했다
폭설로 뒤덮인 도로에 사슴들이 있었다 눈 덮인 아파트들 사이의 사슴들처럼 아파트 4층에서 사슴들을 내려다보는 나의 눈처럼 수상하게
사슴이 있네? 내가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은 근처에 늑대가 있단 말이지
당연한 이야기를 해서 네가 무서운 순간이 있었다
의자를 생각하는 아침
지금도 세상엔 비행기가 날아가고 굳게 손을 잡은 연인들이 걸어가고 머리에 빨간 띠를 묶어 쓴 사람들이 대로 한가운데 모여 있고
나는 의자에 대해 생각한다
아주 편한 의자를
그래서 아주 오래 앉아 날아가는 비행기가 무엇으로 가득한지를 보고 연인의 손과 손이 만날 때 그 손이 얼마나 부드러워지는지를 보고 길을 걷던 사람이 어느 순간, 멈춰서 확성기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의자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당신을 생각한다
키는 얼마쯤 되는지 얼마만큼의 쿠션의 부드러움을 좋아하는지 두 팔을 위한 잠깐의 침대, 팔걸이는 어떤 재질을 좋아하는지 철을? 나무를? 플라스틱을? 당신을 초대하기 위해 그렇게 오래 바라보기 위해 오랫동안 생각하는 아침 .................................................................................................................................................... | 당선 소감 | 혼자일 땐 늘 인간에 대해 생각합니다. (중략)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눈과 /우리에게 포기하지 않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다리와 /우리에게 나에게서 먼 만큼 남과 가까운 손이 있는 이유는 /그리고 시를 쓸 때 그것들이 같은 방향을 향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보고, /가서, /손을 잡으라는 것이 인간의 오랜 이유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제 시를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더 큰 눈을, 더 꾸준한 다리를, 더 뻗어나가는 손을 꿈꾸며 쓰겠습니다. ▲ 이수환 / 2001년생.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2026년《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
| 심사 경위 |
2026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1,310명이 8,346편의 응모작을 보내주었다. 심사위원 신형철, 주민현, 진은영은 응모작을 한 달 동안 나눠 읽으며 본심에 올릴 작품을 선별했다. 본심에 오른 15명의 작품 81편을 다시 삼 주 동안 살펴본 뒤 7월 말에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아래와 같다. 감도연 「무엇이 사랑할 수 있을까」 외 7편 김사구 「수중가옥」 외 4편 김수진 「전래사랑경연」 외 4편 김해솔 「걱정 인형」 외 4편 박도이 「사랑과 정열을 언니에게」 외 4편 송서월 「풍경수첩」 외 5편 안병현 「4분의 4박자 울음」 외 4편 이고 「생활로」 외 4편 이수민 「비치볼은 영원이 쉽다」 외 6편 이수환 「끝과 시작」 외 4편 이태빈 「팔꿈치의 생」 외 4편 장윤아 「성탄절」 외 4편 차정경 「안심 귀가 서비스」 외 4편 최문희 「덜 나쁜 시를 찾아서」 외 4편 함정재 「고백의 형식」 외 4편 이 중 「4분의 4박자 울음」 외 4편과 「끝과 시작」 외 4편을 집중적으로 논의했고, 개별 심사평에서 밝힌 이유들에 의거하여, 당선작으로 「끝과 시작」 외 4편을 최종 확정했다. 당선작을 확정하고 편집부로부터 당선자의 이름과 소속을 전달받고 나서야 그가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재직 중인 학과의 학생임을 알게 됐다. 해당 심사위원은 당선자가 이번에 투고한 작품을 이전에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학생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심사위원단은 이 결과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블라인드 심사의 불가피한 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결과를 재고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심사위원단은 당선자에게 마땅한 축하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을 여기에 밝히는 것은 그만큼 모든 과정이 공정했다는 점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소중한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응모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 심사평 | 抄 신형철(문학평론가) 「끝과 시작」외 4편에서 결정적인 작품은 단연 「끝과 시작」이었다. 이 시의 어조와 표현이 가진 아름다움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서 굳이 강조할 것도 없다. 여러 번 읽으면 의외로 빨리 시시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시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태도의 깊이를 강조할 것이다. 이별은 한 사람에겐 ‘끝’이지만 다른 한 사람에겐 ‘시작’이다. 대개는 전자가 후자를 원망하고 후자는 전자를 지겨워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붙잡으려는 사람은 떠나려는 사람에게 이상한 방식으로 진다. 마지막 구절을 보니, 애초에 져야 한단 생각이었고 결국 뜻대로 되었던 모양이다. 끝이 시작을 이렇게 축복하다니. 이런 건 정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가 함께 보내온 다른 시들 중에서 「부활절」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의 밀도는 불충분해 보였다. 대개의 신인 공모는 수작 한두 개를 가진 응모자와 여러 편의 우수작을 가진 응모자 중에서 후자를 ‘안전하게’ 택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선택이 누적된 결과로 우리가, 두루 나쁘지 않은 시를 쓰지만 딱히 ‘대표작’(예스럽게 말하면 절창!)이랄 게 없는 시인들의 시대를 살게 된 것이라면? 이번 수상 결정은 심사위원 모두에게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모험이다. 부디 이 시인이 ‘허약하게 아름다운’ 시와 ‘치열하게 아름다운’ 시의 차이를 내내 의식해 주길 소망한다. 주민현(시인) 긴 논의 끝에 「끝과 시작」외 4편의 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너의 발에 박힐 유리들은/ 어느 날 너의 심장까지 올라갈 텐데/ 그것들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 앞에서 널 찌를 텐데”와 같은 문장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믿음과 의심, 아름다움과 배반, 마천루와 감옥, 진실과 거짓의 아이러니를 밀고 나가는 이 시는 세계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출발하는 시라고 느꼈다. 우리가 믿어온 장면의 아름다움을 의심하고 배반하며 “멀리멀리 걷기 시작”하는 이 시인의 서툰 말솜씨와 발걸음이 「포식자의 눈」과 같은 시에서는 이야기가 다소 맥없이 풀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러한 염려와 우려 속에서도 이 “천천히 말하는” 시인의 작은 목소리를 응원한다. 진은영(시인) 최종적으로 거론된 두 분의 시를 특별히 즐겁게 읽었다. 「4분의 4박자 울음」 외 4편은 읽는 즐거움이 컸다. 산문시들은 유려했다. 그러나 간결한 「증식」이 더 좋았다. 시가 아주 짧은 엽편 소설이나 우화들과 다른 건 뭘까? 시인이 그 점을 조금 더 고민해 본다면 곧 다른 지면에서 이분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끝과 시작」외 4편은 분명 따뜻하고 말랑한 것을 씹었는데 입속에 날카로움과 단호한 맛이 남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되풀이해서 읽었다. 이 매력적인 느낌의 더 분명한 정체는 시인이 앞으로 작품을 통해 직접 보여주리라. 당선을 축하한다. 등단한 지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좋은 심리학자나 좋은 철학자, 좋은 역사학자의 통찰 그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을 쓰는 건 내게도 여전히 요원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모든 시엔 그 씨앗이 뿌려져 있다. —계간 《문학동네》 2026 가을호 |